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12화 (212/649)

〈 21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5)

* * *

한동안 어둑어둑한 밀실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광원조차 몇 없는 곳이었다. 흐릿하게 타는 촛불만이 희끄무레한 시야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석한 두 남성 중 어느 쪽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어둠이 더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찻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르고, 찻물을 입에 털어 넣는 일련의 과정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첨가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시야가 확보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둘은 찻물을 홀짝일 뿐만 아니라 유심히 서로의 낯빛을 살피는 여유까지도 보이고 있었다. 결국 먼저 정적을 깨트린 쪽은, 칠흑의 정복을 입은 중년이었다.

그가 막막한 한숨을 토해냈다.

“……좋아, 항복일세. 자네가 누구인지 도저히 모르겠군.”

“말씀드렸다시피, 제국의 충신일 뿐입니다.”

중년의 푸념에 돌아온 대답이란 그토록 담백했다.

그렇기에 중년은 픽,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제국의 충신이라니, 황제가 존재조차 모르는 충신도 있단 말인가.

그래도 입으로나마 ‘충신’을 자처하니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저 젊은 나이에 벌써 이만한 성취를 이룬 인재였다. 요원들은 차마 눈치 채지 못한 듯했지만, 중년의 눈썰미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사내의 마력량 자체는 평범했다.

그러나 이를 다루는 솜씨가 귀신같았다. 마력의 총량이 부족하다는 한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내는 필요한 순간 필요한 부분에만 마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신체능력이었다.

물론 한계는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마력을 특정 신체부위에 집중시키면 그에 준하는 부하가 뒤따른다. 심지어 사내는 대량의 마력을 단숨에 움직이고 있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필패였다. 아무리 편법을 동원하더라도 신체능력의 한계는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애초에 저 사내가 장기전으로 돌입할 일이 있기는 할까?

중년은 그러한 가능성을 가늠하면서,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훈련된 악사처럼 정돈된 박자였다.

“인상 깊은 솜씨였네. 솔직히 말해, 마력을 제어하는 솜씨만큼은 마스터에 빗댈 만하군… 어느 곳에서 훈련을 받았나?”

“전쟁터야말로 가장 훌륭한 훈련소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사내는 지친 표정으로 찻물을 홀짝였다. 그 금빛 눈동자에서는 피로감이 유독 짙게 배어나왔다.

흠, 하고 침음을 삼키며 중년 또한 찻잔을 들었다.

대륙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대륙 최북단에서 벌어지는 이종족 토벌이나, 최남단에 위치한 ‘최전선’ 정도가 그나마 전쟁터라 불릴 만했다.

그 두 곳은 제국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전장이었다.

당연히 중년도 그곳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숙지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아무리 머릿속을 뒤적거려도 사내와 관련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내의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뜻이었다.

그 까닭이야 뻔했다.

숨기고 싶단 말이겠지.

예상 범위 내의 답변이었으므로, 중년은 아무런 지적 없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래, 그렇다 치고… 그나저나 쇠사슬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군. 따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나?”

“……만물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느닷없는 화두에 찻잔을 내려놓던 중년의 손이 멈칫했다. 사내를 응시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그 흐름에 통달하면, 모든 무기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검이든, 도끼든, 활이든 쇠사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검과 활이 같다는 것은 억지 아닌가?”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저도 검이나 도끼를 더 선호하니까요.”

깔끔한 인정에 중년은 큭큭대며 웃었다. 그가 탁, 하고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내가 아는 사람 중 하나가 비슷한 소리를 하거든.”

중년의 눈동자에 흐릿한 그리움이 스쳤다. 그가 지금쯤 과거의 어느 시점을 더듬고 있다는 점은 명확해 보였다.

그러던 그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사내가 내뱉은 한 마디였다.

“알고 있습니다.”

“……나를 아나?”

중년의 반문에는 흥미가 어려 있었다.

놀랍다는 감정을 넘어, 그는 이제 강한 흥미마저 느끼고 있었다. 과연 이 사내의 한계는 어디쯤일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 기대에 발맞추어, 이안은 서슴없이 정답을 입에 담았다.

“몰랐다면 진작 덤볐다 깨지지 않았겠습니까? 제국의 검공께 말이죠.”

‘검공’이라 불린 중년의 남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국의 검공.

그 호칭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륙에 현존하는 단 셋뿐인 마스터 중 하나였다. 성국의 성자나 남부 열왕국의 대마녀가 아니라면 맞설 자가 없는 대륙 최강의 검객.

아직 혈기가 왕성했던 시절, 성국의 성자와 한 판 붙었다 산 하나를 박살낸 적이 있다고 전해지는 괴물이었다.

허나 세월은 가장 뜨거운 불조차도 잿더미로 만드는 법이었다.

몇 년이고 대륙을 활보하며 명성을 떨치던 검공은, 어느 날 황궁으로 돌아가며 대외 활동이 드물어지고 말았다.

결국 혈육의 정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의 몸에는 제국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여전히 검공의 명성과 위엄은 건재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스터는 마스터였다.

익스퍼트 따위와 비견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설령 지금의 이안이 덤빈다 해도 십중팔구는 패배할 상대였다. 고작해야 중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성의 여유는, 그만한 실력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리던 검공은 이내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야속하구만… 이처럼 훌륭한 상대를 두고 검을 뽑을 수 없다니?”

“아직까지는 검을 뽑을 생각 만만이지 않으십니까.”

차를 홀짝이며 사내가 내뱉은 무심한 지적에, 검공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야 자네가 하기에 달렸지. 이 늙은이는, 조금 헷갈리네…….”

톡, 하고 검공의 검지가 다시금 탁자를 두드렸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맺힌 경계의 기색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눈빛.

