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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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핀의 등장에 잠시 싸늘한 적막이 감돌았다.
그러든 말든 델핀의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다만그녀는 흐응, 하는 묘한 소리를 내며 시엔과 엘시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특이하게도 델핀의 손에는 우산이 쥐어져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빗물에 젖은 기색은 전무했는데, 빗방울이 그 몸에 닿자마자 곧바로 기화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러의 응용이었다.
고열을 방출하는 오러의 특성을 전신에 둘러, 빗방울이 닿기도 전에 증발시켜 버리는 기예였다. 그 증거로 치지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델핀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리한 회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눈에 띄었다.
음울한 낯빛을 한 그 소녀는, 시엔을 바라볼 때만 유독 서늘한 눈빛을 품었다. 그 얼음공예품을 닮은 표정이야말로 그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세리아 유르디나, 델핀의 이복동생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서녀였다. 또한 2학년 검술학부 수석의 자리를 차지한 천재이기도 했다.
낯익은 얼굴이 무려 둘이나 등장했다. 그리고 그 둘은 하나같이 엘시를 만류하고자 하는 기색이라, 엘시는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망설임은 길지 못했다.
엘시는 잠시 동안 팔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시엔의 멱살을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툭, 하고 조금쯤 땅 위로 떠올라 있던 시엔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황녀는 켁켁, 하고 몇 번 더 잔기침을 하고는 의아한 눈빛으로 델핀을 바라보았다.
왜 그녀를 구해준 걸까?
이안 경을 멋대로 오해하고 괴롭힌 모두의 적이 시엔 아니던가. 혹시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라 시엔의 편을 들어주는 걸까?
물론, 그 기대는 곧바로 깨져 나가고 말았다.
시엔이 지닌 ‘용의 눈’은 사람의 진심을 비춘다. 그 앞에 가식과 거짓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마스터에 이른 규격 외의 강자들을 제외하면, 이를 피해갈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아카데미의 최강자 중 하나인 델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직 시엔의 눈에 흐릿하게나마 심리가 읽히는 인물에 속했다.
그리고 델핀의 핏빛 눈동자에서 읽히는 감정이란, 시엔의 소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희미한 적의와 불쾌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델핀 정도의 실력자에게 이만한 감정이 엿보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만큼이나 시엔을 싫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황녀의 편은 아니었다.
시엔은 결국 짤막한 기대를 접고, 서글픈 미소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황녀 전하,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라이넬라가 최근 비 맞은 개처럼 꿉꿉하게 구는지라…….”
“주, 주인님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몸은 매일 씻었거든?! 꾸, 꿉꿉하긴 뭐가 꿉꿉해! 향긋하니까 맡아봐! 얼른!”
“……보시다시피 무척 예민해진 상태입니다.”
그렇게 델핀과 엘시는 익숙하다는 듯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그 공방이 이어질수록 황녀는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사이에 스스로가 이물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황녀를 걱정하는 듯한 델핀의 말마저, 실은 인사치레에 불과하다는 점까지.
델핀은 침착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전하, 한동안은 이곳에 오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째서, 라고 물을 만큼 시엔은 눈치가 없지는 못했다.
다만 소녀는 음울한 낯빛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였다.
델핀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덧 그 음색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고 있었다.
물론, 전부 가식에 불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시엔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부디 조금 쉬시면서…….”
“알아요.”
시엔은 그 말을 툭, 하고 끊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슬쩍 핏빛 눈동자가 황녀를 향했다. 얼핏 보기에 그 눈동자는 주군을 걱정하는 충신의 눈으로 보였지만, 그 충심의 대상이 달랐다.
최소한 그 대상이 시엔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차라리 이러는 편이 더 익숙하기는 했다. 시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이제,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고마워요, 유르디나 경.”
델핀은 말없이 시엔의 낯빛을 살폈다. 유심히 소녀를 꿰뚫어보는 그 눈빛은, 마치 ‘용의 눈’이 없더라도 황녀의 심정을 낱낱이 파헤치는 듯했다.
혹여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시엔의 속마음을 읽었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델핀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소리는 한숨뿐이었다.
