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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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성녀는 부산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신전에 워낙 부상자들이 많이 몰린 탓이었다. 수백 마리의 마수가 동원된 습격은 수많은 참사를 낳았고, 심지어 자폭하는 마수에 의해 몇몇 사제들이 낭패를 보기도 했다.
환자는 많고 사제는 부족하다.
그러니 아카데미 내에서 신성력으로는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는 성녀가 바빠지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특히 요즘의 성녀는 더욱더 정신이 없었다.
이제 곧 이안을 치료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물을 바칠 준비는 끝난 뒤였다. 신물을 써서 정식으로 제의를 시작하면, 이안의 부상도 말끔히 나을 터였다.
그만큼이나 ‘신물’이란 귀중한 물건이었다.
근래 들어서만 몇 번이고 빈사의 상태로 실려 온 사내를 완치시킬 수 있을 만큼.
성녀의 솜씨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성녀가 심혈을 기울여 이안의 치료를 준비하고 있는 까닭은, 대략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성녀는 이안을 사랑했다.
스스로 인정하기는 조금 꺼려지지만, 아무튼 그랬다. 천신 아래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연이 닿은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사랑하는 사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성녀는 이안이 또 다쳐서 돌아올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안이 부상 없이 되돌아온 적은 없었다. 심지어 이제 아카데미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수렵제부터 고아원, 그리고 귀향제까지 이어지는 궤적에 ‘암흑교단’이라는 배후가 등장했다.
이변이 이대로 끝나지는 않으리라.
그렇다면 늘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이안 또한 충돌을 피해갈 수는 없을 터였다. 최대한 공을 들여서, 신물을 아껴둘 필요가 있었다.
이안이 다치면 또 써야 했으니까.
그 외에도 협의해야 할 문제는 많았다.
일단 이안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슬슬 퇴원하는 환자들이 많아지며 중상자들에 한해 보호자들의 면회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병실은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특히 이안의 병실이 더욱 그랬다.
아직도 성녀는 파리한 안색을 한 이안을 내려다보던 세리아의 얼굴을 기억했다.
낯빛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손에 들고 있던 과일꾸러미마저 떨어트릴 지경이었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세리아는 이안의 안부를 계속해서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성녀는 안심하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세리아는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는 델핀이 한숨을 내쉰 뒤에야 끝이 났다.
“……그만해, 세리아. 황실에서도 신물을 내렸다니까, 목숨만 붙어있다면 큰일은 아닐 거야.”
그제야 세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다시금 이안에게로 돌렸다.
차마 이안 다음으로 존경하는 언니의 명을 어길 수는 없던 탓이었다. 이를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델핀은, 이내 성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안을 잘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뭔데, 라는 말이 순간적으로 목젖을 치고 올라올 뻔했지만 성녀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래, 아끼는 후배한테 얼마든지 건넬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조금 불퉁한 심정으로 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이안 형제님은 저와도 연이 깊으신 분이니까요.”
성녀가 싱긋 웃으며 마주 고개를 숙이자, 델핀은 물끄러미 성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침묵은 짧았다.
이내 델핀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성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교태로운 목소리가 성녀의 고막을 녹일 듯 달콤했다.
“우연이네요, 저도 그렇거든요… 혹시 이안한테 엉덩이 맞아보셨나요?”
“……무, 무슨!”
성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펄쩍 뛰고 말았다. 상상 이상의 내용이라, 혹시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성녀는 곧장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 그런 파렴치한! 조금 부럽… 아, 아니! 신성 모독이에요! 종교 재판에 회부하겠습니다!”
쿡쿡, 하고 그 모습을 보며 델핀은 권태로운 웃음소리를 터트릴 뿐이었다.
“농담입니다.”
성녀는 끝까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델핀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리 성녀라도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에게 그토록 은밀한 진실을 캐물을 수는 없었다.
세리아만이 두 사람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곧 언니가 병실을 떠나자, 안타깝다는 듯 이안을 바라보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 버렸지만 말이다.
그 외에는 셀린과 레토가 찾아왔다.
셀린은 한참이나 훌쩍이며 이안의 손을 붙잡고 있다가, 이내 간절한 어조로 성녀에게 애원했다.
“우, 우리 이안 오빠… 살아날 수 있겠죠? 성녀님, 제발…….”
“걱정 마세요, 셀린 자매님.”
성녀는 웃지 않으면 욕이 날아갈 것만 같았으므로 미소를 지어야 했다.
정신을 잃은 사내의 손을 멋대로 만지다니, 참으로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었다.
“내일 제의가 시작되면, 못해도 3일 이내에는 이안 형제님도 의식을 되찾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또한 천신의 은혜이니, 임마누엘.”
셀린은 크흥, 하고 병실 구석에 있던 휴지에 코를 풀었다. 그만큼 많이 울었다는 뜻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사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 과장된 몸짓에는 어떠한 의도가 담겨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 남자는 내가 찍었으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암묵적인 신호.
물론, 성녀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속으로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레토가 팍, 하고 셀린의 허리 부근을 발로 차버렸다.
“악, 악! 야, 레토… 너 진짜 미쳤어?! 지금 내가 성녀님께 부탁을 드리고 있잖아!”
“알았으니 나가자, 나가. 성녀님께서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거 아니야?”
듣던 중 고마운 소리였다.
성녀는 살짝 고개를 숙여, 투덜거리며 병실을 떠나가는 셀린과 레토에게 감사를 표했다. 레토는 성녀를 스쳐지나갈 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을 잘 부탁드립니다.”
성녀의 손이 성호를 그었다.
“임마누엘.”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진심이 담긴 말에는 진심으로 응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는 엘시와 루핀 남매가 찾아오기도 했다.
