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07화 (207/649)

〈 207화 〉 3. 용의 눈, 인간의 마음(71)

* * *

시엔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이안 경과의 대면이었으나, 그 이상으로 떨리고 긴장되는 심정이었다. 가지각색의 불안과 걱정이 새벽녘의 어스름처럼 피어올랐다.

만약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면 어떡하지?

이미 지난 ‘중앙대로 황족 폭행 사건’에서 이안의 진의를 느꼈던 시엔이었다. 그럴 리는 없으리라고 내심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한 줌의 불안감이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정작 이안을 대면한 뒤에는 실수가 잦았다.

깜짝 놀라서 시엔은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지 이안을 향한 미안함을 최대한 표현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것이 조금 과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을 때는, 이안의 발에 입을 맞춘 직후였다.

물론 시엔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굴욕적이고 수치스럽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랬다. 하지만 이안은 용혈 문자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시엔은 이안에게 더 나쁜 짓을 저질렀다.

그 정도 굴욕과 수치쯤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었다.

이안에게 지은 죄를 씻어내는 과정 중 하나였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단숨에 잘 풀려가던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 어색한 분위기에, 몸을 일으킨 시엔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안의 눈치만 살펴야 했다.

아으, 난 바보야…….

조금 더 점진적인 방식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서 그러지 못했다. 이안에게 잘 보이려던 본래의 목적은 이미 좌초된 듯 보였다.

시엔은 금세 화색이 돌았던 것처럼 금세 풀이 죽고 말았다.

침묵 끝에 내뱉어진 이안의 한 마디는 치명타였다.

“……원래 그렇게 눈치가 없습니까?”

명백한 타박에 시엔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머뭇거리던 시엔은, 결국 또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려 들었다.

“죄, 죄송……!”

“아니, 그러지 마시고.”

크흠, 하고 이안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 ‘눈’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람의 심리를 잘 읽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시엔은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알고 있었구나.

하기야 용혈 문자의 소유자라면 황제의 최측근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비사를 알고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시엔은 무심코 제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이 연회색의 눈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힘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안과의 충돌로부터 시작된 2주간의 사건은 시엔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원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느닷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에, 이안은 침음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가 나오리란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이 ‘눈’으로 보다보면, 종종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이거든요. 주로 사람들의 욕망이죠. 그만큼 강렬한 색채를 가진 감정이 없으니까요.”

시엔이 자연스레 감정을 ‘색채’에 빗대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엔이 지닌 ‘용의 눈’에는 감정이 색채로 보였다. 어린 시절처럼 타인의 심리를 모두 읽어낼 수는 없지만, 여전히 시엔의 눈에는 감정이 읽혔다.

그러다 보면 당연히 가장 짙은 색채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지닌 가장 본질적인 감정은 바로 ‘욕망’이었다.

“간단한 일이죠. 일단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적당히 그 감정에 발 맞춰주면 돼요. 적의가 호의로, 악의가 선의로 뒤바뀌는 일도 드물지 않거든요. 그렇게 잘난 맛에 살고 있었어요.”

시엔의 입가에 걸린 고소가 처량해졌다.

소녀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체 하며, 씩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죠. 이안 경을 만난 다음부터 깨달았아요. 사실, 저 눈치 없어요. 지금까지는 보기만 하면 다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눈을 믿기가 힘들어졌고…….”

그렇게 말을 이어가던 시엔은 주섬주섬 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그마한 주머니였다.

고개를 푹 숙이며, 사의(??)를 표하듯 내밀어진 주머니를 이안을 얼떨떨한 기색으로 받아들었다.

가벼웠다. 훌쭉한 주머니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황녀가 성의를 보이는 물건인 만큼 범상한 주머니는 아닐 터였다.

이안은 슬쩍 주머니의 입구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공간 확장 주머니군요.”

“네, 지난번에 보니 이안 경께서 전투 중에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 많으시길래… 그, 그리고 안에 하나 더 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이안의 손이 주머니 안쪽을 툭툭 털어냈다. 그러자 그 안에서는, 큼지막한 묘안석이 하나 툭 떨어져 내렸다.

연회색의 묘안석.

시엔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물건이었다.

시엔이 조금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미 아시겠지만, 어머니가 남긴 물건이에요. 그동안은 처분하지 못했거든요. 지금까지는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이제 알겠어요.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걸.”

