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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11화 (211/649)

〈 21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4)

* *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그곳에서 눈을 뜬 사내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자, 그제야 동공이 점차 말간 빛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는 그 자체로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피로한 눈빛이 제 손발을 향했다.

사내의 사지는 구속구로 묶여 있었다. 손목에 차인 수갑과 더불어, 발목을 단단히 감싼 족쇄 탓에 거동조차 힘들어 보였다.

본래라면 비명을 내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 깼더니, 수상쩍은 곳에 끌려와 사지를 구속당했다. 심리적인 압박감이 최고조에 이르러도 이를 만했다.

하지만 사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피로한 기색만을 내보일 뿐이었고, 표정조차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감정이란 것이 거세당한 인간처럼 보였다.

그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자 쇠사슬이 끌리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사내의 앞에는 창살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자그마한 원탁이 보였다.

그곳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이 그의 나이가 생각보다 젊지 않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그러나 그 탄탄한 근육과 선이 굵은 얼굴이 아직 그가 전성기에 머무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걸친 옷은 칠흑의 정복이었다.

자고로 색은 많은 것을 상징하곤 했다.

검은색은 힘과 권위를 뜻하지만, 그 외에도 중요한 함의를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야음을 틈타 어둠 속에 스며드는 이들.

제국 첩보부였다.

그것도 정복 차림으로 있을 정도라면, 그 신분이 외부에 노출되는 최고위 인사라는 뜻이었다.

중년은 찻잔에 담긴 차를 한 번 홀짝였다.

그의 눈동자가 슬쩍 뜨이자 푸른 도깨비불이 허공에 나타나는 환각이 일었다. 그가 나지막한 인사를 건넸다.

“무례를 용서하게, 이안 페르쿠스.”

탁, 하고 찻잔이 탁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중년은 그러면서 손에 낀 하얀 장갑을 고쳐 꼈다. 사죄를 읊는 그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이해해 주었으면 하네, 워낙 자네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서 말이지… 정보를 수집하면 수집할수록 알 수 없는 인물은 자네가 처음일세.”

말없이 중년을 응시하고 있던 사내는,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모든 맥락을 이해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든 말든 중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국 황실은 ‘용혈 문자’에 관한 문제를 엄중한 시선으로 보고 있네. 그래서 다소의 무례를 무릅쓰긴 했으나, 최대한 자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참고로 이곳은…….”

“……제국 첩보부 본단의 지하 취조실.”

난데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사내의 그 한 마디에 중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는 침묵 속에서,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사내를 노려보았다.

“구속구도 고급품이군요. 그리고 숨어있는 요원도 하나, 둘… 아니, 셋.”

심드렁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중년의 눈빛에 어린 경계의 기색이 더더욱 짙어졌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곳은 제국 첩보부 본단에 위치한 지하 취조실이었고, 구속구 또한 고급품이었다. 마스터를 목전에 둔 이들이 아니라면 저 구속구를 끼는 순간 마력조차 움직일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 사내도 마력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해야 옳았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 이곳에 은신해 있는 첩보부 요원들은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다. 당연히 그 은신을 간파해 내기는 힘들었다.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마력을 사용해야 했다. 마력의 유무는 그만큼이나 커다란 격차를 만드는 법이었으니까.

중년의 침묵이 길어지자, 사내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이대로 창살을 사이에 두고 대화할 생각입니까?”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던 중년은, 이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네만…….”

그리고 차를 한 모금, 그 다향(茶?)을 음미하더니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 도발적인 질문에, 사내는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탁자를 두드린 그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불꽃과 함께 튀겼다.

캉,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두 손목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전력을 다해 두 팔을 내리치듯 펼친 것만으로 이루어낸 기예였다.

사내가 발목을 비틀자 촤르륵, 하고 쇠사슬이 끌려왔다. 직후 사내의 발이 사슬을 짓밟자 파편이 튀어 올랐다.

조각난 금속 파편이었다.

그 과정이 너무 신속해서, 일순 미리 짜둔 각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뒤이어 사내는 서슴없이 창살의 문을 가로막은 걸쇠에 쇠사슬을 감았다. 수갑에 매여 있던, 끊어진 쇠사슬을 걸쇠에 휘감고 비틀어 당기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질의 걸쇠가 찌부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덧 사내의 손목으로 이어지는 쇠사슬이 백열하고 있었다. 마력으로 강화된 사슬은, 이내 걸쇠를 조이다 못해 으깨버렸다.

팍, 하고 반으로 찢어진 걸쇠가 핑그르르 하늘을 날았다.

그렇게 사내가 창살을 벗어날 때까지는 단 몇 초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겨,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 철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도 중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한 차례 꿈틀거렸을 뿐이었다. 그가 팔짱을 낀 채 사내를 응시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는 듯이.

물론 사내는 벌써부터 우쭐거릴 만큼 어리숙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입이 또 다시 몇 마디를 내뱉었다.

“……위에 하나, 좌측에 하나, 우측에 또 하나.”

암호와 같은 말이었으나 이 공간에서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바람조차 통하지 않는 이 밀실에서, 유일한 소리의 진원지가 사납게 성대를 긁었다.

“싹 다 들켰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칠흑이 어둠을 가르고 쏘아졌다.

일견 모순된 말처럼 보이겠으나, 이는 사실이었다. 칠흑의 날붙이가 단숨에 파공성을 일으키며 쏟아져 내렸다.

