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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16화 (216/649)

〈 216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9)

* * *

최근 성녀는 전에 없이 초조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왜 이안이 찾아오지를 않지?

솔직히 말해, 일전에 있었던 사고는 수치스러웠다. 그야 성녀가 유혹하긴 했지만 정작 이안이 이를 행동으로 옮길 줄은 상상도 못했던 탓이었다.

그 짜릿한 감각을 떠올리면 성녀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은근한 굴욕감과 배덕감에 더해, 등골을 긁듯이 타고 오르는 찌르르한 감각.

절로 허벅지가 오므려지고, 숨결이 거칠어지며, 애달픈 눈빛으로 사내를 마주하는 느낌은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안에게 억지로 당하는 편이 조금 더 흥분되었다고 할까.

물론 성녀는 그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고개를 내저어야 했다.

성녀란 순결한 심신을 지녀야 했다. 음란한 욕망으로 마음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날 이후 이안을 볼 때마다 괜히 부끄러운 심정이 앞서기도 했고.

천성부터 낯을 가리지 않는 성녀로서는 여러모로 낯선 경험이었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성녀는 조금 불만스러운 지점이 있었다.

순진한 처녀의 젖가슴까지 멋대로 주물러 놓고, 이안이 자꾸만 성녀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이 못내 분해서 성녀는 은근슬쩍 몸을 밀착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안은 헛기침을 하며 성녀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성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가 어디까지 그러나 보자.

욕망을 참지 못하고 감히 성녀의 몸에 손을 댄 사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올 테고, 그때가 되면 실컷 골려주리라.

성녀가 그렇게 결심하고 며칠이 지난 뒤.

이안에게서 단 한 마디의 전언조차 없자, 그녀는 치료실에서 애꿎은 탁자만 두드리고 있었다. 점차 빨라지는 박자가 그 초조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왜 연락이 없지?

처음에는 고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슬슬 불안했다. 듣기로 이안은 이틀 뒤에 고향으로 떠난다고 들었는데, 적어도 그 전에는 성녀를 보러 와야 할 것이 아닌가.

다급해진 성녀는 결국 타인의 조언을 들어보기로 했다.

물론 성녀 본인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숨겼다. 본래 ‘들은 이야기’로 시작하는 고민 상담이란 다 그런 법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성녀의 신분이 있다 보니 설마 그녀의 이야기라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뿐이었다.

성녀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은 여학생 중 하나는, 곧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먹버’ 당한 거 아니에요?”

“머, 먹… 뭐요?”

난생 처음 듣는 말에 성녀는 멍청한 목소리로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박한 반응에 여학생은 더욱 즐거운 기색을 보였다.

“아하하, 순진하셔라… 애초에 남자의 목적은 몸뿐이었던 거죠. 그런데 진도를 나갈 대로 나갔다고 생각했으니까, 연애까지 하긴 귀찮으니 인연을 끊어버리는 거고.”

그러면서 여학생은 ‘먹버’가 무엇의 줄임말인지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성녀는 재빨리 부정의 말을 짜냈다. 그 모습은 차라리 필사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 그럴 리가요… 그 인간이 조금 짜증나긴 해도, 사실 좋은 사람이거든요? 책임감도 강하고, 착하고…….”

“그런 남자가 왜 아직도 연락이 없겠어요?”

키득거리면서, 여학생은 단언했다.

“……전부 연기였던 거죠. 여자는, 불쌍하게 놀아난 거고.”

차마 반박을 떠올리지 못한 성녀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녀는, 가까스로 대화를 이어나가야 했다. 그렇게 어찌저찌 여학생을 배웅한 뒤에도 성녀는 한참 동안이나 얼어붙어 있었다.

홀로 남아, 멍하니 앉아있던 성녀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나, 먹버 당한 거야?”

어느덧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성녀, 방년 22세.

비로소 연애의 쓴맛을 배우다.

물론 이안에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단지 그는 다른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을 따름이었다.

**

아이달로스 관에는 늘 그렇듯 델핀 선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찾아오자, 아이달로스 관의 사용인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지난번에 날 델핀 선배에게로 안내했던 사람이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사용인은 불만을 꾹 눌러 참은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답할 뿐이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지난 방문 때 저지른 일이라곤 별 것 없었다. 고작해야, 도끼로 문을 억지로 열어젖히고 델핀 선배의 방에 들어간 정도?

