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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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롱한 정신의 틈새로 낯선 기억이 파고든다.
메마른 진흙이 물을 머금듯 풍경이 빠르게 메워졌다. 새하얗던 시야가 질감과 양감을 갖추고 있었다.
기묘할 만치 생생한 꿈의 시작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울창한 숲,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숨이 턱턱 막히는 습기가 느껴졌다. 온 대륙을 찾아보더라도 이러한 기후의 장소는 단 하나뿐이었다.
남부 열왕국의 대수림.
수많은 독충들과 괴물들, 그리고 고대 악신의 유적들이 남아있는 험지였다. 심지어 그 심부에는 ‘흡혈귀’와 그녀가 이끄는 마수들이 수두룩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두 종류뿐이었다.
수련을 위해 고행을 자처하는 수행자들과, 모종의 사정으로 사회에서 쫓겨난 화전민들이 이곳에 살아가는 인구의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존이 힘든 금지(??)라고 해도 안전한 장소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대수림에 살아가는 이들 중 주로 수행자에 속한 인물들이 집단을 이루면, 그곳은 일종의 전초기지로 기능하기도 했다. 홀로 살아가기에 대수림은 너무나 험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대수림을 지켜야만 했다.
대수림에서 살아가는 마수들은 하나같이 강인하고 잔혹하다. 그 괴물 중 일부만이라도 주변으로 새어나갔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 뻔했다.
하물며 대수림의 최심부에 존재한다는 ‘흡혈귀’가 외유라도 나간다면 큰일이었다.
지난 수백 년간 ‘흡혈귀’를 토벌하려는 시도는 수도 없이 있어왔다. 그러나 번번이 인류는 패배의 쓴 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만큼이나 강한 마수였고, 또 마인이었다.
그녀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강자가 필요했다.
그 역할을 도맡아 온 것이 남부 열왕국의 국사(國?)라 불리는 ‘대마녀’였다.
대륙에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는 마스터 중 하나인 대마녀는 수백 년 동안이나 대수림을 지켜왔다. 그 기나긴 역사 속에서 대마녀는 그저 조용히 은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마녀쯤 되는 인물은 마치 밤에 뜬 태양과도 같다.
그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는 대마녀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수수께끼를 들고 찾아온다.
또 누군가는 대마녀를 흠모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이야기를 나누기를 청했고, 몇몇 사람들은 대마녀의 제자가 되어 대수림에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험난한 대수림의 안전지대를 이루는 핵심이 되는 존재들은 그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대마녀의 제자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그곳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대수림의 경계를 수호한다.
애초에 겉으로 드러나기를 좋아하지 않는 대마녀였다.
당연히 제자를 모집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일단 제자가 되면 그중 절반 이상은 뛰어난 성취를 얻고 세상으로 돌아가곤 했다.
대마녀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마녀의 거처에 방문해야 했다.
대수림의 모처에 위치한 대마녀의 거처를 찾아가는 일은 모험에 가까웠다. 십중팔구는 발걸음을 돌리거나 죽음을 맞이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마녀의 제자가 되기를 염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십 년만에 대마녀가 제자를 모집하는 소식이 느닷없이 알려졌다.
수백에 이르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대수림에 도착해 대마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허나 그중에서 제자로 선발된 것은 오직 스물 남짓뿐이었다.
수많은 난관과 시험을 돌파하여 대마녀의 제자가 될 기회가 잡은 선택받은 이들.
그중에서도 대제자로 선택받은 인물은, 의외로 특별한 장점도 단점도 없는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지닌 사내였다.
그는 나무토막을 앞두고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이마를 훔쳐도 흐르는 땀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의 손에는 손도끼가 하나 들려있었다. 본래 한 손으로 쥐어야 할 자루에는 두 손이 모두 얹어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장작 하나를 패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사내가 후우,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낯빛으로 나무토막을 노려보더니, 이내 전력을 다해 손도끼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칵,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나가는 나무 조각.
결국 사내는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아니, 이런 썅!”
