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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10화 (210/649)

〈 21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

* * *

새벽녘의 아카데미는 한산했다.

아카데미의 재학생들은 저마다 개인 훈련 일정을 잡는다. 당연히 이른 아침이라고 해서 잠을 청하고 있는 이들은 드물었다.

아무리 가진 바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봐야 이곳은 아카데미였다.

각지의 수재들이 모인 곳이었고, 하루를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인간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겐 고요한 아침을 맞이한 아카데미의 풍경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귀향길에 오르는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많아졌다는 증거였다.

인적 없는 중앙대로를 산책하는 것은 희귀한 경험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약 2년 6개월을 지냈으나 아무도 없는 학생회관 앞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야 방학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고향에 내려가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였으니까.

황녀니, 마수의 습격이니,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니 하는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올해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물론 이미 그러한 가정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말이다.

페르쿠스 영지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는 발을 뺄 수 없었다. 내 가족들이 머무르고 있는 소중한 고향이 암흑교단에 의해 박살나기 직전이라는데, 어떻게 두고 볼 수만 있단 말인가.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수집해야 할 정보에도 우선순위가 존재했다. 지금 최우선으로 탐색해야 할 소문은 지난 이틀 동안의 내 행적이었다.

미래에서 온 ‘나’는 수많은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비록 나와 동일한 시간선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랬다.

다시 말해 미래의 ‘나’가 존재하고 있던 미래는, 지금껏 내가 걸어가고 있는 미래와는 별개의 미래였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도 어느 정도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걸어가고자 하는 이상적인 미래를 ‘잘된 미래’라고 한다면, 미래에서 온 내 인격이 겪어 온 시간은 ‘망한 미래’라는 이름으로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애편지가 날아오는 미래는 ‘망한 미래’가 아닌 ‘잘된 미래’였다.

미래에서 온 ‘나’라고 하더라도, ‘잘된 미래’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알고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애초에 그가 알고 있는 사건은 ‘망한 미래’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서 온 내 인격이 보인 행적은 여전히 귀중한 단서를 제공했다.

그가 현재의 나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애초에 몇 년 뒤일지도 모를 미래에서 온 인물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편지 뒤편에 남긴 조언이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버릴 것은 버려라.’

그 노골적인 조언은, 사내가 이미 무언가 낌새를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알아볼 시간이었다.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기로 했다.

어차피 제국 황실까지 건드려 본 몸이었다.

그보다 더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희미한 기대를 품고 검술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에는 벌써 십수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카데미의 상주인구가 줄더라도 훈련장만큼은 늘 인기척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 출신들이야 대부분 고향에 돌아가지만, 평민들은 돌아갈 곳이 마땅찮은 탓이었다. 허름한 집보다야 아카데미가 생활하기에는 여러모로 더 편리했으니까.

한창 때에 비하자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인파라지만 소문을 듣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훈련 중인 학생들에게 수소문을 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별일 없었다고?”

“어, 너 아무 짓도 안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아카데미에 남아있었냐?”

낯익은 얼굴을 한 동기에게 들은 이야기가 영 믿기지 않아, 나는 그 후로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몇 명의 학생들에게 더 캐묻고 말았다.

그 결론은 한결같았다.

“아니, 들어본 적 없는데.”

“에이, 선배가 어디 가면 이야기가 다 돌걸요? 그런데 아무 소문도 안 났잖아요.”

“엥, 너 고향 내려간 거 아니었어? 지난번에 셀린이 찾던데.”

동기는 물론이요, 후배와 선배들까지 비슷한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미래에서 온 ‘나’는, 지난 이틀 동안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았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물론 피 묻은 제국 황실의 인장으로 볼 때 무슨 짓을 저지르긴 한 모양이지만, 최소한 그것이 내 평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감동을 받았다.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비유하자면, 도끼질에 미친 또라이인 줄만 알았던 형제가 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한 모습을 본 느낌이었다.

그래, 당신도 하려면 할 수 있잖아.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말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날이 선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던 내가 멈칫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팍, 하고 등짝을 강타하는 일격에 나는 일순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이를 참아낸 내 몸이 절로 펄쩍 떠올랐다. 낯설지 않은 감각이라 그 원인은 금세 짐작이 갔다.

내 원망스러운 시선이 등 뒤를 향하자, 그곳에는 팔짱을 낀 셀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안 오빠, 어딜 갔다 온 거야?”

그러면서 팔짱을 끼는 폼이 벌써부터 심상치 않았다.

되짚어 보니, 방금 전 수소문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떠올랐다.

셀린이 나를 찾고 있었다고 그랬지. 무려 이틀 동안이나.

얼얼하게 느껴지는 배후의 통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헛기침을 해야 했다.

“글쎄, 그걸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하는데…….”

“……그게 무슨 헛소리야!”

빽, 하고 내질러지는 고함에서는 셀린의 성깔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내겐 유독 유순한 셀린이었지만, 진짜로 화가 나면 그런 배려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기야 말도 없이 이틀이나 사라져 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 나름대로는 진실을 가감 없이 밝힌 답변이었으나, 셀린은 내가 농을 던졌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뿔이 난 기색이었다.

“이안 오빠… 이제 모레면 페르쿠스 영지로 출발하기로 한 거 잊었어?! 내려가기 전에 부모님 선물도 사고, 아론 오빠랑 리아 선물도 사야 할 것 아니야!”