엘시는 의외로 눈물조차 흘리지 않았다. 단지 울적한 눈빛으로 이안을 내려다보다가, 읊조리듯 물어왔을 뿐이었다.
“내가 주인님을 따라갔다면, 달라졌을까?”
아무도 모를 가정이었다.
돌려줄 수 있는 대답은 오직 의례적인 위로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엘시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게 병실을 떠나는 엘시의 블루 사파이어빛 눈동자에는, 희미한 결의가 머무르고 있었다.
그 결심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성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이안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기만을 바랐다.
대신 너무 이안에게 가까워지지는 말고.
그렇게 사심이 듬뿍 들어간 기도를 올리며, 성녀는 다음날 있을 제의의 준비를 마무리했다.
마지막 손님이 성녀를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암청빛 머리카락에, 연회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도도하고 꼿꼿하던 과거와는 달리, 그 낯빛에서는 우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 정체를 단박에 깨달은 성녀의 손이 이마 위로 얹혀졌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가 그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안 경을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에 맞서는 시엔의 음색 또한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성녀는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중에 실컷 보세요. 이안이 눈을 뜬 다음에, 당신은 애초에 이안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에요. 네? 당신과 이안을 만나게 해봐야 치료에 방해만 되는데, 왜…….”
“뭐든 할게요.”
우뚝, 하고 성녀의 말이 멎었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아 시엔을 바라보았다. 그러든 말든, 시엔은 음울한 어조로 읊조릴 뿐이었다.
“이안 경만 볼 수 있다면, 뭐든 할게요… 제발, 아무거나 시켜주세요.”
그러나 성녀는 곧 코웃음을 치는 수밖에 없었다.
뭐든 시켜 달라고?
치료는 그렇게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하물며 제의가 필요한 수준의 부상을 치료하는 문제라면, 교육조차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비전문인력이 투입될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녀는 조롱하듯이 말을 이었다.
“당신이 뭘 할 수 있는데요? 고작해야 하녀처럼 물 떠오고, 걸레질 좀 하기? 황족이 돼서 무슨 그딴 허드렛일을…….”
“……할게요.”
또 다시 말문이 막혔다.
동그랗게 뜨인 성녀의 눈동자가 그 발언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입증하고 있었다.
제국의 황족은 고귀하다.
당장 고위 귀족만 하더라도 허드렛일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다. 고아원에서도 델핀은 한동안 잔심부름을 거부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황족이 물을 나르고 걸레질을 해?
헛소리였다. 그것은 황족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뭉갤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기르고 있는 돼지의 명령에 따라 물을 따르고 시중을 드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 정도의 충격이었다.
허를 찔린 성녀의 입술이 헛된 개폐를 반복했다.
“할게요. 하녀든. 시녀든… 그러니까 제발, 이안 경을 보게만 해주세요…….”
그렇게 애원하는 시엔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결국 눈물을 참을 수 없었는지 시엔은 훌쩍이며 눈가를 몇 번이고 소매로 훔쳐냈다. 감정의 기복이 상당했다.
정신이 한계에 몰려 있단 의미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유일한 치유 수단으로 택한 것이 바로 이안을 만나는 것이고.
어째서 그토록 이안에게 집착하는지, 어쩌다 그만큼 시엔의 정신이 궁지에 몰렸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당장 파고들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성녀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짓씹으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마음대로 해요.”
일행 사이에서 시엔의 서열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제국의 제5황녀 시엔, 서열 최하위.
시녀였다.
**
이안은 헐떡이며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폐부에 가득 들어차는 공기에는, 희미한 약초 냄새가 섞여 있어 이곳이 어디인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신전의 집중치료실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이안은 한동안 끙끙거려야 했다.
그가 곧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직 찌뿌둥한 느낌이 남아있었지만, 몸 자체는 괜찮아 보였다. 후유증을 걱정했지만 어떻게든 완치가 된 모양이었다.
병실의 문이 열린 것은 이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피로한 기색으로 문을 열고 들어온 성녀는, 이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내 울먹이며 외쳤다.
“……이안!”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또 다시 많은 걱정을 끼친 듯했다. 흐릿하던 정신이 점차 맑아지며 지난날의 기억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순 멍하니 있던 이안이 처음으로 내뱉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황녀는?”
“네?”
황급히 이안의 곁으로 다가서던 성녀는, 그 느닷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그제야 이안은 호칭이 조금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급히 정정을 시도했다.
“황녀 전하 말입니다, 무사합니까?”
“아, 그 여자…….”
성녀가 말끝을 흐리자, 이안의 금빛 눈동자에 의혹이 서렸다. 그럼에도 성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구해준 여자가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성녀는 대략적으로 지금 황녀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공적 취급을 당하고 있고, 소문만으로는 희대의 악녀이며, 정신 상태가 불안정해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잦다.
그나마 이안을 바라볼 때만 다소 안정을 되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성녀야 까닭을 알 수 없었지만, 이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단박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황녀의 과거, 그리고 ‘용의 눈’.
이안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곧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려 시도했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성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왜, 왜 그래요! 아직 당신 환자라고요! 다시 누워요, 당장!”
그러나 이안은 성녀의 다급한 만류에도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맡에 정리되어 있던 짐더미 사이에서, 손도끼를 찾아 손에 들었다.
오랜만에 드는 무장은 묵직한 무게감을 전달하고 있었다.
휙, 하고 허공에 떠오른 손도끼가 다시금 그의 손에 붙잡혔다. 다행스럽게도 감이 아주 죽지는 않은 듯했다.
이안이 하는 양을 유심히 지켜보던 성녀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해요?”
“연습.”
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네리스 선배를 불러주세요.”
아무래도 뒤처리가 남아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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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시엔은, 낯선 편지봉투를 받았다.
이안의 여동생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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