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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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엘시 선배는 몇 분 동안이나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두면 꽁꽁 얼어붙어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흐릿한 이슬까지 맺혀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울먹이기 시작할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내 거절이 엘시 선배의 자존심을 건드린 듯했다.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엘시 선배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난번에 성녀와 있던 우발적인 사고를 목격한 이후, 두문불출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러던 엘시 선배가 전에 없이 꽃단장을 하고 나타나다니.
심지어 내게 단 둘이 외출하자는 제안까지 하고 있었다. 그 전에 ‘데이트’라고 중얼거리던 목소리도 분명히 내 귓가에 남아있었다.
혹시 엘시 선배는 내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는 걸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본래 혈기왕성한 청춘남녀 몇몇이 모이다 보면 사랑이 싹트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풍찬노숙을 함께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는 동료지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실습 조원들끼리의 연애는 금기로 여겨지긴 했다.
지금껏 합을 맞춰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할 사이였다. 그런데 연애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누군가를 편애할 수밖에 없었다.
조가 엉망진창이 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연인들이 존재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사나운 말과 같아서, 이성이라는 고삐로는 도저히 제어가 불가능한 탓이었다.
따라서 엘시 선배가 내게 호감을 품었을 가능성이 존재하긴 했다.
아니, 엘시 선배가 최근 내게 보이는 모습을 보면 도리어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 되짚어 보면 엘시 선배는 내게 꾸준히 호감을 표했던 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잔혹한 엘시 선배가 내 앞에서만 순한 양이 될 리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엘시 선배는 훌륭한 신붓감이었다.
우선 예쁘다.
아카데미 내에서 평판이 최악이던 시절에도 엘시 선배는 꾸준히 인기가 있었다. 고백을 받은 적도 많았고, 그만큼 울린 사내도 많았다.
소문에 따르면 재기가 불가능할 수준으로 험한 말을 늘어놓는다던가.
더불어 가문도 훌륭했다.
라이넬라 백작가는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오랜 시간 마도 명문으로 명성을 쌓아왔다. 그 재산과 영향력 면에서는 페르쿠스 가문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따라서 내가 엘시 선배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나도 일단은 한창 때의 사내였다.
엘시 선배나 델핀 선배, 그리고 성녀나 세리아 같이 어여쁜 여인들에게 호감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엠마나 셀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껏 연애 사업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까닭은 하나였다.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그 의무감 때문에.
일순 혹할 뻔했던 내 가슴이 다시금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 지금은 연애에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 세상을 구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은 문제였다. 게다가 아직 내 미래는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편지가 미래의 약혼자로부터 날아올 터였다.
벌써부터 연인을 만들어두는 순간, 그 미래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대륙을 위해서라도 내 연애는 조금 더 미루어 두어야 했다.
다만 엘시 선배의 애처로운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일말의 망설임을 지워내지 못했다.
그래도 데이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바로 연인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가 아닌가.
아무리 내가 여심에 무지해도 지금 엘시 선배의 기분이 어떨지는 짐작이 갔다.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것도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거절까지 당하니 자존심에 상처가 갔겠지.
내 입이 더듬거리며 말토막을 내뱉은 것은 그때였다.
“그, 그래도 뭐…….”
내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하고 있던 엘시 선배는, 곧장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만일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맹렬한 좌우운동을 반복하고 있을 터였다.
내 마음은 아직 그 기대를 무참히 짓밟을 만큼 단호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일쯤은 괜찮지 않을까요,’ 라는 대답을 내놓기 직전.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루핀 라이넬라, 그러고 보면 그가 내게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복수’를 하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곧 무시무시한 음모론이 내 머리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연기라면?
엘시 선배는 아직도 나를 향한 복수를 꿈꾸고 있으며, 루핀과 공모하여 내게 가장 비참한 추억을 선사해 주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미인계로 나를 홀린 뒤, 차버린다는 사악한 음모를.
실로 무시무시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엘시 선배가 고백한 남자들을 찰 때 얼마나 매몰찬 말을 하는지는 유명했다.
그런데 악의에 받혀 내뱉어지는 말은 얼마나 잔혹할 것인가.
식은땀 한 방울이 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큰일 날 뻔했다. 이 악마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라이넬라 남매에게 속아 넘어갈 뻔하다니.
결국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처음으로 내놓았던 대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제 곧 고향에 내려가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없지 않을까요?”
못을 박는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방학이 지나가기 전에는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뜻이었으니까.
엘시 선배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낙담한 듯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처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 응… 그렇지. 미안,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지…….”
오랜만에 듣는 반말인데, 물기가 섞여드니 가슴이 괴로웠다.
혹시 엘시 선배가 진심이었다면 어떨까.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당장 모레 떠나야 하는데 인사를 나눠야 할 사람은 잔뜩 있잖아요. 성녀님이나 델핀 선배, 세리아나 엠마…….”
“……아, 알고 있어.”
엘시 선배의 말이었다.
시선을 내리깔은 그녀는, 애꿎은 마룻바닥을 신발 끝으로 긁고 있었다. 의기소침해져 뒷짐을 진 그 모습이 유독 안쓰러웠다.
분위기가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는데, 어떻게 단 몇 분만에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엘시 선배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성녀님이랑은… 무슨 관계야?”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다급한 대답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언젠가 해명해야겠다고 다짐했던 문제였다.
만약 쓸데없는 소문이 퍼진다면 성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성녀의 처녀성은 천신의 상징과 연관지어져 생각되기 마련이었으니까.
물론 엘시 선배는 내 말을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울적한 티를 팍팍 내며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오해가 있었는데… 그건 일종의 치료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인데?”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말문이 막힌 나는 엘시 선배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느덧 고개를 치켜든 엘시 선배의 푸른 눈동자는, 슬프게도 나를 담고 있었다.
마치 그 눈동자가 내게 묻고 있는 듯했다.
성녀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그럼 나는?
그보다도 못한 사이가 아니냐고.
나는 끄응, 하고 난감한 신음을 흘렸다.
“……그야, 동료 사이죠.”
몇 번이고 함께 사건을 해결한, 소중한 동료.
그러나 엘시 선배는 그 관계에 조금도 만족하지 못한 듯 보였다.
쓴웃음을 머금더니,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엘시 선배는 제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내게는 사랑스러워 보이는 몸짓이었으나, 그럴수록 엘시 선배의 입가에 걸린 쓴웃음이 더욱더 짙어졌다.
마치 제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그래, 동료 사이… 음, 그보다는 낫겠네.”
무엇이 낫다는 것인지, 채묻기도 전에 엘시 선배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해질녘의 종소리처럼 서글픈 웃음이었다.
“역시,욕심 부리지 않을게요,주인님.”
낑낑대는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엘시 선배는, 걸음을 재촉하며 떠나갔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도 못했다.
단지 한참 동안이나 사라져 가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내 손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지를 고른 것 같은데.
허나 내가 엘시 선배에게 건넨 말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진짜로 내겐 시간이 없었다.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 인사를 건네야 할 사람이 많았다.
우선 성녀와 델핀 선배, 그리고 엠마가 그랬다.
그 셋에겐그간 신세를 많이 졌다. 떠나기 전에는 반드시 작별인사를 건네야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내 눈이 슬쩍 창밖을 향했다.
아직은 오후, 하나나 둘쯤 찾아가 인사를 건네더라도 무리가 없을 시간이었다.
페르쿠스 영지로 향할 때까지는, 이제 고작 한나절하고도 반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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