공세에 나섰음에도 일렁이는 잔상만이 보일 만큼 훈련된 요원들이었다.

그 속도나 위력은 아카데미의 신문부원 따위와 비견할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네리스조차도 이들에 비하자면 애송이에 불과했다.

도무지 반응할 수 없는 기습이었다.

설령 초인적인 반응속도로 대응에 나서더라도, 이 셋의 합공을 견뎌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은 이미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수많은 변수를 통제할 수 있는 실력자였으니까.

그야말로 살인의 전문가들.

허나 그들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희미한 두려움이 머물러 있었다. 그만큼 실력이 있으니까, 그들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내가 그들 이상의 괴물이라는 사실을.

그 불행한 예감이 증명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탁, 하고 쇠사슬이 휘감긴다.

전조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사내가 두 팔을 교차한 순간, 좌측과 우측에서 단검을 내찌르던 두 요원의 손목에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요원들은 저항하고자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사내가 이를 악물고 교차했던 두 팔을 양옆으로 펼치자, 단숨에 두 요원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내의 신체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웅크려 목이 부러지는 참상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공간을 창출해낸 사내를 노리는 단검은 없었다.

위에서 내리꽂히던 요원이 허공에서 한 번 더 튕겨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원리조차 파악할 수 없는 난해한 곡예였다. 허공을 박차고 제 손으로 동료들을 찌르는 참사를 피해낸 그는, 곧바로 천장을 딛고 단검을 내던졌다.

벼락같은 투척에 사내는 팔을 휘둘러 대응했다.

캉, 하고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며 단검이 다시금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러든 말든 요원은 연달아 비수를 내던질 따름이었다.

단검이든 비수든 그 끝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독이 묻어 있다는 뜻이었다.

심문을 해야 하니 즉사에 이를 극독은 아니었고, 강력한 마취 효과가 있는 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 한끝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고수들의 싸움 도중이었다. 그 정도로도 치명적인 피해를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몇 차례 비수를 던졌으나 요원은 통 재미를 보지 못했다.

비수를 쏘아내는 족족 쇠사슬이 채찍처럼 비수를 쳐냈기 때문이었다. 결국 비수가 전부 떨어진 요원은, 전투 방식을 근접전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비수가 단번에 쏘아졌다.

숫자가 많을수록 이를 쳐내는 데 더 큰 동작이 필요해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사내의 두 손목에 연결된 쇠사슬이 촤르륵 휘둘러지며 비수들을 쳐냈다.

그 사이에, 땅에 내려앉은 요원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무릎을 굽힌 채로, 탄성을 이용해 곧바로 쏘아지는 매서운 쇄도.

최선을 다한 일격이었다.

그럼에도 닿지 못했다.

요원의 검극이 닿기 직전, 공간이 일그러지듯 사내의 몸과 요원의 검로가 빗겨나갔다. 마치 간극의 중간점을 기준으로 두 사람의 위치가 회전하는 듯했다.

아직 기회는 남아있었다.

요원이 그렇게 생각하며, 급히 자세를 정돈해서 다시금 검을 나누려고 한 그 찰나.

푹, 하고 어깨를 파고드는 날붙이가 있었다.

단검이었다.

이안의 무장은 모두 해제된 뒤였다. 그러니까 쇠사슬 따위를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단검은 다른 곳에서 왔다고 봐야 했다.

요원이 처음으로 던졌던, 마취독이 발라져 있던 단검.

쇠사슬에 치여 하늘을 날고 있던 그것이, 다시금 쇠사슬에 휘감겨 내팽개쳐지듯 요원의 어깨를 관통한 것이다.

단숨에 마취독이 돌기 시작했다.

요원은 감각이 옅어지는 혀로, 더듬거리며 의문을 짜냈다.

“어, 어떻게…….”

철저한 훈련을 거친 첩보부 요원이 이토록 당황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내가 쇠사슬을 다루는 실력은 뛰어났다. 주무장이 아닌 무장을 다룬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솜씨였다.

그래서 이상했다.

그 누구도 ‘쇠사슬’을 무장으로 다루는 훈련을 받지는 않는다. 무척이나 비효율적인데다 다루기도 까다로운 무기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채찍이나 와이어를 쓰는 편이 더 유리했다.

그마저도 제국 첩보부와 같은 특수한 훈련을 받는 이들만이 무장으로 쓰고 있을 정도였다.

요원의 의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담백했다.

팍, 하고 묵직한 쇠사슬이 요원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지 않아도 마취독이 돌아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던 차였다. 요원은 곧장 정신을 잃고 말았다.

또 하나의 신체가 땅 위로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포개어지며 전투의 끝을 알렸다.

그 모습을 무심한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던 사내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원탁에 앉아 있는 중년에게로.

그리고 망설임조차 없이 그 맞은편에 앉아, 사내는 찻주전자를 들어 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쪼르륵, 하고 따라진 찻물에서 뜨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중년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중년은 어렵사리 입술을 뗐다.

“……자네, 정체가 뭔가?”

마침 찻잔을 들었던 사내는 피로한 눈초리로 중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모금, 찻물로 입 안을 적신 그가 대답했다.

“이안 페르쿠스.”

뒤이어 탁, 하고 탁자 위를 두드리는 찻잔의 소리.

“……제국의 충신입니다.”

밀실에 남은 이는, 이제 단 둘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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