욕지거리와 함께 팍, 하고 손도끼가 땅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그가 얼마나 많이 참고 있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실, 어디를 가도 대접받는 아카데미 졸업생이 장작 하나 못 패는 수모를 당할 일이 드물기는 했다.
하지만 사내에게도 변명거리는 남아있었다.
그가 곧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도대체 왜 세계수를 장작으로 쓰고 있냐고!”
그랬다.
지금껏 사내가 패려고 끙끙거리던 장작은, 사실 세계수의 가지였다. 북방으로 쫓겨나간 엘프들이 본다면 입에 거품을 물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대수림의 중앙에 위치한 세계수는 그 가지가 곳곳에 뻗어 있었다. 대마녀의 거처가 위치한 곳도 그 가지가 뻗어 나온 곳 중 하나였다.
‘세계수’는 그 거창한 이름답게 우수한 소재로 통했다.
세계수의 잎사귀는 강력한 치유 효과를 지니고 있었으며, 가공하기에 따라 희귀한 마법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수액이나 가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귀한 세계수의 가지를 고작해야 장작으로 쓰고 있다니.
대륙에 굶어죽고 있는 고아들이 수두룩한데 참으로 개탄스러운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사내가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는데, 곧 옆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야, 적당히 하자… 너만 힘드냐?”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흘깃 그 핀잔의 진원지를 향했다.
그곳에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열심히 부채로 불을 피우려 노력하고 있는 자그마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고깔모자가 인상 깊은 그녀의 눈동자가 퀭했다. 이미 오랜 시간 고생했다는 뜻이었다.
이제 핏발마저 서고 있는 그 블루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보며, 사내는 혀를 쯧쯧 찼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다고 불이 붙겠습니까? 마른 장작도 아니고 세계수인데.”
“……안 그래도 빡도는데, 네까짓 게 내 신경을 긁어?!”
그 도발에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강아지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나, 나는 전기 원소 전문이라고! 이딴 건 당연히 불 원소 전문한테 시켜야 하는 거잖아!”
“우리 추하게 핑계는 대지 맙시다. 그럼 제 주무장은 손도끼겠습니까?”
담백한 사내의 반론에 소녀는 고개 숙인 채 몸만 부르르 떨었다. 이내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눈동자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자그마한 손에 파지직, 하고 전하가 맺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좆밥 새끼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 내가 아주 만만하지, 응? 뇌수부터 말초신경까지 아주 짜릿하게 구워줄까, 이 씹……!”
“스승님께 이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소녀의 위협은, 단 한 마디에 제지당하고 말았다.
사내의 태평한 목소리에 소녀의 몸이 흠칫, 하고 굳어버렸다. 그러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야, 야, 야! 사내 새끼가 부…부끄럽지도 않냐?! 무, 뭐만 하면 일러바친대!”
노골적으로 곤혹스러운 기색인 소녀와 달리 사내는 심드렁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그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자 간의 위계를 세우는 일에 제 자존심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아픈 마음이지만, 이제 슬슬 받아들이셔야죠. 사매, 앞으로는 사형이라 부르며 꼬박꼬박 존대를…….”
“아, 아아아아아! 안 들린다! 안 들려!”
소녀는 곧장 귀를 틀어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두 손이 귀를 막았다 떼며 개폐운동을 반복했다. 얼핏 보기엔 어린아이가 떼쓰는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사내는 조금 질렸다는 표정마저 지어 보였으나, 소녀는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곧 몸을 일으키더니, 비틀비틀 걸어 쿡, 하고 사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며 말했다.
“그, 그러고 보니 너도 아카데미 출신이라며? 야, 임마. 아카데미에서 선배였으면 영원히 선배인 거야… 씁, 어디서 나한테 맞먹으려 들어?!”
“그 말, 그대로 스승님께…….”
“……아아악! 뭐만 하면 그놈의 스승, 스승, 스승!”
