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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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가 머리를 조아리자 곤란해진 쪽은 나였다.
이곳은 기숙사였고, 당연히 나를 제외한 수많은 학생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황녀가 고개를 처박은 곳은 바로 복도였다.
이대로 두었다간 누군가 이 참상을 목격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목격자가 만고에 다시없을 제국의 충신이기라도 하면 끝이었다. 용의 피를 이은 황족이, 고작 시골 자작의 차남 앞에 이토록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다니.
그대로 혈압이 올라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다행이었다. 소문이라도 퍼지면 황녀는 물론이고, 나도 곤란해질 터였다. 물론, 나는 이미 곤란해질 대로 곤란해진 뒤라 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나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복도의 양옆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밤이라 복도를 오고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내 손이 단숨에 황녀의 팔을 붙잡고 일으켰다. 황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게 질질 끌려 방 안으로 들어섰고, 나는 그대로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와 황녀는 외부 공간과 격리되었다.
혈기왕성한 두 남녀가 밀실에 단 둘뿐이다.
의심을 사기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그 어떤 의심을 사더라도 황녀가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을 목격당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황녀도 이제야 그 사실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앗, 하고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더니 슬금슬금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만큼 저자세였다.
“죄, 죄송합니다…….”
황녀의 소심한 사죄에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삼키려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일부러 찾아와 준 사람한테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하물며 황녀와 나는 함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은 사이가 아니던가.
일방적으로 내가 황녀를 구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말이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황녀를 대신하여 침묵을 헤치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황녀 전하, 어째서 이 야밤에 누추한 곳을…….”
“그렇게 예의를 갖추실 필요 없어요!”
황족을 대할 때 귀족이 갖추어야 할 당연한 예우였으나, 황녀는 도리어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젓고 말았다.
그 연회색 눈동자에는 간절함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안 경은 용혈 문자의 소유자이시기도 하고.”
그놈의 ‘용혈 문자’ 타령, 이제는 조금 지긋지긋했다.
왜냐하면 그 용혈 문자 때문에 곧 내게 위기가 닥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원인은 황녀라고 해도 좋았다.
황녀를 구하기 위해 온갖 난리를 치다 보니 결국 용혈 문자까지 들킨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황녀의 죄는 아니었다.
넓게 보면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고, 또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누군가를 탓하기에는 지금껏 걸어온 길에 묻힌 핏자국이 너무 많았다.
“용혈 문자는 딱히 상관없습니다. 사정이 조금 있는데, 어차피 저야 시골 자작가의 차남일 뿐이라…….”
“……그, 그러지 않더라도!”
황녀는 그렇게 다급히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지 않더라도, 이안 경은 제 영웅이니까요… 그리고, 아카데미 선배이시기도 하고.”
그렇게 말을 이어가는 황녀의 얼굴은 울상에 가까웠다.
이대로 내가 계속해서 예를 갖춘다면 눈물이라도 뚝뚝 떨굴 태세였다.
결국 소녀를 울릴 자신이 없던 내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항복의 표시였다.
“……알겠어, 시엔.”
‘시엔’, 그 말을 듣자마자 시엔의 낯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나 내 낯빛은 여전히 떨떠름한 채였다.
페르쿠스 가문은 제국의 귀족이었다. 당연히 그 일원인 내가 황족에게 반말을 하고 있는데 속이 편할 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족과 황족의 위계관계를 교육받은 탓이었다.
최근 들어 내 가치관이 느슨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망설임이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황녀는 그러한 내 기색을 조금 다른 뜻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쩔쩔 매다가, 이내 머리를 다시금 땅바닥에 처박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 여, 여러 가지로 폐를 많이 끼쳐서…….”
“아니요, 괜찮습… 아니, 괜찮아. 그러니까 일어나도 돼.”
순간적으로 다시 존댓말을 쓰려던 나는 급히 어조를 정정했다.