이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연회색의 묘안석을 바라보았다.

상등품이었다.

색도 특이했고, 크기도 크니 단순한 금전적인 가치로 환산해도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하물며 황후가 지니고 있었을 정도라면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감사를 표하기 위한 선물치고는 지나치게 컸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겪은 사건은, 시엔에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자꾸 저를 괴롭히고 있었던 거죠. 인간을 믿지 못하고, 그래서 오해해서 괴롭히고… 이대로 가다간 평생 후회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안 경이 받아주세요.”

이안의 침묵은 길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제 끝났구나.

드디어 지난날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모녀 사이는 천륜지간이라, 그동안 마지막 미련을 털어낼 수 없어 간직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한때 어머니는 시엔의 유일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안도 있고, 마침 그날의 아픔에서 벗어날 계기도 생겼다. 그래서 조금 안타깝긴 했으나 괜찮았다.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한 시엔의 입가에 다시 쓴웃음이 떠올랐다.

한동안 말이 없던 이안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사람의 심리와 감정이 꼭 일치합니까?”

“네?”

느닷없는 질문에, 시엔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무슨 소리를 하냐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오랜 고민을 토로하듯 이안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상해서요. 때때로 자기 마음도 모르는 것이 사람인데, 어떻게 한 가지 심리와 감정으로 인간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런가요?”

뜬금없는 주장이었으나 이안이 말하니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시엔은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수많은 감정을 느껴보았지만 그것이 단일한 색채로 나타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보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색채로 인간의 감정은 드러난다.

지금껏 인간을 믿지 못했던 시엔은, 그것이 일종의 가식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강렬한 색은 언제나 욕망의 몫이었으므로.

“색채가 덜하다고 해서 그 감정이 거짓은 아닐 겁니다. 심리도 마찬가지죠. 한때는 어떤 생각을 품을 수도 있지만, 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거든요. 그렇게 모순적이고, 복잡한…….”

이안은 그러면서, 묘안석을 한 번 공중에 던졌다가 받았다.

그 묘안석을 투과하며 일렁이는 광경들이, 시엔의 어린 시절을 비추었다.

시엔을 괴롭히던 나쁜 사람들.

그러나 한때는 사랑했던, 좋은 사람들.

태어났을 때부터 시엔은 인간의 심리를 읽으며 자라왔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의 추레한 모습까지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나쁘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타인의 심리를 들춰내지 않았던가.

불현듯 시엔의 뇌리를 한 가지 의문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왜, 나는 어쩌다 그들을 모두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을까.

“……제가 만난 어떤 고아원장도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이안은 한 걸음을 내딛었다. 시엔은 흠칫 몸을 굳힌 채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다.

그것이 무엇의 전조인지 알고 있을 텐데도, 이안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저도 그렇고.”

그 말을 신호로 시엔의 시신경에 온갖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감정의 파도였다.

이처럼 상대의 감정이 극적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이는 아마도 상대가 심리를 읽히는 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기 때문일 터였다.

시엔의 힘을 모르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제 진심을 숨기려 든다. 하물며 시엔의 힘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껏 그 장벽을 허물어트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안은 그 본능적인 거부감을 의도적으로 가라앉혔다. 수많은 색조들이 번져 나가며 세상이 총천연색의 향연을 이루었다.

그것은, 시각적 혁명이었다.

무채색으로 물들어있던 대기가 화려한 빛깔로 물든다.

물에 물감이 퍼져나가듯, 하나둘씩 번져 나가는 색채가 너무나 깨끗하고 다양해서 시엔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진정한 ‘감정’이란 말인가?

그 색조에는, 밝고 아름다운 감정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어둡고 우울한 감정 또한 함께 시야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엔은 그것이 조금도 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름다웠다.

소스라치도록 절절히 그 진심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아마도, 전하의 어머님께서도 그러셨을 테죠.”

시엔의 눈동자가 멍하니 이안을 향했다.

두렵지 않은 걸까.

누구나 제 진심을 내보이는 것은 무섭다. 시엔이 여태껏 보아온 모든 인간들이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으며, 또 스스로도 그랬다.

그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숨김없는 진심이란, 이토록 아름다운 색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추하고 어두운 빛깔마저 그 조화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먼 옛날, 용은 인간을 유독 사랑했다.

