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05화 (205/649)

〈 205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69)

* * *

나로서는 루핀이 왜 내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고민해봐야 알 수 없는 문제에 골몰하는 취미는 내게 없었다. 곧바로 신경을 꺼버린 나는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루핀.”

반가운 목소리였다. 최소한 내 태도에서 루핀을 향한 적의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예전에 세리아를 괴롭히긴 했지만,그건 내게 한 대 얻어맞은 것으로 봐주기로 했다.오히려 나와는 친밀한 관계인 엘시 선배의 동생이니,나는 나름대로 그에게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루핀의 시선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많이 웃어둬.웃을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일 테니……!”

그러면서 내게 적의를 표하던 루핀은,이내 쿡쿡거리며 음산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음모를 꾸미는 책사라도 되는 양 여유를 되찾았다.그리고 고개를 두어 번 내젓더니,훗,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우리 누나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아,그래.마침 찾아가려고 했는데.기숙사로 찾아가면…….”

“그,그러면 안 되지.미친놈아!”

마침 잘 됐다는 생각으로 내뱉은 말에 루핀은 경악을 하며 나를 만류했다.

내 의이한 눈빛이 루핀을 향했다.

“누,누나는 지금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그런데 다짜고짜 찾아가면 누나 마음이 어떻겠어?”

“어떤데?”

진심으로 의문이라는 듯 묻자 루핀은 일순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가,이내 말을 말자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내게 조언했다.

“그러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내가 준비한 계획이 아직 준비 중이니…….”

그러면서 루핀은 큭큭,하고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떠나갔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쟤.

하지만 남동생인 만큼 나보다는 엘시 선배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나는 다음에 그 루핀의‘계획’이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기로 하고,남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셀린과 레토와는 오랜만에 포옹을 나누었다. 물론, 레토는 그 직전에 퉁명스레 나를 쳐냈지만 말이다.

“꺼져, 남정네 냄새 묻히고 싶지 않아.”

“동감이야.”

덕분에 셀린은 내 품을 독점할 수 있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셀린은,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내게 물었다.

“이안 오빠, 고향은 언제 내려가려고?”

“이제 짐 챙기고 곧 출발해야겠지, 왜?”

그러자 셀린은 후후, 하고 흐릿한 웃음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웃는 셀린의 눈빛은 어딘가 어두컴컴해서, 나조차도 일순 움찔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미리 본가에 허락을 구해놨거든. 여름방학에는 페르쿠스 영지에서 보내겠다고 말이야!”

“……그래?”

그러나 자랑스럽다는 내뱉어진 셀린의 선언에 돌려줄 말이라곤, 담백한 되물음밖에 없었다.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셀린과 레토, 나는 어린 시절과 줄곧 함께 놀았던 사이였다.

당연히 틈이 날 때마다 영지를 오고가며 지내기도 했다. 부모님과도 면식이 있었으므로, 셀린이 당장 놀러온다고 해도 페르쿠스 가문이 당황하지는 않을 터였다.

이처럼 평범한 일에 셀린이 유독 신이 난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내 그러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셀린은 키득거리며 스산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길고 길었어, 원래 이안 오빠는 내 차지였는데… 하지만 방학이 시작되면, 어차피 내 차례야. 후후, 바보 같은 여자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으라지…….”

하여간 셀린은 나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했다.

나는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레토를 바라보았고, 레토는 그럴 만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렇게 셀린의 페르쿠스 영지행이 결정되었다. 참고로 레토는 덤으로 따라오기로 했다.

그 외에는, 유르디나 자매를 빼놓을 수 없었다.

세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내 품에 안겼다. 그 차갑고 도도하던 '유르디나의 싸가지'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최소한 내 앞에서는 그랬다.

델핀 선배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었고, 나는 한동안 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려야 했다.

“세리아,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이안 선배… 흑, 흐으윽…….”

세리아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설움을 털어내듯 한참이나 펑펑 울었다.

그녀의 손이 내 옷깃을 꽈악, 하고 붙잡았다. 세리아가 얼굴을 파묻은 위치가 가슴팍이다 보니 자연스레 내 멱살을 쥐는 자세가 연출되고 말았다.

세리아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안, 흐윽… 이, 이안 선배애…….”

“그래, 그래. 세리아. 왜 그러니.”

평온하게 소녀의 회색 머리카락을 보듬고 있던 내 고개가 훅 잡아당겨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리아가 내 멱살을 쥔 손을 당기며 내 머리가 자연스레 딸려왔다고 표현해야 옳았다.

