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59)
* * *
성녀의 도발에 시엔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낱말이 부유하며 언어가 맥락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성녀의 지적은 시엔도 내심 동의하는 바이기도 했다. 아무리 이안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더라도 시엔은 염치를 알았다.
그래서 신전 앞에 도착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는가.
그녀에게는 이안을 독점한 권리가 없었다. 아니, 권리는커녕 자격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안을 다치게 만든 원인이 바로 황녀였으니까.
이를 다시금 절감한 황녀의 연회색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제멋대로 타인의 감정을 황녀의 뇌리 속에 우겨넣고 있었다.
달구어진 쇠꼬챙이가 시신경을 관통하는 감각이었다.
이만큼 맹렬한 적의와 증오를 느껴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시엔은 그 분노의 근원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숨이 턱턱 막혀, 헐떡이는 호흡을 가까스로 내뱉었을 뿐.
사랑하는 사내를 잃을 뻔한 여인의 분노는, 그토록 무섭고 강렬했다.
그 타오르는 연분홍색 눈동자는 차라리 선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명료한 색채를 띠었다. 성녀의 입술이 또 다시 씹어뱉듯 감정을 토해냈다.
“솔직히 말해, 자꾸 찾아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당연히 고맙고 미안하기야 하겠죠. 그런데 말이에요, 바깥에 당신 말고도 이안에게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잖아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내뱉은 말치고는 날카롭게 곤두선 음색이었다. 겁 많은 시엔은 또 다시 더듬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눈물이 핑 돌며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참아냈다.
잘못한 건 시엔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변명하든 용서를 빌든 해야 했다.
강박관념이라고 불러도 좋을 척수반사적인 판단이었다.
“그, 아, 그, 그게… 그러니까, 오, 오해가 조금…….”
“……오해?”
픽, 하고 웃으며 성녀는 그제야 제 앞머리를 넘기고 있던 손을 툭 떨구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사르르 내려앉으며 비현실적인 미모를 뽐냈다. 그야말로 천상의 미(美), 탄성이 절로 나올 광경이었지만 시엔은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제지할 수가 없었다.
성녀의 입은 웃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절묘한 대비가 시엔의 목을 더욱 옥죄었다.
너울지는 감정의 파도가 둔중한 흐름을 보이는 액체처럼 시엔을 질식시켜 갔다.
“오해, 오해, 오해라… 좋네요, 훌륭해요.”
한 걸음, 성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시엔은 히끅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슬이 고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이성의 끈이 끊어진 성녀에게는 일말의 자비심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안으로 모자라 가족들까지 건드려도, ‘오해’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리고 이제 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양, 지극정성 이안을 돌보면서 연인 흉내도 좀 내보고?”
시엔은 성녀의 싸늘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그 탓에 고여 있던 눈물이 살짝 흘러내렸지만, 이를 신경 쓸 정신은 남아있지 않았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안 경의 연인이라니, 감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 언감생심 그러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시엔은 다급하게 급조한 변명을 이어 붙였다.
“그, 그런……! 어, 어떻게 감히 제가 그럴 수 있겠…….”
“그런데 눈빛이 왜 그래요?”
말문이 턱, 하고 막혀들어 시엔은 멍하니 성녀를 바라보았다.
내 눈빛이 어떻다고?
그러자 성녀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짜증난다는 티를 팍팍 냈다. 그녀의 손이 이마를 짚었다.
“당신 말이에요, 멋진 기사님한테 반했다는 얼굴로 매일 이안만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누가 봐도 암컷의 얼굴을 하고선.”
“……아, 아, 암컷?!”
짧은 인생 동안 처음 들어보는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시엔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고, 이내 그 가녀린 두 손이 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그러든 말든 성녀는 제 옆머리를 검지로 배배 꼬며 시큰둥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네, 암컷… 그야 황녀님께서도 그럴 만한 나이시니 이해는 합니다만.”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엔은 그렇게 소리를 질렀으나, 성녀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깔끔한 무시로 일관했다.
대신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말아올렸다.
“이안은 안 돼요, 알잖아요?”
다시 한 번 냉각되는 분위기에 시엔은 다시 주춤주춤 기세를 가라앉혔다. 흘깃흘깃 눈치를 살피는 그 연회색 눈망울에는 아직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느덧 또 한 걸음, 성녀와 황녀의 사이는 이제 지척이었다.
성녀가 속삭이는 소리가 황녀의 고막을 적실 정도는 되는 거리였다.
“……당신은 공주가 아니라, 나쁜 용이니까.”
시엔의 떨리던 가슴을 단숨에 얼어붙이는 한 마디였다.
그 말을 끝으로 성녀는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며 시엔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고도 잠시 동안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엔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시선을 이안에게로 돌렸다.
시엔을 바라볼 때와는 정반대의 눈빛이었다.
애정과 걱정, 안쓰러움이 휘몰아치는 그 연분홍빛 눈동자를 보고 황녀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저 눈빛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암컷의 눈’이라는 건.
시엔은 저러한 눈빛을 하고 이안을 바라볼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아무런 불만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을 하니 가슴이 꾸욱 하고 조여와 황녀는 제 가슴 위에 주먹을 얹었다.
아프고 괴로웠다.
성녀의 입이 축객령을 토해낸 것은 그때였다.
“나가세요.”
그렇게 말하는 성녀의 눈은 황녀를 향하지조차 않았다. 단지 멈춘 시간 속을 유영하듯 애절하게 이안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단호한 어조에 시엔은 무언가 불안해졌다.
