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00화 (200/649)

〈 200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4)

* * *

그날 아침따라 시엔은 불길한 공기를 읽었다.

일종의 직감일지도 몰랐다. 어수선한 바람이 창틀을 때리며 지나가는 소음에 눈을 뜬 황녀는,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침대 위에서 내려섰다.

한때 총명한 이채를 품었던 그 연회색 눈동자는 거무죽죽하게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최근 들어 연달아 겪은 사건들은 갓 성인이 된 소녀의 정신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우선 죽을 위기를 넘겼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시엔을 돌보았던 시녀장이 사망했다. 호위기사들이 죽었고, 생존한 것은 오직 시엔과 아이린 단 둘뿐이었다.

고르고 고른 측근이 사망했다는 것은 단순한 손익으로만 계산할 문제가 아니었다. 시엔도 사람인 이상 정신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도 꽃은 피는 법이었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엔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이안이었다. 거짓과 기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진심으로 그녀를 대해주는 유일한 사람.

허나 아직 절망은 남아있었다. 그 ‘새로운 희망’은, 시엔이 지금껏 냉대하고 괴롭혔던 사내와 동일인물이었던 탓이었다.

차라리 그 하나만 괴롭혔다면 괜찮았을지도 몰랐다.

안타깝게도 시엔은 이안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손을 댔다. 그리고 그동안 황녀의 편에 서서 이안을 욕했던 사람들은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용의 눈’은 모든 인간의 감정을 읽어냈다.

증오와 적의의 격류를 마주할 때마다, 시엔은 숨이 막혔고 어린 시절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럴수록 시엔은 더더욱 이안의 존재에 집착했다.

얼마 전에는 성녀를 비롯한 여인들의 시중을 드는 역할까지 자처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다소 떨떠름해 보이던 성녀였지만, 그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어디까지 버티나 보겠다는 심정으로 황녀에게 온갖 허드렛일을 시키기도 했다.

물론 시엔은 무엇이든 해냈다.

그래야만 이안의 곁에 남아있을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그 기간은 어디까지나 한정적이었다.

이제 곧 이안이 눈을 뜰 예정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이안이 시엔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시엔의 명과 암이 갈릴 터였다.

어제 의식을 진행했다면 오늘쯤에는 슬슬 정신을 차리리라는 언질을 받은 뒤였다.

시엔은 더욱 초조해져서, 제 엄지손톱을 몇 번 더 깨물었다. 덜덜 떨리는 동공이 그녀의 초조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발, 용서를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혹시 모르니 시엔은 오랜만에 꽃단장을 했다. 눈을 뜬 이안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두 시간에 걸친 준비 끝에 황녀는 비로소 방을 나섰다.

다소 긴장한 걸음걸이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각오를 다지던 그녀의 움직임이 멎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층 로비의 책상 위였다.

매일 아침 사용인들이 우편을 정리해 두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낯선 편지봉투가 하나 자리하고 있어서, 시엔은 무심코 발걸음을 돌렸다.

발신인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리아 페르쿠스’, 이안의 동생이었다.

시엔의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도착한 편지라니?

그러나 읽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엔은 숨까지 죽이며 편지봉투를 천천히 뜯었다. 그곳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줄글이 이어지고 있었다.

연회색 눈동자가 그 편지의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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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고귀한 용의 피가 흐르는 제국 황실의 다섯 번째 딸, 시엔 전하께.

황녀 전하.

황제 폐하의 변함없는 충신이자, 페르쿠스 자작가의 막내인 리아 페르쿠스가 편지로나마 인사를 올립니다. 그간 평온하셨는지요?

공사가 다망하신지라 한적한 시골 영지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으리라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써보고자 합니다.

근래 들어 페르쿠스 영지는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제 부덕의 소치입니다.

운영하고 있던 상단에 느닷없이 채무 상환을 독촉하는 서류가 다수 날아들었기 때문입니다. 내심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상상과 현실의 간극은 넓고도 깊었습니다.

가족 같던 상단 직원들이 고개를 떨구자 제 심장도 함께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파산을 확신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시골 영지의 영세한 상단이 상대할 수 있는 채무가 아니었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는 생각합니다.

이처럼 황녀 전하와 무관한 소식을 알려드리는 까닭이 궁금하시겠지요.

사실은, 얼마 전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황녀 전하와 제 못난 오라버니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 오라버니는 멍청하고. 외골수에, 사리분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제 오라버니가 그토록 무시무시한 음모와 엮여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소문이 늘 그렇듯이 다소간의 과장이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단편적인 정보로도 제 오라버니의 충심은 증명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 그와는 무관하겠지만, 왜 하필 제 상단에 채무 독촉이 날아들었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혹여 황녀 전하께서 아량을 베풀어 그 사정을 파악해 주시지 않으시련지요?

제국의 귀족은 받은 대로 갚아야 합니다. 원수든 은혜든 그렇습니다.

저 또한 제국의 귀족으로서 원한은 원한으로, 은혜는 은혜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황금의 윤리를 철칙처럼 지켜왔습니다.

