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09화 (209/649)

〈 20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

* * *

어느덧 나는 꿈속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머리가 아프다. 알 수 없는 기억과 감정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 세상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물질도, 정신도, 그 무엇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적인 질서지. 내가 깨달은 세계의 진실도 그 안에 있고.”

떠오른 손도끼가 어느덧 정점에 섰다. 그 아래에는 세계수의 가지 토막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갈라지지 않던 그 단단한 목재를, 도끼날이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도끼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갑작스레 도끼가 시야 속에서 강조되는 감각, 오감이 일제히 곤두서며 위기감을 알렸다.

저 손도끼는, 위험하다.

“그 흐름 앞에서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 바로 ‘결(?)’.”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하늘에서부터, 새하얀 빛살이 내리꽂혔다.

위력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다. 허나 그 수직의 궤적을 보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고 말았다.

마치 세상이 쪼개지는 듯하다고.

“그리고 그 흐름을 파헤치는 것이, 바로 ‘해(?)’다.”

팔짱을 낀 채로, 대마녀는 다시 파이프 담배를 꼬나 물었다.

얼마 전까지 어려 보이기만 하던 여인이 한없이 커 보였다.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이 자는 강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세상을 찢어발기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앞으로 네가 통달해야 할 기술이지.”

후우, 하고 내뱉어지는 담배 연기를 맡으며 내 정신이 다시 몽롱해졌다.

그제야 내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신 차려.”

무슨 말일까,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흐릿했다.

나는 이대로 기절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시금 눈을 감고, 의식의 밑바닥으로 침전하려던 그 찰나.

우득, 하고 내 어깨를 부여잡는 강인한 손길이 느껴졌다. 일순 뼈가 부러졌다고 느낄 만큼 억센 악력이었다.

나는 비명을 억누르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가.

“정신…차리라고 하잖아!”

나를 내동댕이치듯이, 꿈의 바깥으로 내팽개쳤다.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뜬 것도 그 무렵이었다.

헐떡이면서, 나는 재빨리 더듬거리며 수통을 찾았다. 그리고 찬물을 벌컥벌컥 식도에 퍼부으며 주위를 살폈다.

예상대로였다.

달력의 날짜는 멋대로 넘어가 있었고, 머리맡의 탁자 위에는 낯선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숙취를 닮은 두통이 머리를 덮쳤다.

그 통증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당장이라도 다시 잠을 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새로 도착한 편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한숨을 내뱉은 내 손이 망설임 없이 편지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동글동글한 필체로 쓰인 줄글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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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사랑하는, 나의 이안 페르쿠스에게

사랑하는 주인님, 말씀하신 대로 편지를 써요.

오랜만에 잡는 펜이라 낯선 느낌이 들어 조금 무섭기도 해요. 어린 시절부터 글에는 재능이 없었거든요. 그렇다 보니 주인님한테 하고 싶은 말도, 전하고 싶은 감정도 제대로 전할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되네요.

음, 편지에는 어떤 말을 써야 할까요?

사랑한다는 말은 이미 너무나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글자로쓴다고 해서 그 마음이 그대로 전해질지 의문이에요.

주인님의 품에서 속삭이는 말만큼이나, 편지가 애절해질 수 있나요?

아마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진심이란 몸에서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표정, 눈빛, 목소리, 그리고 당신을 향하는 그 모든 감각들이 사랑을 말하고 있을 때야말로 제 진심을 전할 수 있겠죠. 그러니 오늘은 조금 일상적인 이야기를 써놓으려고 해요.

얼마 전에 제 남동생 루핀이 방문해서 밥을 함께 먹은 적이 있답니다.

참, 루핀은 제국 황실의 마도국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전투직은 아니고, 연구직으로 들어갔는데 최근에는 늘 야근뿐이라네요.

마법학부 대학원을 졸업하면 자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대학원에 입학한 순간 이미 늦은 뒤였던 거죠.

연구직에게 있어 자유란 없으니까요. 유일한 방법은, 대학원에 돌아가서 박사 학위를 따서 교수가 되는 길뿐.

하지만 그곳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며 엉엉 우는 꼴이 볼 만했습니다.

여전히 하찮고 귀여운 동생이죠? 유일한 걱정이 있다면 아직도 주인님께 다소 건방지게 군다는 점인데, 또 그런다면 척추를 바싹 튀겨버리려 벼르고 있어요.

누가 뭐래도 당신은 제 소중한 주인님이니까요.

아무리 남동생이라 하더라도, 주인님만큼은 소중하지 않아요. 그날 이후로 제 인생의 첫 번째는, 늘 주인님의 몫이라고 정했잖아요.

그 누구의 의지도 아니라, 제 의지로.