“……세리아.”
“네, 언니.”
회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곧장 앞으로 나섰다.
우산을 쓰지 않아 빗물에 흠뻑 젖은 채였지만, 그 보무는 당당했다. 애초에 주군이 쓰지도 않은 우산을 가신이 쓸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장본인이었다.
마치 폭우를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에 고풍스러운 우산을 쓴 시엔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녀를 응시하는 세리아의 푸른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어서, 시엔은 그만 풀이 죽어 또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황녀 전하를 모셔주겠니? 워낙 흉흉한 시기라 걱정이 되는구나.”
“너무 걱정 마세요, 언니.”
델핀과 세리아 사이에 오고가는 말소리는 담백했다. 오해의 여지조차도 없는 문답이었다.
그러나 시엔의 연회색 눈동자에는 그 숨은 의도가 뻔히 비쳤다.
델핀은 시엔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불쾌했고, 세리아는 그 이상으로 시엔이 싫었다. 그래서 지금 두 자매는 시엔을 치워버리기로 합의한 것이다.
불쾌하다는 기색을 내비쳐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엔은 그 결정에 불만을 내비칠 권리조차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세리아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세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짓느라 입꼬리가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전하, 이만 가실까요?”
“……잘 부탁드릴게요, 세리아 선배.”
세상은 온통 가식과 증오뿐이었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이안 페르쿠스를 제외하고서는.
시엔은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
그날 밤 시엔은 악몽을 꿨다.
시녀장이 제 목을 조르고, 허겁지겁 도망쳐 복도를 구르는 꿈이었다. 얼마간 달리다 보니 어느덧 시엔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뒤였다.
그 끝에는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목이 졸렸다. 켁켁거리며 애원해도 어머니는 핏발 선 눈으로 시엔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녀가 읊조렸다.
“모두가 널 미워해.”
아니라고, 목을 조르는 어머니의 팔을 툭툭 쳤지만 효과는 없었다.
시엔은 헐떡이며 눈을 뜬 것은 그때였다.
식은땀이 흥건했다. 소녀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시녀들이 간밤에 준비한 물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새벽녘의 한기가 파고들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느새 말간 햇빛이 커튼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그날따라 시엔은 층계를 내려가기가 무서웠다.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본능, 혹은 직감이라 해도 무방한 예감이었다. 전날 워낙 괴로운 말을 많이 들은 탓에 이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녀에, 엘시에, 델핀과 세리아의 속마음까지.
하나같이 송곳처럼 시엔의 심장을 파고드는 요소밖에 없었다. 시엔은 당시의 기억을 되새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층계를 내려가, 또 하루를 시작해도 괴로울 뿐이었다.
아무도 시엔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미워하고, 이안의 곁에 머무르는 이들은 시엔을 증오했다.
오직 한 사람, 시엔의 희망은 이안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내에게 용서 받지 못한다면?
조금 더 낙천적인 전망을 내놓자면, 그런다고 해서 시엔의 인생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지금껏 살아왔듯 다소 고독한 심정으로 하루를 헤매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면 또 다시 ‘진짜’를 찾을 수도 있겠지.
다만 지난 며칠간의 경험으로 인해 시엔은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안에게 용서 받지 못한다면?
그 이후는 차라리 죽음이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터무니없는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시엔은 그렇게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뿌리 깊게 자라온 인간에 대한 불신을 일소해 준 인물은 이안이 유일했으므로.
조금 떨리는 걸음걸이로, 시엔은 천천히 층계를 내려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로비는 한산했다. 시엔의 입에서 비로소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노골적인 안도의 기색이었다. 한동안 숨을 고르고 있던 황녀는, 문득 로비의 책상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제국 황실에서 온 편지였다. 그 봉인에 그려진 용을 닮은 문양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오직 황실만이 쓸 수 있는 상징이었다.
묘하게도, 그 편지봉투를 보자마자 시엔의 불안감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떠한 이성이나 합리를 초월한 감각이었다.
시엔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서서히 그 편지봉투를 집어들었다. 그곳에는 유려한 금빛 글씨로 발신인이 쓰여 있었다.
