〈 192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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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의 마수가 아카데미를 습격하는 초유의 사태 이후,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고위 귀족을 필두로 한 학부모들의 항의가 만만치 않았다.
귀족 가문에 있어 자식이란 그 자체로 고귀한 핏줄을 이은 가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결혼을 통해 다른 가문과 맺어질 수 있는 수단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면 그 실력과 재능까지 겸비한 이들이었다. 고위 귀족들이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는 인재였다.
그런데 영원한 안전지대라 생각했던 아카데미를 마수가 습격했다.
사망자는 많지 않지만, 부상자를 포함하면 피해 규모가 꽤 된다는 소식이 각지로 타전되었다. 아카데미를 믿고 있었던 만큼 귀족 가문의 분노는 컸다.
당장 자식들을 돌려보내라는 학부모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다. 웬만해선 움직이지 않기로 유명한 델레모어 총장이 직접 나서 달래야 했을 정도였다.
학부모들의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아카데미로서도 도리가 없었다.
암흑교단의 일원이 황족의 측근으로 잠입한 전례 없는 상황이었다. 아카데미 내에 금번의 습격을 획책한 흑막이 더 숨어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조심스레 학내 구성원의 동태를 살피기로 한 아카데미의 결정은 지당했다.
물론 그 진정한 사유는 대외비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학부모에게 ‘당신 자식이 암흑교단의 끄나풀일지 모릅니다.’라고 말할 만큼 아카데미의 상층부는 멍청하지 않았다.
단지 아직 마수의 잔당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학생들을 내보낼 수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따름이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아카데미의 내부와 외부를 가리지 않았다.
기나긴 아카데미의 역사를 살펴봐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러나 위기는 영웅을 만드는 법, 그들은 만날 때마다 지난 습격 당시의 경험담을 늘어놓았으며 그러다 보니 유명인사도 여럿 탄생했다.
예를 들어, 델핀 유르디나와 엘시 라이넬라가 그랬다. 그러지 않아도 유명세를 누리던 그 둘은 최고학년다운 적절한 대처로 사상자를 줄이는 데 큰 공헌을 남겼다.
‘4학년을 이끄는 쌍두마차’라는 명성을 여실히 증명해내는 활약이었다.
그 외에도 검술학부 3학년 수석과 차석이 차례로 침착한 대처를 보이며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위기가 지나간 아카데미는 새로운 영웅을 발굴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 바로 ‘이안 페르쿠스’였다.
수렵제를 전후해서 눈부신 이력을 남기며 아카데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또 다시 수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우선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이안의 실력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는 점이 한몫했다.
지금껏 이안이 공개적으로 전투를 벌인 적은 대련을 제외하면 두 번밖에 없었다. 하나는 엘시 패거리와 충돌했을 때였고, 나머지 하나는 황녀 일행과 마찰을 빚었을 때였다.
전자는 아무리 그래도 기습의 이점이 컸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 후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였고, 또 그 공방조차 고속으로 이루어졌기에 그날의 무용담을 자세히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마수의 습격 당시 이안이 보여준 솜씨는 아니었다.
귀향제에는 아카데미 재학생 대부분이 참가한다. 그날 군중들이 두려움에 빠져 비명을 내지를 때, 홀로 마수들을 기계처럼 도륙하던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신속하고 망설임 없는 대응이었다. 그러나 정작 목격자들이 주목한 지점은 조금 달랐는데, 바로 이안이 지닌 야수에 가까운 전투 감각이었다.
도끼를 던지고, 검으로 급소를 찌르고, 자유자재로 무장을 전환하며 싸우는 이안은 심지어 맨주먹으로 마수의 얼굴을 으깨버리기도 했다.
그에 대한 무수한 소문 중 하나가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안 페르쿠스는 실전에서 두 배쯤 강하다.’
그 말을 증명하듯 이안 페르쿠스는 전장을 전횡무진 누비며 수십 마리의 마수를 격살했다.
또 하나 그의 활약이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동안 아카데미의 구성원들이 이안에게 보인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2주 동안 아카데미의 공적이나 다름없었다.
감히 제국의 제5황녀를 건드렸다는 죄목 탓이었다.
그는 난데없이 황녀에게 물을 끼얹는 불경을 저질렀다. 대륙 최고의 권세가를 건드린 결말은 비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의 구성원 대부분이 이안을 적대했다.
괴롭힘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이안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랬다. 무형의 폭력은 물론, 유형의 폭력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자행되었던 며칠이었다.
