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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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간 햇빛이 창문을 통과하며 육각형으로 쪼개졌다.
수많은 학생들이 입원한 집중치료실은 한산하면서도 북적였다. 유동인구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의 초조함이 그 걸음걸이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을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인기척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그때까지도 시엔과 루페시아 영애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황녀는 어색한 미소를, 그리고 루페시아 영애는 무뚝뚝한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전에 있었던 조우와는 일변한 양상이었다.
그때 루페시아 영애는 덜덜 떨고 있었고, 황녀는 당당하면서도 고혹적인 태도로 그녀를 설득했다.
그러나 단 며칠만에 그 구도는 깨지고 말았다.
이제 황녀는 인파에 쫓겨 도망친 죄인이었으며, 루페시아 영애는 그녀를 냉대하고 있었다.
물론 노골적인 괄시는 아니었다.
루페시아 영애는 여전히 예의를 다하고 있었고, 그 표정 또한 다소 가라앉아 있었지만 가식의 가면은 여전했다.
아무리 아카데미에서 만인의 적으로 전락했어도 시엔은 황족이었다.
감히 제국의 일개 귀족 따위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상대할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다.
다만 불행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시엔에게 있어 거짓된 호의 따위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점뿐이었다.
그 영롱한 연회색 눈동자에는 루페시아 영애의 진심이 하나하나 포착되고 있었다.
차가운 적의가 그녀의 가슴을 찌르고 지나갔다. 그 안에서는 실망감마저 느껴지고 있어서, 시엔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왜 그러느냐고 질문을 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황녀의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내뱉어지기도 전에, 루페시아 영애의 입이 열리는 것이 더 빨랐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그 말을 듣자마자 시엔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엔이 루페시아 영애를 찾아온 까닭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가 저질렀던 죄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껏 시엔은 이안에게 많은 죄를 졌다.
그를 왕따시키고 괴롭힘을 사주한 것은 물론이고, 당장 이안이 애지중지하는 여동생의 상단이 망하기 직전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습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루페시아 영애와 관련이 있었다.
징계위원회.
과거에는 루페시아 영애를 억지로 설득해서 얻어낸 기회였다. 이안 페르쿠스를 비밀리에 퇴학시킬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때의 희열이 이처럼 비참한 절망으로 돌아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이미 시엔은 이안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만약 이안이 깨어난다면, 그의 앞에서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여동생의 상단이 망했다는 소식이라도 듣는다면?
시엔에게는, 유일한 존재였다. 진심으로 그녀를 대해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내가 그녀에게 지독한 원망의 시선을 보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 단편적인 상상만으로도 몸이 벌벌 떨렸다.
막아야만 했다.
그 첫 번째 걸음이 루페시아 영애의 만남이었다.
아직 이안의 여동생이 운영하는 상단을 되살릴 방도는 찾지 못했지만, 최소한 그 이전에 그녀가 뿌린 씨앗은 스스로 거두어야 했다.
루페시아 영애는 이미 이안과 뿌리깊은 원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과거에는 이안을 향한 두려움에도 제대로 행동하지 못했지만, 최근 급격한 안정세를 보인 루페시아 영애가 무슨 마음을 먹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시엔은 다소 비굴할 정도로 간청을 하더라도, 혹은 협박을 동원해서라도 루페시아 영애의 뜻을 굽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염치 없는 짓이었다.
알고 있었다. 이를 두고 사교계에서 나쁜 소문이 퍼지더라도 시엔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시엔은 그 이상으로 간절했다.
이안은 그녀에게 있어 오직 하나뿐인 ‘진짜’였다.
그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또 다시 그만이 베풀 수 있는 진심을 느끼고 싶었다.
‘용의 눈’을 가지고, 온갖 인간의 밑바닥을 보아야 했던 시엔에게 있어 그것은 탁류 속의 청류와도 같았다. 무너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자 갈증 끝에 찾은 샘물이었다.
시엔은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은 겁도 많은데다 눈물도 많은 그녀였다. 당장이라도 흐릿하게 차오른 제 눈가의 습기를 훔쳐내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결심을 다진 그녀의 입이 결의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루페시아 영애? 징계위원회 말입니다만…….”
“철회했어요.”