‘제국 재무부’
떨리는 손으로, 소녀는 거칠게 편지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러난 새하얀 편지지를 꺼내 다급히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기나긴 미사여구가 첨부된 말이었다.
하지만 그 핵심만큼은 짧고도 명료했다.
‘분부하신 대로, 상단의 파산을 확인했습니다.’
툭, 하고 시엔은 그 편지지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사라져 가는 현실 감각을 알리고 있었다.
아, 으, 아.
시엔은 제대로 된 언어를 내뱉지 못했다. 다만 한참이나 그렇게 더듬거리다가, 이내 푸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광소(??).
“푸흐, 흐흐… 아하하… 흐흣,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전망이 실현된 여인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데 그 눈가에는 눈물만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까스로 웃음을 그친 뒤에는, 시엔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어떻게 해도 방도가 없었다.
이미 파산한 뒤가 아닌가. 이는 소생 불가 판정을 받은 시체를 두고 다음 방안을 논의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감성이 도무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용서받을 수 없다.
그 사실이 꾸욱, 하고 시엔의 가슴을 조여왔다. 이어서 심장을 난자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고, 시엔은 피가 날 듯 제 입술을 짓씹었다.
안 돼, 안 돼. 이래서는 안 돼.
처음으로 찾아낸 ‘진짜’야.
내 인생에는 유일하다고, 다시는 없을지도 몰라.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지른 여자라도, 기회 하나쯤은 주어져야 하는 거잖아.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낼 테니까.
누적된 정신적 피로가 소녀의 뇌리를 엉망진창으로 헝클어트리기 시작했다.
시엔은 비틀비틀 걸어, 층계를 올라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서랍장을 뒤적였다. 아니, 손에 걸리는 대로 모든 수납장을 열었다. 소중히 간직했던 물건들이 모조리 쏟아져 내렸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다급히 시엔의 방으로 향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관없었다. 시엔은 정신없이 제 소지품을 뒤적이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누군가 시엔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미모의 여기사, 아이린이었다.
최근 들어 다시 칩거를 시작한 그녀였으나,주군의 방에서 느껴지는 수상한 기척에는 방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토록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선 아이린은, 곧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온갖 옷가지와 사물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에서, 시엔은 공허히 텅 빈 서랍장을 박박 긁고 있을 뿐이었다.
시엔은 소중히 한 팔로 제 품에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린의 기척을 느꼈는지, 소녀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는 절망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눈물과 함께.
주르륵, 하고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 아이린…….”
“……전하.”
한탄에 가까운 한 마디였다.
아이린은 망가진 제 주군의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러든 말든 시엔은 비척비척 걸어 아이린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제 품에 소중히 품어두었던 서류를 아이린에게 내밀었다.
어음이나, 증서나, 아무튼 현금을 대체할 수 있는 서류들이었다.
황족의 일원인 만큼 그 금액도 통상적인 아카데미 재학생이 가지고 있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잔고를 싹싹 긁어냈음에도, 시엔은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초조한 기색이었다.
“호, 혹시 모아둔 돈 좀 있어? 아니, 아니지… 그 전에 상단에 대해 좀 알아? 이 돈, 이 돈이면 뭘 할 수 있어?”
“전하, 제발…….”
“뭘 할 수 있냐고!!!”
황녀의 발악에 아이린은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돌리고 말았다.
제 주군이 무얼 바라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파산한 상단을 살리고 싶은 모양이겠지.
안타깝지만, 그딴 방법은 없었다. 상인에게 신뢰는 금보다 귀중하고 ‘제국 황실’이라는 무시무시한 위험요소를 동반한 이상 재기의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차마 그 사실을 전할 용기가 없었다.
단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시엔의 간절한 눈빛을 피하고 있었을 뿐.
결국 시엔은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소녀가 흐느끼는 소리만이 처량했다.
“제발, 제발… 잘못했어… 다,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용서해줘…….”
누구한테 내뱉는 말인지도 모른 채, 시엔은 그저 사죄의 말만을 반복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잔인했다.
모든 아픔의 포석이 자리잡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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