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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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엔이 이안의 병실을 찾아오는 빈도는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물론 그것이 죄는 아니었다.
시엔은 어찌됐든 사건의 당사자였다. 이안에게 사죄하고 싶은 마음에 그를 챙기고자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녀는 이안을 찾아올 때마다 빛을 피하는 죄인처럼 저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고 말았다.
자타공인 이안과 가장 절친한 사이인 레토나 셀린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 중에서도 실세로 통하는 델핀이나 엘시조차 병문안을 오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권력을 이용해서 이안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 영 낯뜨겁고 겸연쩍었던 탓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신전 앞에서 멍하니 이안을 기다렸다.
셀린이 담벼락에 기대 주저앉아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으면, 레토는 한숨을 내쉬며 그 뒤통수를 후려갈기곤 했다. 그러면 셀린은 어김없이 화를 냈고, 그러든 말든 세리아는 그 옆에서 음영이 사라진 눈동자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엠마는 몇 번이고 신전을 오고가며 음식이나 물약을 넣어주려고 애썼다. 그마저도 이안의 부상 원인 중 하나가 약물 과다복용이라는 사실을 전해듣고는, 충격을 받았는지 비틀비틀 되돌아갔긴 했지만 말이다.
델핀은 아무 말도 없이 종종 들러 대략적인 상황을 사제들에게 보고받고 돌아갔다. 가장 침착한 반응이었으나, 도리어 그 탓에 이안을 치료하는 사제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엘시에 이르러서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충견처럼 신전의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때때로 남동생 루핀이 엘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식사를 하는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시간이었다. 그 잠깐을 제외하고는, 엘시는 늘 신전의 앞에 있었다.
심지어 이안을 기다리는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이안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들려 이안의 안부를 물어왔다.
그러한 이들을 뒤로 하고, 황녀만이 이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특권이었다.
그래서 시엔은 신전 앞에만 도달하면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들과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서였다.
그녀에게는 아직 그들의 감정을 직시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들이 무슨 감정을 품었을지는 예상이 갔다. 다만 이를 마주한 뒤에는 지금과 같이 이안을 찾아올 염치조차 남아나지 않을 터였다.
아주 조금만이라도 시엔은 이안과 단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정작 그 상대는 혼수상태에, 시엔은 멍하니 그 잠든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의 반복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늘의 황녀는 오랜만에 조금쯤 들뜬 마음으로 병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황실에서 신물의 반출 허가를 얻어낸 날이었다.
‘용혈 문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황실 측은 느닷없이 연락을 뚝 끊어버렸지만, 황녀의 간청이 이어지자 그들은 제물로 쓸 만한 신물을 내주었다.
황녀는 가까스로 신물을 받아내면서도 불편한 심기를 숨길 수 없었다. 어차피 용혈 문자의 소유자라면 제국 황실의 비고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신분이나 다름없었다.
신물 하나쯤 꺼내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면서 괜히 튕긴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단 신물을 받아든 시엔의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아졌다.
비록 황실이 가진 비보 중에서는 급이 낮은 편에 속했지만, 천만금을 주더라도 얻을 수 없는 보배였다.
신물이란 신이 지상에 몸소 강림했을 때 그 신력을 받아들인 성물들이었다. 당연히 그 가치는 막대했으며, 사제들이 제물로 사용했을 때 그 가치는 몇 배로 뛰었다.
아무리 이안의 부상이 극심하더라도 이 신물이 있다면 두 번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이는 치료에 최고위 사제를 동반했을 때의 이야기이긴 했으나, 아카데미에는 성녀가 있었으니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성녀마저 신물을 받아들이자마자 화색이 돌며 반겼을 정도였다.
소문에 따르면 최근 성녀는 한동안 미소를 짓는 법이 없었다는데, 그러한 그녀가 해맑은 미소를 지은 걸 보면 신물의 가치는 확실하다고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성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소 들뜬 나머지, 시엔이 오랜만에 이안을 향한 감정을 듬뿍 표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치료실, 온도는 괜찮나요?”
“네, 늘 최적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소의 오차는 있겠으나…….”
“그러면 습도는요? 통풍도 잘 되고 있나요?”