결과적으로 델핀 선배의 우울증도 나았으니 잘 된 일이 아닌가.

그렇게 뻔뻔스러운 태도로 나오자 사용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앞장을 서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델핀 선배와 내가 각별한 관계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뒤였던 덕이었다.

마수 습격 이후 내가 집중치료실에 입원하자, 델핀 선배는 매일 같이 신전을 찾아와 내 상태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보아온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나와 델핀 선배의 관계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지난 방문과 달리 델핀 선배는 내게 흔쾌히 방문을 열어주었다.

델핀 선배의 방 안은 오늘도 어둑했다. 해질녘의 노을과 촛불이 은은한 조명을 이루며, 새하얀 피부 위에 그려진 금빛 머리카락과 핏빛 눈동자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얇은 가운이 드러내는 여체의 굴곡이 매력적이었다.

자리에 앉은 채, 한 손에 유리잔을 들고 있던 델핀 선배는 슬쩍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왔어, 주인님?”

“……벌써부터 술을 마셔요?”

아직 이른 저녁이었다. 그럼에도 델핀 선배가 들고 있는 유리잔에는 핏빛의 포도주가 찰랑이고 있었다.

델핀 선배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술을 홀짝였다.

“이제 이곳에 지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곧 유르디나 영지에 복귀하고, 다음 학기가 끝나면 난 아카데미를 떠나야 하는걸.”

그 말에 나는 흠, 하고 침음성을 삼키고 말았다.

과연 그랬다.

델핀 선배는 아카데미의 최고학년인 4학년이었다.

이제 막 1학기를 끝 마쳤으니, 아카데미 생활은 실질적으로 반년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후계자가 대학원 과정까지 수료할 까닭은 없으니 말이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낸 곳이었다.

그곳을 곧 떠나야 하는 심정이 어떨지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마 내년이 되어서야 나도 그 기분을 깨달을 수 있을 터였다.

결국 나는 델핀 선배의 맞은편에 착석해 술잔을 들었다.

한 잔 달라는 뜻이었다.

델핀 선배는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포도주, 엄청 비싼 건데?”

“일전에 분에 넘치는 상품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권리를 행사하려고요.”

그러자 델핀 선배는 군말 없이 내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그 상품이란 바로 델핀 유르디나, 그녀였으므로.

유리잔이 마주치고,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술자리의 시작을 알렸다.

“인상 깊은 활약이었어, 주인님. 다시 생각해도 당신 편에 서길 잘했다니까.”

“어쩌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런 것치고는 꽤 자신만만했잖아?”

포도주를 쭉 들이키며, 델핀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한 방울의 술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입술에서, 목으로. 목에서, 쇄골로, 그리고 그 아래로.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가운 차림이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한창 때의 남성에게는 너무 자극적인 풍경이었다.

귀엽다는 듯 델핀 선배의 눈꼬리가 휘었다.

“덕분에 내 입지도 괜찮아졌어. 일부러 페르쿠스 영지를 도발하는 계획을 미루어두었는데, 황실의 은인에게 폐를 끼칠 뻔했잖아?”

“결과론적인 이야기죠. 그 후에 황녀 전하를 대로변에서 패버린 덕에 제 인식은 또 나락을 갔거든요.”

“중요한 건, 남들이 볼 때 우리가 얼마나 선량한지가 아니야.”

탁, 하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델핀 선배는 당당히 선언했다.

“우리가 얼마나 두려운가, 그게 전부야. 승자는 늘 패자의 두려움을 사야 하니까.”

“……존중을 사도 되잖아요?”

“영원히 승자면 존중도 필요 없어. 도리어 복종이야말로 패자의 의무지… 그래서, 내가 주인님을 모시고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러면서 델핀 선배는, 상반신을 탁자 위로 기댔다.

은근슬쩍 가슴골을 드러내는 자세였다. 내 눈이 다시 측면을 향했지만, 델핀 선배는 이제 몸을 일으켜 내 옆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그녀가 속삭였다.