“저… 그, 그래도 잠깐만이라도…….”
“나가요.”
결국 시엔은 풀이 죽어 주춤주춤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때 시엔의 귓전을 파고드는 성녀의 목소리가 더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솔직히 말해서, 방해돼요.”
그 나지막한 경고를 전해들은 시엔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뒤를 돌아보는 그녀는 다급한 기색이었다. 간절해 보이는 목소리로, 그녀는 울먹이며 반항했다. 시엔치고는 커다란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바깥에는 이제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의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시엔은 상처를 받았고 어린 시절의 흉터는 깊어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다.
시엔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진짜’를 찾아냈으니까, 이안만 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고 심장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와도 그녀는 웃었다.
그런데 이제는 시엔에게 마지막 남은 ‘진짜’마저 빼앗아가려고 한다.
소리 높여 따지고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이나 시엔이 느끼는 공포는 섬뜩했다. 정신이 내지르는 단말마와 같은 분노가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이안마저 없다면, 그녀는 무너지고 만다.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생존본능이었다. 시엔은 그렇게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안을 내려다보는 성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호흡이 정지했다.
이안을 내려다보는 성녀의 눈동자에는, 흐릿한 물기가 비치고 있었다. 시엔은 단 한 번도 성녀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강인하고 자애로운 여인이었다.
성녀가 내뱉었던 말들이 그제야 하나하나 비수처럼 가슴 속에 내리꽂혔다.
자격조차 없다고, 그래.
내게는 그럴 자격조차 없구나.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그럼에도 차마 이안을 포기할 수 없었던 시엔은 울먹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반항의 말이란, 희미한 울음소리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울먹이는 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세상은 시엔의 유모가 아니었다. 운다고 해결되는 문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녀는 그 사실을 다시금 깨달으며, 힘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저벅거리며 걷는 그 발걸음에는 암울한 절망만이 느껴질 뿐있었다.
그렇게 시엔이 떠난 후, 성녀는 무너지듯 침대에 기댔다.
그녀의 손이 이마 위에 얹어졌다. 그 입술 사이로 달구어진 숨과 함께 후회가 흘러내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첫사랑은 여인을 미치게 만든다.
그 진리에 예외는 없었다.
**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우중충한 빛으로 물들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이 음울한 풍광에 배경음을 더했다. 먹구름에 가린 햇빛은 얼마 투과되지도 못한 채, 낮과 밤의 경계를 흐려놓았다.
신전을 나서는 시엔의 연회색 눈동자에 우울한 그늘이 드리웠다.
날씨는 인간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이미 울적하기 그지없었던 소녀의 기분을 나락까지 처박을 만은 했다.
시엔은 시종이 미리 챙겨두었던 고급스러운 우산을 펼쳤다. 금실이 수놓아진 남색의 우산은 얼핏 보기에도 고귀한 이들만 쓸 것 같은 생김새였다.
물론 시엔은 그 우산을 펼치면서도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일상적으로 누려온 권리였기 때문이었다.
황족으로서 들숨과 날숨처럼 수많은 특혜를 받아온 그녀였다. 이제 와서 우산 하나 가지고 호들갑을 떨 까닭은 없었다.
그렇게 시엔은 아무런 생각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빗물에 잠긴 계단이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물자국을 튀겼고,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신전의 앞은 인기척이 드물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처럼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황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눈가에 차오른 물기를 닦아냈다.
소녀와 소녀가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물에 젖은 고깔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우산조차 없이 선 여인이었다.
물기를 이겨내지 못한 고깔모자는 이미 푹 꺾여 있었고, 자그마한 체구를 감싼 옷가지에서는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인형과도 같이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소녀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어우러지는 푸른 눈동자는, 우두커니 땅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낯빛만으로도 우울한 심상이 전해질 정도였다.
시엔은 소녀를 마주하자마자 잠시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정체는 능히 짐작이 갔다. 라이넬라 가문이 배출한 수재 중 하나, 아카데미의 4학년 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인물이었으니까.
엘시 라이넬라.
전해 듣기로는 이안과 각별한 사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소문을 증명하듯이, 엘시는 이안이 입원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신전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는 지금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시엔은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잰걸음질을 쳤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는 엘시의 감정이 낱낱이 비치고 있었다. 일렁이는 절망과 우울감에 시엔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탓이냐고 물으면 마땅한 대답을 내놓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시엔은 애써 엘시를 무시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를 스쳐지나가며, 그녀의 귓전을 울리는 자그마한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터였다.
“……좋으시겠어?”
우뚝, 하고 시엔의 걸음걸이가 다시금 멎었다.
그녀는 조금 놀란 기색으로 서서히 시선을 옮겼다. 그 측면에는, 빗방울이 전하는 한기만큼이나 싸늘한 눈빛으로 시엔을 노려보는 엘시가 자리하고 있었다.
“좋으시겠다고, 멋대로 민폐 끼치고… 멋대로 구해져서, 이제는 멋대로 병문안까지 가니까.”
그 선연한 적의에, 시엔은 입술을 뗐다 다물었다.
성국의 성녀라면 시엔과 비슷한 서열이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넬라 가문은 제국 귀족의 일원으로, 설마 황족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엔을 응시하는 그 짙푸른 눈동자.
이를 악문 채, 주먹을 쥔 손을 파르르 떠는 소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시엔은 다시 한 번 울상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신전에서도, 신전을 나서도, 그 어디를 가도.
온통 그녀의 적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