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198화 (198/649)

〈 198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2)

* * *

아카데미의 중앙대로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학생들로 북적였다.

‘귀향제’도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당연히 모든 강의는 끝난 지 오래였으며, 성적도 공시된 이후라 아카데미에 남아있을 까닭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에는 아직 수많은 학생들이 남아있었다.

지난 습격 사태의 후처리가 아직 마무리되지 못한 탓이었다.

지금은 제국과 성국, 열왕국에서 파견된 인사들이 아카데미를 낱낱이 살펴보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마수를 동원한 배후에 암흑교단이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고 여겨지던 집단이었다.

악신 오메로스를 추종하는 그들은 잔혹하기로 이름 높았다. 당장 아카데미를 습격한 마수들만 하더라도 끔찍한 생체 개조의 결과물이었다.

하물며 마수들뿐만 아니라 인체에도 손을 대다니, 인류의 존엄성을 훼손한 암흑교단을 향한 분노와 공포는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각국의 조사관들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얼마 전 생명의 위기를 넘기긴 했으나, 그 충격 또한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우선 부상자는 많아도 사망자는 얼마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하나둘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친구가 많아질수록, 아카데미에는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귀향제 이전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되찾았을 정도였다.

다만 그러한 어수선한 여흥 속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은 있었다.

우울한 낯빛을 하고 걷고 있는 소녀가 대표적이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녀였다. 한때 모든 사람들이 황녀를 사랑하고 존경했었다.

하지만 그늘이 드린 그 얼굴에는 과거의 영광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도리어 웃고 떠들던 이들마저 다소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시엔을 흘겨보기도 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얼핏 귓가를 스치며 시엔의 가슴을 푹푹 찔러댔다.

“들었어? 페르쿠스 가문의 상단이 망했다고…….”

“아무리 오해가 있었다지만, 너무 서두른 거 아니야? 황족이 무섭긴 무섭구나.”

“그 이후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던데.”

“망하고 나서 후회하면 뭐해? 페르쿠스 영지에는 벌써 실직자들이…….”

놀러갈 만한 시내도 습격의 후유증으로 엉망진창이고, 할 짓이라곤 삼삼오오 모여 한담이나 나누는 것밖에 없는 학생들의 입에서는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는 귀족의 비율이 꽤 높았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보력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좋든 싫든 그들의 귀에는 들려오는 소식이 많았다.

그러한 소문들이 몇 차례의 가공을 거쳐 아카데미 내에서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진위여부가 불분명한 정보도 많았다. 예를 들어 ‘페르쿠스 영지에 실직자가 넘쳐난다.’라는 소문이 그랬다.

페르쿠스 가문의 상단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애초에 이안의 여동생은 내년에야 아카데미 입학 조건을 갖추는 미성년자였다.

상행에 나선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따라서 상단이 굴리는 자본의 크기도 대단치는 못했다.

망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만큼 영세한 상단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단 하나가 페르쿠스 영지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페르쿠스 영지의 패망은 여러 단계에 걸쳐 준비되어 있었다.

상단은 그 첫 시발점에 불과했다. 이후 차례로 주변 영지와 관계가 단절되고, 물자의 이동이 줄어들기 시작하며 페르쿠스 영지에는 생필품이 부족해진다.

그렇게 민심이 흉흉해진 사이 유르디나 가문의 별동대가 시비를 걸 예정이었다.

그러면 부족한 사정에도 어떻게든 병력을 짜낼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럴수록 더더욱 민심은 악화되며 페르쿠스 영지는 점차 수렁에 빠져든다.

다만 그 나머지 계획들은 취소된 지 오래였다.

이를 철회하기 위해서는 시엔도 다소 무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안에게 용서를 받기 위한 최저한의 조건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없던 것이 하나 있었다.

페르쿠스 가문 상단의 파산, 철회하라는 지시가 너무 늦었던 탓이었다.

시엔은 그 소식을 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었다.

도리어 걸음을 옮기다가도 때때로 멈춰 서서 오들오들 몸을 떨곤 했다. 넘치는 한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연회색 동공은 경련을 반복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시엔은 지난날부터 뇌리를 점령한 질문을 떠올리며, 으득, 하고 엄지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수습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안을 괴롭히고 주변 사람들까지 건드린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용서를 받을 여지가 남아있었다.

