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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13화 (213/649)

〈 21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6)

* * *

“제국 첩보부의 아카데미 지부는 앞으로 내가 관할하게 되었다.”

사내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그랬다.

흔들림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무심하게 읊조린 그 몇 마디는 마치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을 제외한 그 모든 요소가 결여된 언어였다.

감정, 높낮이, 심지어는 그 맥락이나 연유까지도.

사내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는 용혈 문자의 소유자였으며,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제국 황실의 인장까지 들고 찾아온 인물이었다. 그의 한 마디에는 제국 황실의 권위가 담겨 있었다.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약자나 하는 짓이었다.

진정한 강자는 결론만 전달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상대를 납득시킬 필요가 없었으니까.

납득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이를 듣는 쪽이었다. 그 진리를 방증하듯, 아카데미 지부에 속한 예비 요원들이 곧장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 풋풋한 인사말에도 이안은 무심한 눈빛으로 응수할 뿐이었다.

무척이나 피로한 눈동자였다.

그 황금빛 동공을 마주치면, 누구나 사내의 지독한 피로감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마치 늪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었다.

네리스는 유독 그 눈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이안은 언제나 무서운 상대였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랬다. 네리스의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 사내한테 대들면 안 된다.

최소한 지금은 그랬다. 조금이라도 사내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네리스는 깨달았고 이를 곧장 행실에 반영했다.

네리스는 속으로 사내를 욕하면서도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대리인에게 마땅히 취해야 할 예였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안은 굳이 네리스에게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무감정한 낯빛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는, 턱짓으로 네리스를 일으켰다. 네리스는 몸을 일으켜 공손히 이안의 맞은편에 섰다.

이곳은 신문부의 지하에 위치한 대회의장이었다.

일전에 이안이 신문부를 습격한 이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황제의 대리인이 지부로 부임한 상황인 만큼 신문부원 전원이 자리한 상태였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제국 첩보부의 아카데미 지부는 고작해야 임시 지부에 불과했다.

실습생들이 훈련을 받는 곳으로, 지부의 존재도 아카데미 측에 일부 알려져 있을 만큼 첩보부의 핵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그 아카데미 지부에 무려 황제의 대리인이 부임해 오다니.

급이 맞지 않아도 한참이나 맞지 않았다.

굳이 과장을 섞지 않아도, 지금 최상석에 앉아 네리스를 오시하는 사내에게는 무시무시한 권력이 있었다.

말 그대로, 요원을 살리고 죽이는 문제 또한 그의 권한 중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반대로 말 한 마디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하는 것 또한 가능할 터였다.

아카데미 지부의 실습생들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사내는 그러한 동경과 공포의 시선이 이미 너무나 익숙한 듯했다. 아무런 감흥조차 없는 목소리로, 그는 첫 번째 지시를 하달했다.

“우선 하나 말해 두지. 괜히 나를 의심하지 마라. 그러다간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또, 너희는 훈련부터 다시 받아야 돼. 우선 시급한 고문 내성 훈련부터 시작하지.”

그 단호한 어조에, 경직돼 있던 분위기가 술렁였다.

긴장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실습생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고 서로 이리저리 시선을 맞추며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개중에는 낯빛이 새파래지는 이들도 있었다.

고문 내성 훈련이 무엇인가.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문을 당해도 기밀을 불지 않도록 하는 훈련을 말했다. 통각을 무디게 만들고 정신력을 도야하는 모든 훈련 과정이 이에 속했다.

제국 첩보부의 요원들이 싫어하는 훈련 중 단연 최고의 자리에 있는 수행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고문에 준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어마어마한 고통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픈 것을 좋아하는 인간은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소수의 변태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취향이었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도를 넘은 통증을 반기지는 못했다.

아직 20대에 불과한 파릇파릇한 실습생들이 받아들이기엔 무서운 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안의 부임을 정식으로 확인받기 위한 결재 서류를 준비하고 있던 네리스는, 그러한 실습생들을 대표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이안 님……?”

사내의 금빛 눈동자가 물끄러미 네리스를 향했다.

그 무심한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네리스는 본능적으로 흠칫 몸을 떨고 말았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누가 폭력성애자 아니랄까 봐, 눈빛부터 살벌하네. 미친 놈.

물론 이를 입에 올릴 용기 따위는 네리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공손한 어조로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사실 고문 내성 훈련은 몇 년 전부터 요원들의 요망에 의해 폐지된 과정입니다. 무, 물론 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부 요원이 필요에 의해 받는 훈련이고, 핀들스턴 후작께서 특히 실습생이 많은 아카데미 지부에서는 금지시킨 부분이라…….”

“……네리스.”

사내의 짤막한 호명에, 네리스는 곧장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혹시 너무 건방졌나?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설득할 수도 있었다. 혹은, 지부의 요원들과 첫 인사를 나누는 과정인데 감히 지부장 따위가 황제의 대리인에 반박한다고 화를 낼 수도 있었다.

말하고 나니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의외로 네리스가 두려워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네리스에게 슬쩍 눈짓을 했을 따름이었다. 잠시 의문에 잠긴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 있던 네리스는, 곧 제가 들고 있던 서류에 생각이 닿았다.

