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04화 (204/649)

〈 204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8)

* * *

집중치료실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찌나 조용한지 창밖에서 풀잎이 바람에 스치우는 소리마저 들려올 정도였다.

성녀의 연분홍색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시선이 제 젖가슴을 향했다.

그곳에는 내 손이 자리하고 있었다.

만지는 대로 그 모양새를 바꾸는 살덩이는 신비한 감촉을 지니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만족감이 느껴졌다.

성녀는 말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다만 눈을 깜박거리면서, 토막 난 소리만을 흘릴 따름이었다.

“어, 으, 아……?”

그러든 말든, 나는 언제 또 느낄 수 있을지 모를 천상의 감촉에 집중하기로 했다.

무척이나 부드러운 빵 반죽을 만진다면 이러한 느낌이 들지도 몰랐다.

본래 근육 하나 없는 살덩이란 말랑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의문인 것은, 어째서 여인의 특정 신체부위만이 유독 그토록 흡족한 기분을 선사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특히나 성녀의 흉부 굴곡은 양감과 질감이 둘 다 훌륭했다. 말랑거리는 느낌을 넘어선 말캉거리는, 그 미묘한 촉감에 나는 옅은 탄성을 터트렸다.

천 너머인데도 이토록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질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마치 탄력 있는 반죽과 뭉실거리는 구름의 사이에 있는 물체를 만지는 듯했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다 못해 감싸는 살결의 감촉에, 나는 문득 그 탄력의 한계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쥐어짜듯 신성력 주머니를 찌부러트리자, 성녀는 다급히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찌르르, 하는 떨림이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흐, 흐읏!”

그 탄성은 곧 증명되었다. 내 손아귀 사이로 흘러넘치려 드는 보드라운 감촉, 나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아귀에 쥔 힘을 풀었다.

“좋네요, 소원. 앞으로도 기회가 있다면 내기를 해볼까…….”

넋을 놓고 있던 성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때였다.

“……미, 미, 미쳤어요?!!”

빼액, 하고 소리를 내지르는 성녀의 얼굴은 이미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 눈가에는 옅은 이슬마저 맺혀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성녀는 수치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내 손길을 뿌리치려는 듯 몸에 비틀고자 했다.

“서, 성추행이잖아! 이 성범죄자! 서, 성녀의 순결한 육체를 건드는 것이, 얼마나 중죄인지 알기나 하… 흐으읏?!”

그러나 그 시도는 곧 좌절되고 말았다.

내가 다시금 손아귀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성녀는 곧장 옅은 신음을 흘리며, 다시금 제 젖가슴을 받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고개가 절로 푹 꺾였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성녀가 시끄러울 때마다 잠재울 수단이 생기다니.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성녀님, 이러시면 안 되죠. 본인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소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한다고.”

“그, 그게 이거랑 무슨 상, 관… 으응, 흣!”

성녀는 이를 악물고 달큰한 신음소리를 참아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연분홍빛 눈동자가 분한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럴수록 나는 성녀에게 승자의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지난 습격 때, 약속했잖습니까. 다 해결하고 돌아오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그제야 성녀는 아차, 싶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동안 나를 째려보던 그녀의 눈초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슬쩍 내 시선을 피하더니, 성녀는 우물쭈물하며 중얼거렸다.

“그, 그거언… 흐으응…….”

옅은 비움을 섞이며 달뜬 숨소리를 내뱉는 성녀의 모습은, 객관적으로 봐도 음란했다.

애초에 몸뚱아리 자체가 야한 여자였다.

그 미모부터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는 굴곡까지, 하나하나 남성을 흥분시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그야말로 죄 많은 육체.

만약 아카데미의 신학부 학생이 암흑교단에 투신한다면, 그 주된 원인은 성녀일지도 몰랐다.

그만큼이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한때 절벽 위의 꽃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지금 나를 물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연분홍색 동공에서는 은근한 욕망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젖가슴의 감촉을 만끽하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성녀는 그저 억눌린 신음을 잇새로 흘리며, 부끄러움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나를 쏘아볼 뿐이었다.

간간이 성녀의 매도가 날아들었다.

“바, 바보오… 흐읏, 쓰, 쓰레기잇…….”

물론 그럴 때마다 손아귀에 힘을 주면, 성녀는 곧 말을 잃고 몸을 부르르 떨기만 했다.

이쯤 되니 아무리 나라도 다소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헐떡이는 성녀의 숨소리가 점점 더 달콤한 색을 띠었다. 그 연분홍빛 눈동자가 아른거리는 애원을 담고 나를 응시했다.