“……이제 두 달 동안은 못 볼 텐데, 내가 그립지 않겠어?”

“그립겠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는 델핀 선배의 무게감을 느꼈다. 탄력 있는 둔부가 슬쩍 내밀어지며 내 팔에 밀착됐다.

“델핀 선배의 몸이 아니라, 실력이 말이죠.”

“……후후, 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가 봐?”

내 흔들림 없는 대답에 쿡쿡, 하고 델핀 선배는 웃음을 터트렸다. 짤막한 말 속에서도 진의를 파악해 내는 능력이 뛰어난 여자였다.

그래서 델핀 선배는 더더욱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이기도 했다.

“제가 벌이는 게 아니라, 아무래도 암흑교단 쪽의 동향이 수상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어떻습니까? 유르디나 가문도 한 발 걸치는 건.”

흐응, 하고 델핀 선배는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마치 손익을 따지는 정치인과 같은 태도였다.

그녀는 이내 도발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마,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술기운이 돌자 주위의 공기가 훅 달아올랐다.

달콤한 여인의 체향과, 포도주의 향긋한 향기, 그리고 은은한 조명이 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델핀 선배는 내게 몸을 기대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도 우리 관계를 이해 못하겠어?”

내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참 당할 때마다 곤란한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일단 그 놀이에 응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두 달 동안 못 볼 사이인데, 하룻밤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무엇이 대수냐 싶었다.

내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델핀 유르디나.”

그 한 마디에,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델핀 선배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여인의 숨결이 거칠어진다. 서서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장 머리를 조아리며 엉금엉금 기어 내 발끝까지 다가섰다.

그리고 쪽, 하고 신발코에 입을 맞추는 델핀 선배의 몸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명령대로 해.”

헐떡이면서, 델핀 선배는 대답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주인님…….”

그러면서 고개를 치켜든 그녀는, 일렁이는 핏빛 눈동자로 말했다.

“그러니, 부디 이 암노예에게 벌을…….”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무릎을 꿇은 채 상반신만을 일으킨 여인이 애원했다.

“……두 달 동안 잊히지 않도록.”

델핀 선배는 내 다리를 꾹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여체 특유의 촉감이 맞닿았다. 델핀 선배의 요구는 명확했다.

그날 밤은 조금 더 오랜 시간을 델핀 선배의 방에서 보내야 했다.

**

결국 내가 델핀 선배의 방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창틀을 두 손으로 짚은 채, 엉덩이를 쭉 내미는 델핀 선배를 상대하는 것은 나름 고역이었다. 그리고 즐겁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델핀 선배의 쇄골에 단검까지 그어주어야 했다.

델핀 선배의 말로는, 욱씬거리는 통증이 그리워질 때마다 그 자리를 볼 생각이라나.

하여간 취향 한 번 독특한 선배였다.

다만 델핀 선배와 어울려 준 대가는 확실했다.

“떠나는 길에,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드릴게요.”

델핀 선배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특별한 선물이라니, 무엇일까.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델핀 선배가 공언했을 정도니 범상한 물건은 아닐 터였다.

기대를 해봐도 되겠지.

그렇게 살짝 술기운이 올라,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기숙사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두운 밤이라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력으로 안력을 돋우어 그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림자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턱, 하고 내 멱살을 쥐는 두 손.

그러나 그 힘은 의외로 약해서, 나는 도리어 저항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뿌리칠 수 있을 만큼 가녀린 완력이었다.

그 푸른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물이 어린 눈동자.

루핀 라이넬라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드물게도 헝클어져 있었다. 언제나 귀티 나는 외형을 유지하던 그답지 않은 모양새였다.

매캐한 탄내가 코끝을 스쳤다.

어디 불에 데이기라도 했나?

그러한 의문이 채 뱉어지기도 전에, 루핀은 내게 바락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야 이 나쁜 새끼야! 당장 우리 누나 안 데려가?! 너, 너 때문에 강제로 약혼하게 생겼잖아!”

그 고함 소리에 내가 돌려줄 수 있던 건, 오직 얼떨떨한 눈빛뿐이었다.

‘약혼’이라니? 엘시 선배가 말인가?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는 루핀의 모습에선 거짓의 편린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더 대화가 필요할 듯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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