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0)
* * *
엘시가 쏘아붙인 말에 시엔은 마땅히 돌려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시선을 한 번 피했다가, 입술을 짓씹다가, 망설이는 눈빛으로 엘시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엘시는 묵묵히 시엔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단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았지만 시엔은 알았다. 그 서늘한 시선은 백 마디의 말로도 묘사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시엔은 또 다시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흐으, 하고 다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목에서 새어나왔다.
맹렬한 적의가 희끄무레한 물안개 사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 자극적인 색채에 시엔은 당장이라도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치더라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카데미의 어디를 가더라도, 온통 그녀를 미워하는 사람들뿐.
비단 엘시뿐만이 아니라 아카데미의 모두가 그랬다. 그렇다면 차라리 속죄를 해야겠다고, 시엔은 가까스로 마음을 먹고 고개를 숙였다.
“라이넬라 양… 아, 아니 엘시 선배.”
상대를 성으로 부르는 것은 귀족 간의 예법이었다. 그래서야 황녀가 신분을 가지고 위협하는 모양새가 되므로, 시엔은 다급히 ‘선배’로 호칭을 정정했다.
후배가 선배에게 사죄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죄송해요, 제가 먼저 사죄의 말씀을 올렸어야 했는데… 그동안 그, 이안 선배한테 워낙 많은 잘못을 저질러서…….”
“……하, 알면 됐어.”
엘시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렇게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더는 대화하기도 싫다는 태도였다. 그 탓에 시엔은 우물쭈물하면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어야 했다.
사죄를 하고 싶었고, 용서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보답 받을 가능성은 크지 않을 터였다.
그 점이 유독 슬퍼서, 시엔은 풀이 죽은 기색으로 힐끔힐끔 엘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든 말든 엘시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엔이 꼴도 보기 싫다는, 노골적인 거부 의사의 표명이었다.
그럼에도 한참이나 시엔이 곁을 떠나지 않자, 이를 보다못한 엘시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해? 당장 꺼지지 않고… 눈치 밥 말아먹었어?”
날 것에 가까운 폭언이었다.
시엔은 더욱 움츠러들고 말았다. 워낙 겁이 많은 그녀인지라, 처음으로 겪는 상황이 무섭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선배인데, 어떻게 이토록 사나운 말씨를 쓰는 걸까.
쿵쾅거리는 심장이 당장 도망치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엔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도망치기만 해서는 영원히 미움을 받을 뿐이었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시엔의 정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앞으로도 이안의 곁을 찾아올 때마다 이처럼 사나운 적의를 감내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시엔은 떨리는 음색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애써 밝은 기색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마침 희소식을 하나 들고 온 차였다.
이 소식이 제발 엘시의 화를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리길 바라면서, 시엔은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죄송하다는 말씀을… 그, 그리고 다행히! 황실 측에서 신물을 지원해 주기로 했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이안 경께서도 회복을 하실 수 있다는 소식도…….”
그러나 그 헛된 희망은 곧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이 씨발년이 진짜.”
파지직, 하고 새파란 전하가 허공에 튀었다.
시엔은 엘시의 낯선 반응에 깜짝 놀라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심지어 제국 귀족에게 이토록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전조조차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주위의 마력이 정렬하고 있었다.
엘시가 마음만 먹는다면, 떨어지는 빗줄기를 타고 사방팔방으로 전하가 퍼져 나갈 터였다. 영창부터 마력의 응집까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카데미 최고학년 중에서도 손꼽히는 전투마법사다운 솜씨였다.
마력의 양이나 재능 자체는 시엔이 더 출중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시엔과 엘시가 맞붙는다면, 그 승패가 어떻게 날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궁지에 몰린 시엔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섭고 서러웠다.
황녀는 고귀한 용의 피를 이은 제국 황족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취급을 지금껏 받아본 적이 있을 턱이 없었다.
엘시조차도 본래라면 감히 시엔을 위협할 생각은 품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엘시는 이성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이안의 쓰러진 이후, 엘시는 극심한 정신적 피로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넘치기 직전의 용광로에 시엔이 돌덩이를 하나 던져넣은 것이다.
엘시는 더는 참지 않았다. 인상을 팍 구긴 채,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야, 넌 내가 만만하냐?”
“어, 그… 아, 아니요…….”
머뭇거리던 시엔은 결국 말끝을 흐리는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내가 만만하냐니?
시엔은 여태껏 그러한 발언을 하는 위치에 있었지, 듣는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비슷한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흘깃 엘시의 눈치를 살피는 시엔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대로 두면 훌쩍이며 울음이라도 터트릴 기세였다.
그 모습이 엘시의 포악성을 더욱 자극했다.
지금껏 이안 때문에 억눌러두었던 내면의 폭력성이 다시금 일깨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뭘 잘났다고 떠들어? 네가 지랄해 놓은 거, 네가 수습한 것뿐이잖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잖아… 응?”
앙다물어진 잇새로 흘러나오는 절절한 음색에 시엔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손히 모아진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점점 달아오르던 엘시의 목소리는 절정에 이르러 노성을 터트렸다.
“정작 네가 주인님한테 지랄하고, 인간관계 갈가리 찢어놓은 건 어쩌려고?!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리고 들었는데 너, 가족까지 건드렸다며.”
분노로 가득 찬 고함 소리에 시엔은 움찔, 하고 몸을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는 어느새 흐릿한 물기가 어려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엘시는 그 점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이었다.
눈물 한두 방울 정도가 눈에 띌 리는 없었다. 이미 빗물에 푹 젖어버린 엘시도, 이미 몇 방울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엔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어떻게든 눈물을 참아냈다.
그에 정신이 팔려 ‘주인님’이라는 호칭조차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을 정도였다. 다만 맥락으로 볼 때, 이안을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생각만 얼핏 스쳤을 뿐.