그러고 보니, 이 서류에 도장을 받은 후에야 이안은 아카데미 지부에 정식으로 부임하는 것이 된다.

그 전까지는 봐주겠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한 결론을 내린 네리스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이안을 상관으로 모시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네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이안 앞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예의 바르게 그 서류를 이안 쪽으로 밀어 넣으려던 그 찰나.

팍, 하고 허공에 핏자국이 튀었다.

네리스의 낯빛에 어린 안도의 기색이 채 가시기도 전의 일이었다.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어느덧 새하얀 빛살이 궤적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끝에 존재하는 것은, 서류를 짚고 있던 네리스의 가녀린 손가락들.

그 몇 개의 손가락이 하늘로 비산했다.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네리스의 눈빛이 점차 멍청해졌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러한 의문보다 먼저, 네리스의 뇌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송곳이 하나 있었다.

불에 달군 꼬챙이로 뇌수를 짓이기는 듯한 통증.

그와 함께 사내의 무심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내가, 의심하지 말라고 했잖아.”

네리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 꺄, 꺄아아아아아아악!”

네리스는 그대로 주저앉아, 핏물이 뚝뚝 흘러나오는 제 손을 움켜쥐었다. 정확히 검지부터 중지까지 손가락 두 개가 날아가 있었다. 네리스의 떨리는 시선이 제 손가락을 향했다.

아프다. 그리고 무서웠다.

어느덧 눈물이 차오르는 암녹빛 눈동자로, 네리스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놀랍도록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어 보였다.

분위기가 단숨에 싸늘해졌다.

몇몇 실습생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을 정도였다.

그러든 말든, 사내는 소름이 돋도록 차가운 말로 명령했다.

“……일어서.”

“으, 흐으… 네, 넷!”

느닷없는 통증에 과거의 악몽이 자극당한 네리스는 그대로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이안에 대한 공포가 더 컸다. 네리스는 비틀거리면서도,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핀들스턴 후작의 지시가, 용혈 문자의 권위보다 위에 있던가?”

“아, 아닙니다!”

네리스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곧장 대답했다.

바보 같은 계집애, 왜 이 또라이를 건드렸지.

후회로 젖은 눈물이 한 방울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리스는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안은 네리스가 덜덜 떨고 있는 양을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품에서 제국 황실의 인장을 꺼내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인주조차 필요 없었다.

이미 네리스의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으니까.

유일한 단점은 핏물이 번지며 찍힌 직인의 형태마저 곧 사라지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사내는 이를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좋아, 이제부터 아카데미 지부에 정식으로 부임한 이안 페르쿠스다. 우선은 페르쿠스 영지와 그 일대에서 벌어지는 실종 사건부터 조사하도록.”

“……아, 알겠습니다!”

실습생들의 대답은 우렁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 최강인 네리스조차 사내의 도끼질에 맥을 못 추고 주저앉았다. 하물며 그녀보다 약하고 지위도 낮은 그들에게는 어떻겠는가.

본능적인 두려움에 절로 결의에 찬 맹세가 흘러나왔다.

한동안 히끅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네리스는, 이내 늘 그래왔듯 상관에게 여쭈었다.

“이안 님,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끄, 꺄아아아아악!”

콱, 하고 손도끼가 다시 한 번 빛을 뿜었다.

이제는 네리스의 어깨였다. 앉은 자리에서 내던진 손도끼는, 곧바로 네리스의 어깨 연골을 으스러트리며 핏물을 터트렸다.

네리스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새끼, 의문도 품지 말라는 뜻이었어?

그렇다면 진작 말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네리스의 분노는, 이안의 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새벽녘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사내는 그녀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고도 어떠한 감흥도 없어 보였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태도, 그 인간성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 네리스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녀는 벌벌 떨면서 곧장 고개를 숙였다.

팍, 하고 손도끼가 저절로 뽑혀 나오며 사내의 손으로 들어갔을 때도 옅은 신음만을 흘렸을 뿐이었다. 연달아 일격을 허용한 네리스는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무섭다.

제발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한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닿길 바라면서, 네리스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제 어깨를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래야 아픔이 좀 덜할 것만 같아서.

천만다행으로, 이안은 이제 딱히 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신문부원들은 다급히 허리를 굽혀 작별의 예를 취했다.

네리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있다간 꼴사납게 울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안 페르쿠스는 최악의 상관이었다.

어깨를 쥔 채 파르르 떨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도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네리스의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네리스 지부장은 나와 페르쿠스 영지까지 동행한다.”

그 짤막한 지시에, 네리스의 숨이 턱하고 틀어막혔다.

그녀는 황망한 눈빛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 애절한 빛을 품은 눈동자에는 물기까지 어려 있었다.

“……네, 네?”

“네리스 지부장은, 나와 페르쿠스 영지까지 동행한다고 했다. 다만 겉으로 존재를 드러내지는 말도록. 어디까지나 정보 수집을 위해서니까.”

네리스는 결국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안을 마주한 단 몇 분만으로도 네리스의 몸에는 벌써 두 개의 상흔이 생겼다. 그런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페르쿠스 영지행에 동행하라고?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리스는 맨 정신이었다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 어째서… 아.”

다시금 대회의실이 정적에 잠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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