물론 황녀는 이를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 내게 사죄의 말을 반복했다.
“이안 경의 뜻도 모르고, 함부로 사람들을 선동해 누를 끼친 점… 그리고 이안 경의 지인들과 가족들에게까지 폐를 끼친 점, 그 외에도 많은 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줄은 알아요.”
“아니, 딱히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는…….”
“……하, 하지만!”
또 다시 말이 끊긴 내 표정이 더욱 불퉁해졌다.
이 여자,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있는 걸까?
그러나 황녀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말들은 하나같이 절절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돌이킬 수는 없더라도, 최대한 그 죄를 씻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이전의 무례, 제가 저지른 잘못. 진심으로 사죄드려요.”
나는 그만 몸을 일으키라고 한 마디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긴장으로 파르르 떨리는 황녀의 몸은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그 이전에 얼핏 외로운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한때 모든 이들에게 미움 받았던 여자아이.
어머니에게도 목이 졸려, 죽을 위기를 넘긴 그 소녀는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왔을까.
그러자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던 혀가 주춤했다.
어쩌면 황녀에게는 낯선 경험일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그녀를 구해주려고 희생을 자처했다는, 이토록 뻔한 이야기야말로 황녀가 바라던 그 모든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잃기 두려울 것이다.
황녀가 내게 보이는 집착, 그리고 과도한 저자세가 그 공포를 대변하고 있었다. 함부로 그 노력을 폄훼하기에는, 내 마음이 그만큼 모질지 못했다.
결국 가까스로 떨어진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아주 짧은 토막에 불과했다.
“……그래라.”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사실 황녀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오해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었고, 그러므로 이미 말했듯이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용서하더라도 황녀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했다.
어디까지 할지는 모르겠으나, 황녀가 하고 싶은 데까지는 하도록 두는 편이 맞았다. 그러한 마음이 담긴 대답이었다.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황녀의 몸에 일던 옅은 떨림이 잦아든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그녀가 내쉰 안도의 한숨이 귓가를 간질이며 지나갔다.
그럼에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황녀의 모습이 부담스러운 것은 여전한 사실이라,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만류해 보기로 했다.
“자, 알겠으니 이제 슬슬 일어나시고…….”
“아, 아직!”
황녀의 목소리는 아직 갈증에 젖어 있었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어디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허락을 내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결국 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의 심정으로 황녀가 무슨 짓을 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황녀는, 무언가 계획하고 있던 것을 떠올렸는지 탄성을 내질렀다.
“아직, 충분하지 않아요. 그, 그러니까… 맞아!”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사고가 정지했다. 잠시 동안 황녀가 한 짓을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황녀는, 그 자세 그대로 엉금엉금 기듯이 내게 다가왔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치를 동반하는 일이었는데, 그녀는 그 즈음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대로 내 발 끝에 입을 맞춘 것이다.
단 한 마디로 수많은 일을 이룰 수 있는, 고귀한 황족의 입술이었다.
지금껏 때 묻지 않도록 많은 심혈을 기울였을 터였다.
그 순백의 눈과 같은 입술이, 첫 번째 접촉을 더러운 신발 끝에 허용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내 정신이 곧장 아득해졌다. 아니, 아득하다 못해 나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고 말았다.
“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황녀 전하!”
그만두기로 했던 경어까지 되돌아 올 정도였다.
내 격한 반응에 황녀는 도리어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쑥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내게 말했다.
“그, 예전에 이안 경께 제 발끝에 입 맞추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에헤헤, 그 사죄의 의미로…….”
물론 그 제안이 다소 무례하긴 했지만, 이는 귀족이 황족에게 취할 수 있는 예이긴 했다. 당장 신하가 황제에게 충성을 표하는 최고의 예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황족이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게 취할 자세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다시 한 번 낯가죽을 쓸어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황녀에게 나는 어떤 존재로 각인되어 있는 걸까.
아무래도 소녀의 마음이 풀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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