엘시의 폭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 낯짝 한 번 두껍다… 그리고 무서워, 어떻게 가족까지 건드릴 생각을 다하지? 응? 나도 말이야, 성깔 더럽고 인생 좆같이 살아온 걸로 유명한데… 그래도 가족까지는 건들지 않았어.”
“……제, 제가 어떻게든.”
더는 엘시의 분노를 견딜 수 없었던 시엔은, 헐떡이면서 그렇게 다급히 말을 붙였다.
엘시의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그러나 그 타오르는 청색의 눈동자는 여전해서,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였다간 얼마든지 물어뜯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 느껴졌다.
시엔의 연회색 눈동자는 그 감정의 파도를 멋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분노라는 감정 위의 난파선이라도 된 듯이, 그녀는 허겁지겁 변명을 주워섬겼다.
“제가 어떻게든, 해결해 볼게요… 이안 선배의 가족 문제는…….”
“좆까고 있네.”
그리고 팍, 하고 내던져진 전하의 구체가 시엔의 바로 옆에서 폭발했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전하가 사방으로 튀기자 시엔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시엔이 감전되는 일은 없었다.
엘시에게 아직 최저한의 이성이 남아있던 덕이었다.
급히 옆으로 물러서느라 시엔의 옷자락이 살짝 젖어들었다. 시엔은 떨리는 눈빛으로 엘시를 바라보았다.
“야, 칼로 찔러놓고 약 발라주면 없는 일이 되냐? 그동안 아프고 힘들었던 건 어떻게 되는데? 그리고 흉터는? 너,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나, 나한테 폐라도 끼칠까 봐 주인님은…….”
욱해서 소리를 내지르던 엘시는, 감정이 복받쳤는지 이내 훌쩍이며 제 눈가를 닦아냈다. 이미 빗물로 젖어 눈물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그랬다.
빗소리가 먹먹하게 시엔과 엘시 사이를 파고들었다.
엘시는 다시 처량한 눈빛을 하고 돌아섰다. 다시 이안이 있는 신전 방향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힘없는 경고를 내뱉었다.
“……꺼져, 그리고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 다음에는, 황녀고 나발이고 없으니까.”
황족 능멸에 준하는 수위 높은 발언이었지만, 정작 넋이 나간 시엔은 이를 트집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엘시가 내뱉은 유리 조각 같은 말들을 속으로 주워담았다.
그렇구나, 이미 칼로 찔렀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구나.
돌이킬 수 없다. 수습할 수도 없고, 단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용서를 비는 일뿐.
그런데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그 모습조차 가증스럽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걸까?
‘뻔뻔하다’라는 그 말이 송곳처럼 시엔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고민했다면 시엔은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시엔의 오해는 지당했다. 심지어는 일부러 그렇게 오해하도록 이안이 유도한 면모까지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 연달아 비난이 내리꽂히자, 시엔은 도무지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미트람이 조롱했고, 이내 한때 그녀의 편이었던 아카데미의 구성원들이 희생양으로 시엔을 매달았으며, 이안과 막역한 사이인 성녀와 엘시마저 그녀를 비난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죄처럼 느껴졌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안의 고결한 의도를 멋대로 오해하고 가족까지 건드린 최악의 악녀가 바로 그녀라고.
그럼에도 이안을 향한 집착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서, 시엔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일생 동안 찾아다니던 유일한 ‘진짜’였다. 드디어 발견했고, 이안이 없으면 다시 외롭고 고통스러운 과거로 회귀할 뿐이었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하지만 뻔뻔스럽게 이안의 곁에 붙어다니기엔, 그녀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시엔의 엄지가 자연스레 입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 찰나, 벼락이 내리치며 황녀는 화들짝 정신을 되찾았다.
번쩍, 하고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더니 이내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야 황녀는 자신과 엘시의 몰골을 비교할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우산을 쓴 채로, 망토 끝자락이 젖어 울상을 짓고 있는 시엔.
그리고 이미 젖을 대로 젖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는 엘시.
물론 시엔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왠지 미안해진 시엔은, 우물쭈물거리다 이내 우산을 들고 엘시에게 다가섰다.
우산이라도 넘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엘시는 그 호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필요없어.”
지금까지와 같은 싸늘한 목소리, 시엔은 결국 또 다시 주춤거리고 말았다.
살기 어린 새파란 눈동자가 시엔을 쏘아보고 있었다. 엘시는 다시 한 번 몸을 돌리더니, 비틀비틀 걸어 시엔에게 다가섰다.
“내게, 내게 필요한 건…….”
오직 하나뿐인데, 네가.
웅웅거리며 울리는 중얼거림에 시엔은 차마 엘시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꽈악, 하고 엘시의 손이 시엔의 멱살을 쥐었다. 신장 차이가 있긴 했지만 엘시는 숙련된 마법사였다.
검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신체 능력 자체는 일반인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켁, 켁, 하고 시엔은 숨이 점차 막혀와 제 손을 목으로 가져다댔다. 엘시의 손이 천천히 시엔을 들여올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푹 숙여졌던 엘시의 고개가 다시 치켜들어졌다.
그 눈동자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에 젖어 있어서.
시엔은 울상을 지은 채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스산한 목소리가 시엔의 귓가를 파고들 때까지도.
“네가, 가져갔……!”
“……그만.”
그러나 엘시를 제지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진홍빛 눈동자는 피에 젖은 듯 나른해 보였다. 새하얀 피부와 갸름한 턱선, 북방계 미녀의 조건을 두루 갖춘 그녀는 얼마쯤 거리를 둔 채 그 자리에 섰다.
“그만해, 라이넬라… 너 미쳤어?”
델핀 유르디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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