지금껏 고개를 푹 꺾은 채 울고 있던 소녀의 고개가 치켜들어졌다.

그 짙푸른 눈동자에는, 어느새 음영이 사라져 있었다.

“……왜, 품에서 다른 여자 냄새가 나요?”

섬뜩할 만치 서늘한 음색이었다.

당황해서 주춤거리고 있던 나를 구원해 준 것은, 델핀 선배의 한숨 섞인 만류였다.

“세리아…그게 무슨 무례니.”

그 한 마디에 세리아의 눈동자에 사라져 있던 빛이 되돌아 왔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세리아는, 곧바로 내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달아올랐다.

“아, 앗, 앗… 그, 그러니까 이건…….”

“변명은 됐으니까, 우선 물러나 있으렴. 유르디나의 성을 받은 여식이 하는 행동은 곧 유르디나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다는 점, 명심하고.”

만나자마자 나와 헤어지게 생긴 세리아는 무척 억울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데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인 언니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던 그녀는 이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언니.”

세리아가 물러서자, 델핀 선배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곧 나와 델핀 선배의 손이 마주잡혔다.

“대단해, 결국 또 이겼네? 그 제국 황실을 상대로 말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황실이 아니라 황녀지만요. 왜, 상이라도 줄 마음이 드셨습니까?”

내 농담에 델핀 선배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쿡쿡, 하고 웃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다가선 그녀는, 꿀처럼 진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상품은, 바로 나야. 주인님.”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델핀 선배는 다시금 나와 거리를 벌렸다. 이제 떠나가야 할 시간인 듯했다.

다만 마지막까지도 델핀 선배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입모양으로 내게 한 마디를 남겼다.

'다음에는 벌도 기대하고 있을게.'

벌이라니, 이제는 잘못도 하지 않아놓고 처벌을 요구할 만큼 그녀는 뻔뻔해져 있었다.

또 그 점이 예전의 델핀 선배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날은 그렇게 종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나마 제국 황실의 존재를 잊을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하지만 이 또한 결국 한때의 도피에 불과했다.

밤이 되어 홀로 기숙사 방에 들어서니,다시금 불안감이 나를 덮쳐들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며칠 이내라고 했으니 당장 오늘밤 제국 황실에서 파견한 인물이 찾아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아니,오히려 이틀이나 지났으니 최소한 내일이나 모레쯤에는 접선이 이루어질 터였다.

아무리 제국 황실이더라도 '용혈 문자'만큼 급박한 문제는 몇 없을 테니까.

불길한 마음에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몸을 일으킨 나는, 찬장에 넣어 두었던 위스키 병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한다면,차라리 단번에 술 한 병을 들이키고 기절하듯 잠드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내 정신을 일깨우는 소음이 있었다.

똑똑,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내 의식이 단숨에 현실로 부상했다.얼떨결에 위스키 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나는,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흐드러지는 밤하늘의 빛깔이 보였다.

암청빛 머리카락이었다.뽀얀 피부와 그려진 연회색 눈동자는,그 고귀한 외모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소녀가 누구인지는 고민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제국의5황녀,시엔.

그녀가 홀로 날 찾아온 것이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내 말문이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그리고 이는 소녀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황녀는 나와 눈을 마주하자마자 숨을 들이키더니,그대로 호흡이 멎었다.

마치 소녀의 시간만이 정지한 것처럼.

그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되찾은 황녀는 참고 있던 토막 난 숨을 내뱉었다.켈록거리며 귀여운 기침 소리가 이어지고,이내 소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황녀의 눈동자가 핑핑 돌고 있었다.그녀는 두 손을 내저으며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들었다.

정작 부정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으,그,그게에…이,이안 경!”

하지만 혼란이 영원히 이어지지는 않았다.

횡설수설을 하는 듯하던 황녀는, 곧 결연한 낯빛을 하고 내게 말을 건넸다.

그녀가 나를 찾아온 용건이 밝혀진 것은 그 직후였다.

“죄,죄송합니다!”

쿵, 하고 황녀는 곧장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찌나 거칠게 머리를 박았던지, 황녀가 저도 모르게 '아팟'하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문지르고 말았을 정도였다.

여러모로 비현실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눈빛이 잠시 멍청해졌다.

뭐야,황족이 왜 무릎을 꿇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황녀는 내가 더욱 신경 쓰인다는 듯, 머리를 땅에 박인 채 벌벌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황녀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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