비록 이안이 본격적으로 대응에 나서자 물리적인 괴롭힘은 줄어들었으나, 그 후로도 그가 공공의 적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심리적인 폭력만큼은 꾸준히 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원한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괴롭혔던 학생마저 가리지 않고 구해냈다. 심지어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자신을 괴롭히던 학생들에게 힐링 포션을 넘겼다는 증언까지 나오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안을 미워하던 학생들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더해 이안이 저지른 그 ‘불경’마저 사정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었다.
마수를 동원해 아카데미를 습격한 배후가 암흑교단이라는 발표가 이어졌다.
고아원에 나타난 마인 이후로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는 곧 수천 년 동안 이름조차 잊힌 어둠의 권속들이 부활했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물론 그 파급효과를 모를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그들은 최대한 신중을 기해 발언의 수위를 조정했고, 당장 암흑교단이 전면에 드러날 일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암흑교단의 존재는 곧 이안의 인식에 반사효과를 주었다.
아카데미는 ‘암흑교단’이라는 수수께끼의 집단이 감당 가능한 세력임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그 과정에서 동원된 인물이 바로 이안이었다.
그는 단신으로 고아원의 마인을 쓰러트렸을 뿐만 아니라, 토굴까지 쳐들어가 암흑사제를 토벌하고 황녀를 구출했다.
그 놀라운 활약은 두 가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하나, 이안 페르쿠스란 인물이 지금껏 보인 활약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또 하나, 암흑교단의 음모가 영웅적인 인물 하나에 의해 분쇄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어느 쪽이든 이안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는 동경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그와 더불어 이안이 황녀에게 끼얹은 물이 ‘성수’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이안에 대한 인식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오해가 있었지만 그는 영웅이었다.
심지어 이안은 그 불합리한 폭력과 처우를 묵묵히 견뎌내기까지 했다. 이후 그를 괴롭히던 이들마저 차별 없이 구한 그 행적은 찬사를 받아 마땅했다.
여태껏 이안을 욕하고 비웃었던 아카데미의 구성원들의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반전은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반전을 일으키는 법이었다.
이안의 인식이 공공의 적에서 모두의 영웅으로 격상되었다면, 반대로 누군가는 그 이상의 격하를 겪어야만 했다.
당연하지만 그 희생양은 평소 이안의 대립항으로 손꼽히던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그녀는 오랜만에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고개를 푹 숙여야만 했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악몽, 혹은 그 이상의 적의가 소녀를 칼처럼 찌르고 있었다.
기가 죽은 채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는 그 모습에서 예전과 같은 품위와 기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애써 시선을 돌리다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시엔은, 이내 귀까지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저 사람이야? 그 충신을 오해로 괴롭히고…….”
“쉿, 쉿. 조용히 해라. 몰랐다잖아, 글쎄.”
“모르면 그 사람이 겪은 아픔이 사라지고? 지도자라면 아량이 넓어야 하는데.”
조롱과 조소가 쏟아진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 자극되자 황녀의 숨이 가빠졌다. 헐떡이면서, 황녀는 바삐 걸음을 옮겼지만 악의는 꼬리처럼 그녀를 따라다녔다.
어딜 가든 그녀를 욕하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래도 황족이라고 물리적인 폭력이 가해지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심리를 읽을 수 있는 황녀에게는 적대감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노골적인 폭력이었다.
아프고 힘들다.
그리고 속으로는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모두가 욕하지 않았나?
내가 몰랐듯이, 당신들도 모르고 그를 괴롭히지 않았나. 나는 이토록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매일 밤 눈물을 흘리는데,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은데.
어째서 당신들은 당연하다는 듯 내게 그 모든 죄책감을 떠넘기고, 나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사내에게 용서를 빌 생각조차 하지 않는지.
증오스럽고 미웠지만 황녀의 적은 이 세상 전부였다.
눈을 뜰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증오가 전해져 왔다.
지나가는 행인 하나하나가 품은 적의는 크지 않았지만, 그것이 수백수천의 흐름이 되면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육중한 강줄기를 이룬다.
황녀는 도망치듯이 내달렸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그녀를 조소하는 듯 느껴졌다.
시엔의 연회색 눈망울에 다시 물기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수습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이안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상단은 이미 파산 직전까지 간 지 오래였다. 이를 막아세울 방법이 존재는 하는지, 사실 황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은 어떻게든 아버지인 황제에게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헐떡이면서, 시엔은 집중치료실의 문 중 하나를 열었다.
그곳에는 한때 그녀의 동지가 머무르고 있었다.
루페시아 영애, 시엔은 거친 숨과 함께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루페시아 영애의 표정은, 아니 감정은.
“……안녕하세요, 황녀 전하.”
지독히도 싸늘할 뿐이라, 시엔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편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어린 시절처럼, 그 어디에도.
시엔은 모두의 적이 되었다.
벌써부터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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