짜증이 극에 달해 부르짖는 소녀의 외침에, 사내의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소녀는 그 기회를 거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너는 짜증 안 나냐?! 내가 제자 돼서 가르침 받으러 왔지, 무슨 하녀 노릇이나 하러 온 줄 알아? 하는 일이라곤 매일 청소에, 불붙이기, 식사 준비하기!”
흠, 하고 사내의 손이 턱을 쓰다듬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기색이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던 소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사내를 꾀어댔다.
“너도 그렇잖아, 무슨 씹… 어떤 또라이가 굳이 세계수를 장작으로 쓰겠다고 이러고 있냐고. 심지어 주무장도 아니고 손도끼로 패라니! 이거 그냥 괴롭힘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대마녀쯤 되는 인물이 그럴 리는 없었으나, 사내는 그 설득에 조금 혹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오랜 시간 헛짓거리를 해왔던 탓이었다.
세계수를 장작으로 패라니, 그것도 검 대신 손도끼를 들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지시였다.
사내의 침음이 깊어지자, 소녀는 더욱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내가 볼 땐, 그 할망구 오래 살다 보니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 솔직히 수백 년이나 이 숨이 턱턱 막히는 곳에서 살다보면…….”
“살다보면?”
“당연히 미쳐, 버리… 거나?”
되돌아온 맞장구에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가려던 소녀는, 반문하는 목소리가 여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부릅떠진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뒤편을 향했다.
그곳에는, 어느새 사내와 소녀의 등 뒤를 점한 여인이 하나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동자를 지닌 꼬마아이였다. 얼핏 보기에는 10대 중반쯤으로 보였지만, 그 정체는 수백 년이란 시간을 지새운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대륙의 단 셋뿐인 마스터, 모든 이들이 그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이렇게 부른다.
‘남부의 대마녀’.
소녀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든 말든, 대마녀는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 담배에서 후, 하고 연기를 내뱉을 뿐이었다.
가까스로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짜냈다.
“스, 스승님… 그, 그러니까 이건… 사, 사형이 저를 도발해서!”
“웃기지 마라.”
필사적인 변명이었으나 대마녀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한 번 퉁겼을 뿐이었다.
그러자 번쩍, 하고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더니 벼락이 지상에 내리꽂혔다.
콰지지지직, 하고 마구잡이로 튀어 오르는 전하가 그 위력을 암시하고 있었다. 전기 원소를 다루는 고위 마법사라고 해도 견딜 수 없는 수준이었다.
소녀의 입에서 자연스레 비명이 내질러졌다.
“꺄, 꺄아아아아악!”
한참 동안이나 소리를 내지르던 소녀는, 곧 풀썩 땅바닥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몸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그럼에도 대마녀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쯧, 엄살하고는.”
그러면서 대마녀의 연녹색 눈동자가 사내를 향했다. 그때까지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던 사내는, 단지 그 시선을 마주했을 뿐인데도 몸을 움찔 떨었다.
대마녀는 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네?”
의외로 상냥한 대우에, 사내는 멍하니 반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마녀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들고 있던 파이프 담배로 탁탁, 하고 제 팔을 내리치며 그녀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네가 하고 있는 짓, 쓸데없다고 생각하냐고.”
“그, 그게 말입니다…….”
차마 스승 앞에 거짓을 고할 수 없던 사내는, 더듬거리며 답을 유보했다. 그러자 알 만하다는 듯 대마녀는 또 한 번 코웃음을 쳤다.
탁, 하고 그녀가 손가락을 퉁기자 사내가 내던졌던 손도끼가 둥실 떠올랐다.
“딱 한 번만 보여줄 테니, 잘 봐라.”
내가 느닷없는 의문을 품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오늘따라 꿈이 길었다.
너무나도 길어서, 그러한 생각을 품은 순간 내 의식이 단숨에 부상하다 가라앉았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이 꿈을 지켜보고 있지?
부유하던 시야가 내려앉았다. 점차 좁아지던 시야는 점점 더 사내를 지워갔다. 그리고 어느덧 내 눈망울에 가득 비치고 있는 광경은, 대마녀와 허공을 부유하는 손도끼뿐.
시야가 동화되고 있었다.
사내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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