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7)
* * *
아카데미는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조사는 마무리 단계였고, 철두철미한 탐색 끝에 마수의 잔당들도 모두 토벌이 끝난 뒤였다.
다행스럽게도 아카데미 내에서 또 다른 배신자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물론 황족의 최측근에 꼭두각시를 심어둔 집단이 바로 암흑교단이었다. 아카데미 내부에 그 간자가 숨어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금번의 습격에 가담한 이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제국과 성국, 남부 열왕국의 합동 조사단이 면밀한 수사 끝에 도출한 결과였다. 이를 의심하기는 힘들었고, 비로소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뒤늦은 귀향길에 오를 준비를 했다.
마수의 습격 이후 단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던 아카데미였다.
느닷없이 공공의 적으로 대하던 학생을 영웅으로 추앙하질 않나, 그 대신 희생양으로 삼아진 황녀는 대로변에서 정신이 무너진 채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중앙대로에서 있었던 폭력의 연쇄.
그 가해자는 습격 사태를 거치며 공공의 적에서 영웅으로 승격된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이안 페르쿠스.
바로 나였다.
솔직히 말해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긴 했다.
오랜 시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직후였다. 그런데 기껏 구해놓은 황녀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망가져 가고 있다니, 나로서는 황당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심지어 그 원인조차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네리스 선배를 비롯한 신문부원들은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던 듯했다. 다만 지난 신문부 습격 이후로 그들의 지휘권한은 내게 일임되었다.
다시 말해, 상부를 깍듯이 모셔야 하는 제국 첩보부는 손 쓸 방도가 남아있지 않았다.
사실 아무리 그래도 다소의 재량권은 있었으니 무언가 조치를 취하길 바랐건만, 이상과 현실은 늘 차이를 보이곤 했다.
하기야 나도 제국 첩보부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제국 첩보부도 나름 눈치를 보아야 했을 테니,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그래서 그 매듭을 풀기 위해 내가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효과는 뛰어났다.
이제 황녀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카데미에 남아있지 않았고, 도리어 동정 여론마저 일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나에 대한 악평이 흘러나오는 일도 없으니, 만사형통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날도 성녀는 멋대로 병실을 뛰쳐나간 나를 훈계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다.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녀는, 이내 내 모습을 보자마자 의아한 기색을 보이고 말았다.
“이안… 어제 분명, 제가 한동안 거친 운동은 무리라고 했……! 이안?”
드물게도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초조한 심정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애써 티를 내보이지 않겠다고,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성녀님.”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되묻는 성녀의 눈동자는 이미 차게 식어 있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서는 의혹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생명의 위기를 앞두고서도 한 번도 떨지 않았던 나였으니까.
성녀로서는 내가 초조해하는 광경을 처음 보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사정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나는 여전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직 근육통이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네요.”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 새벽 남몰래 찾아온 네리스 선배가 내게 전했던 그 말을.
지금 제국 황실에서 나를 찾아올 예정이었다.
며칠 후에 온다고는 했지만, 무려 용혈 문자에 관계된 용건이었다. 당연히 상대도 그 중요도에 준하는 인물이 파견될 것이 뻔했다.
최소한 용혈 문자의 소유자일 터였다.
그리고 그 정도 위치쯤 되는 인물이라면, 시골 자작가의 차남 따위는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힘과 권력이 존재했다.
아니, 차라리 얌전히 죽이기만 한다면 다행이었다.
황족 능멸에 온갖 죄목을 붙여 가문을 몰살시키고 나를 고문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지만, 결국 그 말을 믿게끔 하려면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 뻔했다.
그 점이 못내 피곤하고 걱정스러웠다.
내가 한참을 끙끙거리는 것도 모자라 손까지 덜덜 떨고 있던 이유였다.
물론 이처럼 구구절절한 사정을 성녀에게 모두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나와 그녀의 관계라면 언젠가는 진실을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어차피 말한다고 해서 성녀가 도울 만한 여유도 없었다. 고작해야 며칠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입니다.”
“누가 뭐래요?”
그렇게 핀잔을 주며 코웃음을 치는 성녀였지만, 그녀의 연분홍빛 시선은 한동안 내 얼굴에서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유심히 나를 살피는 그 눈빛에 괜히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기나긴 한숨을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님.”