그럼에도 아무런 징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내는 말없이 찻물을 들이켰다. 어느덧 그의 찻잔은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용혈 문자를 가지고 있는 걸까? 내 조카는, 자네에게 용혈 문자를 부여한 적이 없다고 하네만.”

사내는 그 질문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금빛 눈동자에 흐릿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회와 그리움, 패잔병이나 가질 만한 감정의 색채에 검공의 눈썹이 한 번 움찔거렸다.

사내의 입에서는 이내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정정하신지요.”

“아니, 아주 약해빠졌어. 그러니 부디 자네가 나와 조카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네만.”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검공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기색을 내보이고 말았다.

그 대답에 따라, 오늘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요람에 숨은 용, 명검보다도 잘 드는 녹슨 칼.”

“……?”

수수께끼 같은 말에 일순 검공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그가 의문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사내를 쏘아보자, 이안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대로 전해주시면 됩니다.”

“……누구에게 말인가?”

“용혈 문자의 정당한 주인이, 이 시대에 한 분 말고 더 계십니까?”

황제에게 전하라는 뜻이었다.

이를 눈치 챈 검공의 표정이 불만스럽게 가라앉았다. 그는 제국 황실의 수호자이기도 했으나, 또 황실의 큰 어른이기도 했다.

무려 황제의 숙부가 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자고로 나이를 먹을수록 오지랖이 넓어지는 법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 보는 젊은이와, 제 조카가 어떠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 마뜩찮았다.

그러나 이미 검공이 내놓을 대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네.”

그가 제국의 검공이고, 황제의 숙부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국의 주인은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용혈 문자는 그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당연히 그에 관한 판단 또한 전적으로 황제의 몫이었다. 검공 또한 이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검공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길을 떠나려던 검공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사내의 또 다른 요구사항이었다.

“그리고 제국 첩보부의 아카데미 지부는 제가 맡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우뚝 멈춰 선 검공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결정에 따라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는 뻔뻔하게도 추가적인 제안까지 건네고 있었다.

심지어 그 낯빛에는 어떠한 감정의 파문도 엿보이지 않았다.

단지 피로한 눈빛을 한 채, 차를 홀짝이고 있을 뿐.

“또, 폐하께 술 좀 줄이라고도 말씀해 주시고. 나중에 큰일 납니다.”

“……요즘은 잘 안 마시던데?”

“당연히 몰래 드시고 계신 거죠. 침대 옆 서랍장의 두 번째 칸을 열어보신 다음, 그 밑판을 뜯어보시면 술병 나옵니다.”

검공은 이제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숙부에게도 숨기는 비밀을 저 젊은이가 알고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미심쩍은 눈빛은, 이내 떨떠름해지고 말았다.

다시 취조실에 돌아온 검공의 손에는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인장이 들려 있었다.

“……자네 뜻대로 됐네. 그리고 술도 두 병 압수했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황제 폐하께는, 근시일 내에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사내는 툭툭 털어내듯이 제 손을 감싸고 있던 수갑을 쳐냈다. 새하얗게 달아오르던 구속구가 단숨에 캉, 하는 소리를 하며 끊어졌다.

하나둘씩 구속구를 해체하는 이안을 바라보는 검공의 눈빛이 더욱 떨떠름해졌다.

그 비싼 구속구가 저토록 간단히 망가질 수 있는 것인지 처음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검공은 마지막까지 사내에게 경고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단, 자네를 신용해 보기는 하겠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내는 늘 그렇듯 무심한 목소리로 답할 따름이었다.

“지켜보시죠, 끝까지.”

그렇게 제국 첩보부 아카데미 지부는 사내의 손에 떨어졌다.

**

그 소식을 접한 직후, 네리스는 곧바로 허공에 욕설을 내질렀다.

“……개소리 하지 마!”

그러지 않아도 네리스는 이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섭다는 쪽이 더 올발랐다.

그는 잔혹할 뿐만 아니라, 그 의도나 행동원칙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인물들의 정보를 캐내고, 분석해 왔던 네리스조차 처음 보는 인간형이었다.

당연히 상관으로 모시기에는 최악의 인물에 속했다.

그녀는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으나, 그렇다고 상부로부터 하달된 지침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그 정도는 네리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도 이 불행한 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욕설을 내뱉다 지친 네리스는 보다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말았다.

그래, 아무리 ‘아카데미의 미친개’라 하더라도 이안 페르쿠스는 인간이 아니던가.

지난번은 사정이 있었다손 치고, 앞으로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그도 부하들을 막 대하지는 못할 터였다.

그렇게 네리스는 새로운 상관을 최대한 잘 모셔 보기로 했다.

물론 다시금 그를 마주쳤을 때 네리스는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나 퍼부었다.

나쁜 놈, 쓰레기, 살인자, 폭력 중독자…….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잘근잘근 씹어뱉은 상대였으나, 네리스는 이안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칠 때마다 곧잘 풀이 죽고 말았다.

아직은 공포가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에도 네리스는 희망을 품었다.

이안은 조금 엄격하긴 해도, 원칙주의자로 보였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벌도 없었다.

따라서 무언가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네리스가 벌을 받을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이안을 마주한 지 단 몇 분.

퍽, 하고 핏물이 허공에 튀겼다.

네리스의 눈빛이 멍청해졌다. 그 입술이 일순 멍하니 떼어졌다.

하늘을 나는 것은 핏물뿐만이 아니었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피를 흩뿌리며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의 본래 주인은, 바로 네리스였다.

도끼로 여인의 손가락을 내리찍은 사내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리스…….”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의심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안 페르쿠스는 원칙주의자 따위가 아니라고, 네리스는 굳어버린 사고회로로나마 절감했다.

그는 폭력의 화신이었다.

곧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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