하물며 황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오라버니가 황녀 전하께 자그마한 도움을 베풀었다면, 황녀 전하께서도 그에 못지않은 은혜를 사사해 주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못난 오라버니지만, 또한 제가 마음 속 깊숙이 사모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만일 오라버니께서 황녀 전하께 무례를 저질렀다면 부디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리아 페르쿠스는 상단이 파산했다고 죽진 않지만,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죽으라면 기꺼이 죽을 용의가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이 리아 페르쿠스의 목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짖으라면 짖고, 기어가라면 기어가겠습니다. 설혹 어딘가 창녀촌에 팔려간다 하더라도 불만을 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는 편이 상단 하나를 파산시키는 것보다는 더 간단한 일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무릎 꿇고 애원하겠습니다. 부디 오라버니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은 하나만으로 족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오라버니께도 따로 언질을 해두겠습니다.

부디 제 충심 어린 조언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From. 제국 황실의 충직한 신하, 리아 페르쿠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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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은 황녀는 침묵했다.

읽어내리는 내내 편지를 쓴 소녀의 강단이 엿보이는 글이었다. 제국의 황족을 이토록 시종일관 조롱하는 솜씨는 그 성미가 보통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했다.

물론 상인으로서는 실격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족을 도발하다니, 상단이 파산을 당했으니 제정신일 리는 없었지만 용기보다는 만용에 가까운 태도였다.

그럼에도 황녀는 한동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한 줄 한 줄에서 느껴지는 원한이, 그 정제된 문체에서 다가오는 적의가 황녀의 망막을 파고들어 뇌리를 쿡쿡 찔러댔다.

활자 하나하나가 활이 되었고 황녀의 시신경은 현이 된 느낌이었다.

문단과 문단을 타넘을 때마다 시엔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느닷없이 비굴할 만큼 자세를 굽혀 애원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과호흡 증상을 보일 지경이었다.

‘창녀촌’이라는 낱말이 유독 눈에 익었다.

일전에 키득거리면서, 그러한 말을 하던 소녀가 있었다.

‘얼굴만 반반하다면야, 먹고 살 걱정은 없잖아. 심지어 귀족 출신이라면 창녀촌에서도 환영…….’

말도 안 돼.

시엔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들어 그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따위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그리고 원한을 원한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그 말이 유독 머리에 틀어박혔다. 시엔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현기증을 느낀 시엔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편지가 툭, 하고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시엔은 홀린 듯이 베르라타 궁을 나서 어디로든 걸었다.

본래라면 신전으로 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멍하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몇 가지 문장들이 자꾸 부유하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은 하나만으로 족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 오라버니께도 따로 언질을 해두겠습니다.’

돌이킬 수 없다고, 언질까지 해두었다고.

눈을 뜬 이안이 과연 제 여동생을 건드린 시엔을 이해할까?

그래, 애초에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었다.

용서받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시엔이 택한 결과였다.

그래서 황녀는 군중 사이로 파고든 뒤에도 넋이 나간 채 걸었다. 그러다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본 순간.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적의와 악의로 가득 차 있어 시엔은 숨을 헐떡이는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 있는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피로와 상처가 누적된 시엔의 정신이 파열음을 일으켰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느닷없이 치솟는 구토감에 시엔은 헛구역질을 했다. 한참이나 제 가슴을 두드리면서, 헛구역질을 해도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다가와 시엔을 부축하려 들었다. 그러나 시엔은 발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건드리지 마!”

어차피 비슷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나같이 적의를 보이고, 그러면서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지긋지긋했다. 이미 수도 없이 보아온 광경이었다.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부터.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그 종착지는 이곳이었다. 시엔은 그 시절로부터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시엔은 그 점이 못내 분해서 눈물을 흘렸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헛된 망상이었다.

얼마쯤 인파의 한가운데에서 울었을까.

시엔의 눈에 환각이 보였다.

군중을 헤치고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틀림없는 이안 페르쿠스였다.

시엔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품을 파고들어 울었다. 이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시엔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어차피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그날 시엔의 기억은, 그 질문으로부터 출발했다.

“……용서만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요?”

시엔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족의 명예니, 귀족의 도덕이니 하는 소리를 내뱉었던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시엔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안에게 애원했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시엔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으득, 하고 연골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닷없는 통증에 시엔은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핏물이 솟구쳤다. 시엔은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뒤로 넘어지고 있었고, 부릅떠진 연회색 눈동자가 향한 곳에는 날카로운 은빛 궤적이 그려지고 있었다.

사태는 명확했다.

시엔의 어깨를 파고드는 날붙이가 하나 있었다.

손도끼였다.

그것이 시엔의 어깨 관절을 부수고 들어온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는 어마어마한 통증을 동반했다.

쓰러진 채로, 시엔은 예상조차 하지 못한 격통에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흐으, 윽… 꺄아아아아아악!”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무심한 한 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그럼, 몇 대만 맞읍시다.”

아카데미의 중앙대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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