그들이 어째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었는지, 시엔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안의 질문이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제 마음이 어때 보입니까?”

울컥, 하고 소녀의 눈시울이 붉어져 왔다. 울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시엔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속으로 읊조렸다.

단지 그녀는 가까스로 한 마디를 짜냈다.

이 또한 숨김없는 시엔의 진심이었다.

“……모, 모르겠어요.”

너무나 많은 색이 보여서, 도리어 알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을 듣자마자 이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이안은 탁, 하고 제 손에 들려있던 묘안석을 다시 시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 선물입니다.”

연회색 묘안석은 그렇게 시엔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엔은 그 묘안석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힘겨웠다. 다시 보석을 받아든 시엔의 손이 덜덜 떨렸다.

울음을 애써 억누르면서, 시엔은 물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안의 눈동자가 물끄러미 시엔을 향했다.

그는 인내심 있게 눈물 많은 소녀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어, 어머니한테… 흐윽, 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소녀는 물었다.

오랜 시간 미워하고, 파묻어 왔던 어머니에 대한 애증이 새록새록 살아나 시엔의 사고를 헝클어트렸다.

눈물 한 방울이 소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는, 담백한 대답을 내놓았다.

“일단 찾아봬야죠.”

“하, 하지만…….”

“제가 함께 가드리겠습니다.”

시엔의 숨소리가 일순 멎어버렸다.

이안이 그렇게 말하며, 묘안석을 든 시엔의 두 손을 감싸쥐었기 때문이었다.

그 따스한 감촉에 소녀의 심장이 다시금 고동치기 시작했다.

시엔은 제 눈으로 스스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솟구치는 이 감정의 정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나중에, 꼭.”

소녀는 그 짧지만 단단한 약조를 믿어 보기로 했다.

결국 시엔은 울면서 웃고 말았다.

처음으로, 무척이나 슬프고 행복하게.

“……네.”

용의 눈을 가진 소녀는, 그날 인간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

황녀가 떠난 방은 적막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위스키를 들었다. 그리고 잔을 가득 채운 뒤, 망설임 없이 식도에 퍼부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마지막에 소녀가 눈물범벅으로 지은 미소가 떠올라서, 나는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아직 용혈 문자를 비롯한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껏 걸어온 길이 나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어린 시절의 악몽에 갇혀 있던 소녀 하나를 웃게 만들었으니까.

다소 즐거운 심정으로 술을 들이키다 보니 어느덧 취기가 잔뜩 오르게 되었다. 무심코 미래에서 온 편지를 꺼내든 내 눈동자가, 그 뒷면에 적힌 문장을 비추었다.

‘용의 눈을 가진 자는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술기운이 오른 김에, 그 뒷면에 적힌 글자에 또 한 문장을 덧붙였다.

‘하지만 소녀는 아니다.’

짧은 문장, 멋들어진 수사조차 없는 담백한 글자에 불과했다. 글 솜씨도 없는 만취한 검객의 한계였다.

하지만 써놓고 보니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어,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다 잠을 청했다.

이제 곧 제국 황실의 고위 인사가 도착할 터였다.

그럼에도 내 가슴은 놀랍도록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술에 취할수록 감각은 무뎌지고, 감정은 잔잔해진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은 그 다음 순간.

헐떡이면서 다시 눈을 뜨니, 아직 새벽녘이었다. 술기운이 조금 부족했는지 심장이 거친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시금 술잔에 위스키를 따르던 내 눈에, 잠들기 전 탁자에 올려두었던 편지가 들어왔다.

두 문장이 연이어 이어진 그 뒷면에 또 하나의 문장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럴지도.’

그 휘갈겨 써진 짤막한 문장이 사내의 성미를 드러내는 듯해서, 나는 피식,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위스키를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거나하게 취해 잠이 들었다.

그날은 꿈을 꾸었다.

묘하게 생생한, 어느 사내의 꿈.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거친 숨소리와 함께뜨인 내 눈이, 곧장 머리맡의 탁자 위를 향했다.

어느덧 지나가 있는 달력의 날짜, 처음 보는 편지봉투가 하나.

이제는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하.”

나는 뇌를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편지봉투를 집어들었다.

욕할 기운조차 없었다.

세상을 뒤흔들 새로운 사건의 시작이었다.

* *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