“아니, 뭐 늘 내려가는 길에 선물까지…….”

“오빠야 그렇겠지, 그런데 나까지 가잖아?”

째릿, 하고 노려보는 셀린의 시선에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남의 집에 신세를 지는데 빈손으로 오기도 뭐하긴 했다. 어린 시절이라면 몰라, 이제 나와 셀린은 성인이었으니까.

다만 나는 억울한 점이 있어 항변의 말을 내뱉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러면 레토랑 사러 가면 되잖아?”

“미쳤어?! 내가 왜 그 인간이랑 단 둘이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싸늘한 셀린의 반박에 나는 아무 말도 없이 턱을 쓰다듬었다.

셀린으로서는 친남매와 함께 시내로 나가는 기분일 터였다. 그러니까 내가 리아와 단 둘이 시내로 나가 장을 보는 느낌이겠지.

한참을 고민해 본 결과, 내가 도출한 결론은 단순했다.

“……그게 뭐 어때서?”

“이상성욕.”

셀린의 황갈색 눈동자에는 어느덧 경멸의 감정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마주하니 억울한 심정이 배가되었다. 나는 답답하다는 어조로 셀린을 설득했다.

“아니, 셀린… 이 세상에 남매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너나 레토처럼 서로를 꺼리는 사이도 있지만, 나나 리아처럼 서로를 각별히 아끼는 사이일 수도 있잖아?”

“……이안 오빠랑 리아는 좀 심해.”

흥, 하고 우스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 셀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특히 리아, 그 계집애는 좀 위험하다니까. 이안 오빠를 너무 좋아하잖아! 내가 혼자 선물 고르면, 또 정중한 말투로 비꼬기나 하면서…….”

“리아는 그런 애 아니야.”

내 단호한 목소리에 셀린의 입술이 삐죽 내밀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러시겠지,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쉰 그녀가 떨떠름한 눈빛을 내게 향했다. 이제 포기했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딜 다녀온 건데?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이틀 동안 소식이 없었잖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모르겠다니까, 당장이라도 그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때때로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깨달은 차였다. 대신 나는 셀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이틀 동안이나 나를 찾아다녔다면, 분명 나에 대한 목격담은 셀린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 테니까.

“……이틀 동안 날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렇다니깐!”

다시 생각해도 답답했던지 셀린이 발을 동동 굴렀다. 무척 분하고 억울한 기색이었다.

“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처음에는 소식만 없다가, 이틀이나 찾아봤는데 어, 얼굴도 봤다는 사람이 없고오…….”

셀린의 목소리가 점차 물기로 젖어들어 갔다.

나름대로 나를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모양이었다. 전조조차 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니, 셀린으로서는 걱정이 되었겠지.

만일 셀린이 그렇게 사라졌다면 나 또한 그랬을 터였다.

그 마음을 깨달은 나는, 말없이 셀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셀린은 훌쩍이며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미안해, 셀린.”

“……응.”

그렇게 나는 셀린은 한동안 달래준 뒤에야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셀린이 내 행적에 대해 접한 것은 딱 한 가지 목격담뿐이라고 했다.

“어젯밤에 이안 오빠가 위스키를 사들고 기숙사로 돌아갔다는 소문은 들었어.”

그것이 지난 이틀 동안 증발해 있던 내가, 아카데미 내에서 유일하게 목격된 순간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미래의 내 인격이 빙의하고 나서 종일 방에 처박혀 있었다면,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내 방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방에 있었다면 셀린이 날 이틀이나 찾아다닐 일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제국 황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과 어떠한 접촉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품에 넣어둔 인장이 유독 단단하게 느껴졌다.

**

결국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네리스 선배를 찾아가야 했다.

그러나 내가 굳이 신문부로 발걸음을 옮길 것도 없이, 인적이 드문 공터에 도달하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속한 반응이었다.

내 이동경로를 미리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내 눈이 오랜만에 보는 네리스 선배를 향했다.

목덜미를 덮고 내려가는 단정한 갈색 단발에, 앞머리에 꽂아둔 핀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 암녹색 눈동자는 우울한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그 몸에 감긴 붕대였다.

목부터 어깨, 그리고 손가락부터 손목까지 칭칭 감겨 있는 붕대는 부상을 암시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경상은 아니었다.

그 느닷없는 등장에 내가 잠시 의아한 눈빛을 품자, 네리스 선배는 곧장 머리를 처박았다.

여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 말씀하신 정보를 취합해 왔습니다. 페르쿠스 영지를 비롯한 주변 영지의 인구 실종 현황을…….”

“……괜찮아요?”

정상적인 감수성을 갖춘 인간이라면 마땅히 던져야 할 질문이었다.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사람한테 안부를 묻는 것쯤이야 상식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네리스 선배는, 마치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눈빛은 여전히 의문을 품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네리스 선배의 낯빛이 곧 새파랗게 질렸다.

“무, 물론! 물론입니다. 이안 님의 자비로운 처사 덕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어 내 표정이 점점 더 떨떠름해지자, 네리스 선배는 이내 흐릿한 울음기까지 섞어가며 애원했다.

“의, 의심하지 않았어요… 다시,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결국 내 손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멀쩡히 넘어갔을 리가 없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어지는 네리스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나는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

사내는 어두운 밀실에서 눈을 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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