처음에는 웃으며 황녀의 말을 받아들이던 성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사실 그동안 성녀는 많이 참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이안이 이토록 극심한 부상을 입은 주된 원인은 황녀였다.
비록 이안이 위험을 자초한 면이 있긴 했으나, 차마 사랑하는 사내를 탓할 수 없던 성녀의 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녀뿐이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꾹꾹 참았다.
황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죄인은 암흑교단으로, 그녀는 단지 이안에게 목숨을 구원받았을 뿐이었다.
심적으로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비난을 가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시엔은 그 위대한 제국 황실의 일원이었다. 아무리 성국의 최고위직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성녀의 인내심은 늘 한계를 시험받고 있었다.
죄 짓고 잘못한 이는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이미는 이는 도무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하물며 시엔은 허구연날 병문안을 와서 애틋한 표정으로 이안을 내려다보기까지 했다.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내가 매력적인 여인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을 방치할 만큼, 성녀는 아량이 넓지 못했다.
심지어 시엔은 한눈을 팔 때마다 처량한 눈빛으로 이안의 곁에서 눈물까지 흘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성녀는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노호성을 가까스로 삼켜야만 했다.
당신 때문이잖아.
당신을 구하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어. 이기심도 아니라 오로지 당신을 구하고 싶다는 그 선량한 마음씨 때문에!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애로우며 박애주의자인 성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짝사랑하는 사내를 잃을 뻔한, 표독스러운 여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맞장구를 쳐주었더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빠직, 하고 성녀의 이마에서 혈관이 파열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에도 이미 딴 데 정신이 팔린 황녀는, 눈치 없이 이안을 향한 걱정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난번부터 생각했는데 치료실의 향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조금 더 고급스러운 향유를… 아니지, 제가 황실에서 직접 고품질의 향유를 받아올 테니까…….”
“……꼴값을 떨어요.”
잘근잘근 씹어뱉어진 그 한 마디에, 황녀의 몸이 흠칫 굳었다.
곧 그녀의 부릅떠진 눈이 점차 성녀를 향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당혹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성국의 성녀가, 제국의 황녀에게?
물론 지위 자체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엇비슷하기 때문에 도리어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있는 법이었다.
특히 외국의 귀빈을 대할 때는 더더욱 그랬다.
의전서열이 비슷하다고 해서, 상대를 막 대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때가 있다면 오직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상대가 철천지원수거나, 혹은 이성이 날아갈 만큼 화가 났거나.
성녀는 그중 후자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 매혹적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침착하기 그지없어서, 시엔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무슨 낯짝으로 그딴 소리를 해요? 지금 누구 때문에 이안이 입원했는지 몰라요? 무능한 당신이랑, 무능한 당신 부하들 구하다가 이렇게 됐잖아…그런데 뭐? 이안 경이 어쩌고저쩌고?”
“아, 으, 그… 서, 성녀님? 그, 그러니까…….”
사실 천성적으로 겁과 눈물이 많은 시엔은 성녀의 분노에 일일이 대응하지 못했다.
그동안은 황족이라는 권위와 허세로 어떻게든 찍어눌러오긴 했으나,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동등한 지위에 있는 인간에게 갈굼을 당하는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녀는 시엔이 쩔쩔 매든 말든, 그동안 참고 참았던 감정을 토해낼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왼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기기까지 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품고 있었다.
“황녀 전하, 우리꼴값 떨지 말아요… 이안 앞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인 양 굴지 말자고요. 알겠어요? 당신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이안을 괴롭히고 그 가족까지 위협했던 악당이니까.”
어느덧 말문이 막힌 시엔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도리어 그 눈망울에는 옅은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동안 숨겨왔던 울보 기질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눈에는 일말의 의심과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녀가 그녀에게 이럴 리가 없다는, 얄팍한 상식과 믿음에 근거한 의혹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성녀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긴 채 너무나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왜요, 진실만 말하는 성녀 처음 봐요?”
황녀가 가진 한 톨의 의심마저 지워버리는 한 마디였다.
시엔은 히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 담기는 그 절절한 증오와 적의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황녀는 성녀가 무서웠다.
무척이나.
그러나 이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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