그들에게 수복 불가능한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페시아 영애는 다행스럽게도 이안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엔이 설득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나쁜 년이 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 외에도 사실 시엔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모든 이들이 자연스레 시엔에게 등을 돌렸다. 그들은 새로인 영웅인 이안을 찬미하는 대신, 그들의 지은 죄를 대속할 희생양으로 시엔을 지목했다.

그렇게 시엔은 증오와 분노의 제단 위에 바쳐져, 홀로 활활 타는 제물이 되었다.

그래, 기꺼이 그래줄 생각이었다.

솔직히 괘씸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공범이 아닌가. 그러나 가장 큰 죄는 시엔에게 있었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이안의 평판만 되돌릴 수 있다면 좋았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불현듯 되살아나 소녀의 숨통을 옥죄여도, 평생 동안을 찾아헤맸던 ‘진짜’를 드디어 발견한 차였다.

웃으며 감수할 수도 있었다. 눈물이야 매일 밤 흘리는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아직 이안의 곁에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받진 못했다.

그러나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속했다. 관계의 개선이란 애초에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단지 상단의 파산만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 되어 시엔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 더욱 부유한 상단을 창설할 수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간 쌓아온 인맥과 신뢰는 아무리 자본을 투자해도 얻어낼 수 없는 자산이었다.

하물며 그동안 상단을 운영해 온 시간은?

앞으로 상단을 재건할 때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시간 또한 무형의 자산이었다. 이안의 여동생이 느끼고 있을 상실감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숨이 턱턱 막혀서, 시엔은 걷다 말고 제 목을 죄었다.

켁켁, 하는 토막난 신음과 함께 눈에서 찔끔 눈물이 새어나왔다. 떨리는 연회색 동공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시엔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뇌리 깊숙한 곳에 파고든, 유년기의 기억이 다시금 부상했다.

시엔의 목을 조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그럴 때마다 시엔은 그날 절절히 깨닫고 말았던 진리를 되새김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들이 나를 미워해.

모든 이들이 가식의 가면으로 쓰고 나를 대하고 있어.

심지어 너를 사랑한다는 어머니마저도, 전부 다.

고작 몇 살 되지도 않은 계집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잔혹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이는 갓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연회색 동공이 멋대로 세로로 갈라졌다.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수군대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묻어나오는 옅은 적의까지도.

시엔의 몸이 척추에 칼이 박힌 물고기처럼 한 차례 경련하더니, 이내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옆에서 보기에는 현기증이라도 일어났나 싶은 모습이었다.

누가 보아도 불안정한 모습에 주위에서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여학생이 조심스레 시엔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저, 황녀 전하? 혹시 무탈하신지요?”

그러나 여학생은 곧 숨을 들이키며 흠칫 몸을 굳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향하는 그 연회색 동공이,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한 압박감에 여학생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여학생은 화들짝 정신을 차린 뒤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시엔의 눈동자는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황녀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처량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네, 괜찮아요… 요즘 잠을 좀 못 잤더니.”

그 말씨에는 은근한 거리감이 느껴져서, 여학생은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엔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어딘가를 향해서.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학생은, 곧 제 무리에 합류해서 곧장 시엔을 씹어대기 시작했다.

“아오, 싸가지 없어. 황족이면 다야?”

“쯧쯧, 그러게 네 주제에 무슨 황족 걱정이야~ 황녀 전하께서는 쓰러지든 기절하든 수발 들어줄 사람이 주위에 널렸는데.”

그래서 여학생은 알지 못했다.

고개 숙인 채 걷고 있는 시엔의 눈빛이, 얼마나 싸늘히 가라앉아 있는지를.

으득, 하고 소녀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인의 연회색 눈동자에는 흐릿한 귀기(??)마저 서려 있어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시엔은 또 다시 생각했다.

역시나, 모조리 ‘가짜’뿐이다.

‘진짜’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황녀는 그 ‘진짜’를 가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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