단 한 마디, 온갖 각오 끝에 열린 시엔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루페시아 영애의 그 짤막한 말이면 충분했다.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황녀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러나 루페시아 영애는 그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은 채, 나지막이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무언가, 바보 같아져서… 솔직히 말해 저도 귀족답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고요. 엠마 양이랑 이야기하면서 깨달았어요.”
거짓말, 고작 그까짓 이유로 취소할 리가 없다.
살아온 인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20년 이상을 고위 귀족으로서 평민을 깔보며 살아온 루페시아 영애였다.
그런데 단 며칠만에 평민과 친해졌다는 이유 하나로, 자존심을 접고 징계위원회를 개최하겠다는 결심을 거두어?
심지어 이는 제국 황실과 끈을 둘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
다시 말해, 무언가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뜻이었다.
시엔의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부끄러움, 설레임, 그리고 미안함과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심리만으로는 모든 것을 추론할 수 없었다. 단지 지금 이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러한 감정이 느껴진다는 사실 자체가 시엔은 조금 불쾌했다.
네까짓 게 뭐라고?
당신은, 나처럼 온갖 욕설과 비난을 감수하며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이라도 했나. 그런데 어째서 그토록 멋대로 망설이고 갈팡질팡하며 잘난 듯이 이안을 용서한다는 듯 말한단 말인가.
무릎 꿇고 빌어야 하잖아.
나처럼, 용서 받지 못할지언정 머리라도 처박고 엉엉 울어야 하잖아.
그 말이 목젖까지 치솟았다. 시엔이 무심코 그 분노의 잔향이라도 흘리려던 찰나.
“……황녀 전하.”
한숨과 내뱉어진 루페시아 영애의 말에, 황녀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시엔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들어찼다.
나무라야 할 말이 있는 쪽은 시엔이었는데, 정작 루페시아 영애의 눈빛은 철이 덜 든 여동생을 바라보는 듯했다.
루페시아 영애의 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열렸다.
“물론, 이안 경이 괘씸할 수도 있어요. 방법론을 지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는 아카데미의 영웅이고… 또 이유 없이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 그리고 많은 사람을 구하기도 했고요…….”
‘이안 경’이라니, 언제부터 그토록 존중 넘치는 호칭으로 그를 불렀단 말인가.
그 호칭은 시엔이 먼저 썼다. 토굴에서부터, 그 진실을 안 순간부터 그녀는 영원히 사내를 존중하고 존대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그토록 간단히 쓰고, 간단히 내게 조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러한 분노들조차 이내 사그라졌다.
“……그러니까, 이안 경을 그만 괴롭혀 주세요. 내려다보는 자는 아량 또한 넓어야 하는 법이잖습니까.”
그 진심이 담긴 조언이 시엔의 가슴 깊숙한 곳에 틀어박혔던 탓이었다.
아니었다.
시엔은 징계위원회의 징계 의견을 철회해 달라는 부탁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루페시아 영애는 그 목적을 정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도리어 징계위원회의 개최를 확실시 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라고 생각해도 답은 뻔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으니까.
시엔은 끝까지 쓰레기에 나쁜 년이어야만 했다.
자존심을 지키느라 급급해서, 진실을 외면하고 지금까지도 이안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철부지여야만 했다.
반박할 수 있는 말은 많았다.
수도 없이 많은 문장들이 뇌리를 부유했다. 단지 그중 하나만, 단 하나만 꺼내서 쏘아붙일 수만 있다면 루페시아 영애는 고개를 숙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리고 또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죄였다.
이조차도 이안이 겪어야 했던 고통에 비하자면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 또한 감내해야만 했다.
그 처량한 결론이 황녀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시엔의 파르르 떨리던 입가가 곧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애처롭고 구슬픈 목소리로,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명심할게요, 루페시아 영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시엔에게 있어 유일한 ‘진짜’이자 이해자는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그 사내만을 떠올리며, 시엔은 굴욕과 아픔을 몇 번이고 삼켜냈다.
오늘따라 눈을 감은 사내가 보고 싶었다.
그가 토굴에서 마지막으로 해주었던 한 마디가, 절절이 듣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서 소녀는 서서히 걸음을 신전 쪽으로 옮겼다.
마치 홀린 듯이.
그곳에 유일한 위안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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