사실 매번 도발하기에 반쯤은 놀리려고 한 짓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선을 넘은 짓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겉보기와는 달리 성녀는 딱히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심으로는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힘만 주면 탈출할 수 있는 이 상황을 얌전히 받아들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점이 괘씸해서 나는 마지막으로 꾸욱, 하고 성녀의 젖가슴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 느닷없는 충격에 성녀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흐극?! 응, 흐으으읏?!”

흉부를 받치고 있던 팔이 감전이라도 된 듯 단단해지더니, 성녀의 허벅다리가 단숨에 오므려졌다.

내뱉어지는 숨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 옅은 경련이 곧 성녀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하아, 하아, 하고 성녀가 거친 숨을 흐트러트렸다.

슬슬 손을 뗄 때였는데, 남자의 슬픈 본능이 내게 한순간의 망설임을 부여했다.

그래서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소리 없이 병실의 문이 열렸다.

달아오른 열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와 성녀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멍하니 나와 성녀의 시선이 병실의 문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고깔모자를 쓴 갈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서 있었다. 선물로 보이는 과일 바구니가 떨어지며 사과나 배 따위가 땅바닥을 굴렀다.

엘시 선배였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와 성녀가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엘시 선배는 다급히 제 고깔모자를 푹 눌러썼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엘시 선배는 재빨리 등을 돌려 병실을 뛰쳐나갔다. 무어라 변명을 할 사이도 없었다.

내달리는 그 뒷모습이 유독 분해 보였다. 마지막에 흐릿한 물방울이 하나 허공에서 흩어진 것고 같았다.

다시 한 번 침묵. 물론 길지는 않았다.

탁, 하고 성녀의 손이 내 두 손을 쳐냈다. 어어, 하는 사이 성녀는 제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수치와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얼룩진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아직도 옅은 흥분이 감돌고 있어, 결국 성녀는 분기를 가라앉히고 시선을 슬쩍 말았다.

수치심에 젖은 자그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노, 놀랐잖아요. 다음에는 말이라도 해요.”

성녀는 얼굴을 붉힌 채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잰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그 다급한 퇴장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에는 말이라도 하라니?

그렇다면 다음이 있다는 말인가?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던 나는 곧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쓸데없는 착각을 하면 곤란했다.

설령 사실이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숙제는 너무나 많았으니까.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그 무거운 짐.

언젠가 그 짐을 덜어내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되고 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퇴원수속을 마치고 신전을 떠나갈 때까지도, 성녀는 나를 마주칠 때마다 볼에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도 부끄러움을 타기에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다만 나를 치료하는 도중에, 성녀의 몸이 은근슬쩍 내게 달라붙는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물론 나는 이를 착각으로 치부하고 넘겼다.

성녀가 그럴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녀의 몸은 천신이 선사한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신물과 비등한 대우를 받는 성국의 보물인데, 이를 굳이 외간남자와 접촉시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한 몸을 잠시나마 내 손이 범했다니 조금 흥분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무탈하게 퇴원일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간 수많은 병문안이 있었고, 또 신전 밖을 나설 때도 몇 명의 지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외였던 사실은, 그중에 루페시아 영애가 끼어있다는 점이었다.

엠마의 뺨을 날렸다는 이유로 내게 팔다리를 잘린 그녀가 나를 찾아오다니, 별일이었다. 서로 원한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지난번 마수에게 습격당했을 때 도와준 것이 또 재미있는 인연을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루페시아 영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흘깃 무심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결국 새초롬하게 내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퇴원 축하해.”

“감사합니다.”

긴 말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이상의 대화를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다만 내가 루페시아 영애의 곁을 스쳐지나갈 때, 그녀는 내게 한 가지를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엠마는 찾아가 봤어?”

“……?”

내 의아한 눈빛이 루페시아 영애를 향했다. 그야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는 찾아볼 예정이었지만, 그녀가 따로 언급할 정도라면 그럴 만한 사유가 있을 터였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루페시아 영애는,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최대한 근시일 내에 찾아가 봐.”

시답잖기는, 나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루페시아 영애를 지나쳤다. 그러면서도 내심 엠마를 찾아가야겠다는 목표를 가슴에 새겨두긴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눈 여겨 볼 만한 지점은, 내 퇴원을 축하하는 무리 속에 엘시 선배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 나와 성녀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사건을 목격한 이후로는 쭉 그랬다.

고작해야 이틀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엘시 선배가 내게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끙끙 앓고 있던 차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내게 다가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루핀 라이넬라.

엘시 선배의 남동생이자, 나와는 악연으로 묶인 사이였다.

그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안, 페르쿠스……!”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런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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