그리고 또 루핀이 혹시 아이를 낳을 계획은 없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손사래를 치긴 했지만, 음.

각오는 끝났어요.

주인님이 원한다면, 언제든 아이를 가질 생각이에요.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지금은 주인님이 없어 쓸쓸하지만, 아이들이 있으면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설령 주인님이 없더라도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으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겠죠.

주인님과 제 아이니까, 분명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태어날 거예요.

또, 아이를 낳으면 페르쿠스 영지에 들러야겠죠? 그해 여름에는 페르쿠스 영지에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저를 귀여워 해주시는 시부모님께 무척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죠.

연달아 사라지는 사람들과, 암흑사제와, 그리고 신화 속에서나 보던 악신의 권속.

사실 한때는 끝장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 주인님께서 기지를 발휘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두 실험체가 됐을지도 모르죠.

그해 여름에 알게 된 진실이 너무 많아요.

페르쿠스 가문에 대한 것도, 암흑교단에 대한 것도, 그리고 주인님에 대한 것도.

어떨 때는 그 비밀의 무게가 무겁기도 했지만, 결국 주인님이 있기에 이겨낼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주인님.

아니, 내 사랑 이안.

사실 무섭고 힘들었어요. 늘 강한 척했지만 약하고 겁 많은 계집애였으니까, 그래서 그날도 도망치고만 싶었거든요.

가문에서든, 악신의 권속으로부터든, 그 어디에서라도.

하지만 당신이 있기에 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제 평생을 당신께 바칠 이유는 충분해요.

제 삶을 되찾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앞으로도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을 약속할게요.

참, 내일은 집에 돌아오실 거죠?

그렇다면 그 전에 한 번만 더 고민해 주세요.

우리들의 아이 말이에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멍멍.

추신 1: 그 집착녀가 아란코트로 떠났다면서요? 벌써부터 주인님을 보고 싶다고 아우성이겠네요. 바보 같은 년.

추신 2: 곧 성국에서 그 미친년이 찾아온다는데, 주인님만큼은 기필코 제가 지켜낼게요.그러니까 집에서 나오지 마세요!

추신 3: 최근 제국 황실에 방문하는 일이 잦으시다고 들었어요. 물론 누구를 지칭하고 싶지는 않은데, 참 뻔뻔스러운 여자가 다 있네요. 예전에 주인님께 그 짓거리를 해놓고 아직도 그러고 있다니? 웃다가 헛구역질을 할 뻔했습니다. 다음에 보이면 가만 안 둘 테다.

From. 주인님의 충견이자 연인, 그리고 유일한 사랑으로부터.

제국력 571년 지팡이의 달 서른 번째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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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같은 소리 하네.”

그 호칭만 들어도 누구한테 온 편지인지 대략 짐작이 가서,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도대체 미래의 나는 얼마나 많은 여자와 엮인단 말인가.

내 지친 눈빛이 달력을 훑었다. 오늘따라 눈에 띄는 점이 하나 있었다.

고작해야 날짜가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즉, 내가 기억을 잃은 기간이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늘 일주일 동안 기억이 없던 것에 비하자면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다음 사건이 벌어질 곳은 내 고향 페르쿠스 영지인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욱 애가 닳았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나 또한 내 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페르쿠스 영지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다. 그런데 그곳에 암흑 사제와 악신의 권속이 강림한다니.

어서 정보를 수집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쉴 틈도 주지 않고 편지를 보낸다는 불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장이라도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만 사건의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곧장 걸음을 내딛으려던 내 눈에, 문득 휘갈겨 쓴 문장 하나가 들어왔다.

늘 그렇듯 짤막한 글귀였다.

‘버릴 것은 버려라.’

짧지만 강렬한 조언이었다.

그 꾹꾹 눌러쓴 글자에 피와 땀이 배어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것은 사내가 흘려왔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제부터 흘려야 할 것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잠시 움푹 깊어진 눈빛으로 그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내 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도장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도장을 집어들었다. 애초에 품 속 주머니에 이토록 작은 물건을 느슨히 넣어둔 적도 없을뿐더러, 난생 처음 보는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도장의 문양을 확인한 순간, 나는 또 다시 침묵하는 수밖에 없었다.

용이었다.

온 대륙을 통틀어 용을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를 제외한 집단은, 용과 관련이 있더라도 감히 용을 상징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갖춘 곳이었으니까.

제국 황실.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찾아온다고 했었다.

제국 황실의 고위 인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미래에서 온 내가 제국 황실에서 파견된 인물을 만났다.

다만 걸리는 점이 하나 남아있었다.

"……왜 인장에 피가 묻어 있어?"

우선 그 자세한 사정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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