“……흥, 왜요?”
은빛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는,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도리어 그 마음을 알아달라는 듯 자꾸 나를 흘겨보았으니 착각은 아닐 터였다.
레토의 속성강의로 나름 여심에 통달했다고 생각한 나였다.
하지만 그 착각은 나날이 새로운 난제를 마주칠 때마다 여지없이 깨져나갔다. 성녀가 삐진 이유는 짐작이 가는데, 이를 어떻게 달래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느꼈는데 무언가를 감추고 있으면 서운할 만도 했다.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던 나는 결국 회피를 택했다.
내 입이 또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는 어떻습니까?”
“아, 그 여자…….”
내 질문에 성녀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슬쩍 눈을 피했다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물어왔다.
“당신한테 얻어맞았다면서요? 혹시 그게 걱정됐던 거예요?”
“아니, 뭐… 비슷하긴 합니다만.”
정확히는 그보다 ‘용혈 문자’가 걱정이었다.
황족을 대로에서 팬 것은 황실에 대한 모욕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녀가 ‘황족의 명예’를 운운한 이상 황실도 대놓고 나서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용혈 문자는 달랐다.
이는 제국 황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힘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황녀를 대로변에서 팬 일이 충격적이라 하더라도, 용혈 문자가 유출되었다는 소식만큼 중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설명할 수 없어 임기응변으로 내놓은 대답이었으나, 성녀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귀족에게 있어 황실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던 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여자를 치료하러 갔더니, 아주… 맛이 갔던데요?”
맛이 갔다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성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조금 교육을 시키고 돌아왔죠. 나중에 뒷말이 나오면 안 되니까.”
“……이상한 짓 한 건 아니죠?”
“이상한 짓이라뇨? 단지, 자신의 입장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을 뿐이에요. 이러나저러나 당신이 중상을 입은 건, 그 여자가 무능한 탓이었으니까.”
내 입에서 다시 끄응,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측근을 관리하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지도자의 책임이었다. 암흑사제가 파고들 만한 틈을 내준 것은 황녀의 죄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가혹한 이야기였다.
이제야 막 성인이 된 소녀에게 그토록 과중한 짐을 짊어지우다니, 그러나 일단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권리와 의무는 동등했다.
둘 중 하나만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 점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더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나중에 사태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때 제지하더라도 늦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내 앞에 닥친 문제가 더욱 시급했다.
내 낯빛이 다시금 심각해지자 성녀는 흐응, 하고 묘한 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연분홍색 눈동자가 어느덧 가늘게 뜨여 있었다. 내 침대 옆의 의자에 착석한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역시, 숨기는 거 있죠? 얼른 말해요.”
“말해봐야 무얼 하겠습니까.”
내 초탈한 목소리에 성녀는 더욱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애까지 닿았던지, 성녀는 다소 애교 섞인 어조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말해 봐요, 네? 우리 사이잖아요.”
“우리 사이가 뭔데요?”
내 반문에 성녀는 잠시 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하고 성녀는 각오를 다진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비밀 말해주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소원?”
멍하니 흘러나온 내 목소리에 성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미모였다. 어느덧 내 가슴 또한 콩닥거리는 진폭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만 내가 들뜨기 시작한 까닭은 조금 달랐다.
성녀의 미모에 감응했다기보다, 번뜩이며 내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녀와 약속을 하나 했었다.
모든 것을 해결하고 돌아오면, 소원을 하나로 들어주기로 한 내기였다.
성녀는 아직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듯했다. 도리어 그녀는, 스스로가 위험에 처한 줄도 모르고 슬쩍 제 젖가슴을 팔로 받치며 강조하기까지 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날갯짓까지 하는 모양새였다.
성녀의 교태를 두른 목소리가 내 귓가를 흠뻑 적셨다.
“네, 소원…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
나는 그만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되묻고 말았다.
“소원이라면, 뭐든 해도 되는 겁니까?”
그러자 성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슬쩍 눈웃움을 지어보였다. 숨이 막힐 듯 매력적인 호선이 그어졌다.
여인의 팔이 슬쩍 들려지며 흉부의 곡선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내뱉어지는 결정타.
“……네, 그럼요. 소원이잖아요?”
그렇다면 더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내 손이, 곧장 성녀의 탄력 있는 살덩이를 움켜쥐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