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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17화 (217/649)

〈 217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0)

* * *

남자와 단 둘이서 대작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애초에 내 방에 남자가 들어서는 일조차 드물었던 차였다. 얼마 전 심야에 내 방문을 두드리다 안면이 함몰당한 남학생이 마지막 방문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그리운 추억들이었다.

그 남학생은 신전에 가서 잘 회복됐을까?

마수 습격 사태 때 큰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지나치게 멀쩡해서 황녀를 욕하던 사람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하지만 그 남학생은 자의로 내 방에 들어선 것이 아니었고, 또 내게 정중한 대접을 받지도 못했다.

손님 자격으로 내 방에 찾아와 술까지 받는 사내는 레토가 유일했다.

지금 목록에 상상도 못했던 인물이 추가되고 있는 셈이었다.

루핀 라이넬라.

언제나 귀족의 기품을 지키겠다고 곱상한 외양을 하고 있던 그는, 드물게도 꾀죄죄한 몰골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풀풀 날리는 탄내가 인상적이었다.

어디 불길 속이라도 헤치고 나왔나 싶은 모습이었다.

그 점까지 포함해서, 차차 이야기를 나누면 될 일이었다. 나는 찬장 속에서 늘 마시던 위스키 한 병을 꺼내 술잔에 따랐다.

쪼르륵, 하고 잔이 차오르며 독한 주향이 풍겼다.

그 냄새를 맡자마자 루핀은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싸구려 술은. 좀 더 고급스러운 거 없어?”

한 대 패 버릴까.

일순 진지한 고민이 들었으나 나는 애써 내면의 폭력성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루핀이 싸가지 없다는 사실은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내 소중한 동료인 엘시 선배가 각별히 아끼는 남동생이기도 했으니, 몇 번은 참아줄 수 있었다.

그래, 몇 번 정도는.

나는 부디 루핀이 오늘 안에 그 기회를 모두 소진하지 않기를 바랐다.

“느닷없이 찾아온 것치고는 좀 뻔뻔한 요구사항인데?”

“느닷없이? 하… 다 너 때문이잖아! 너, 너 때문에 우리 누나가……!”

루핀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발작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입에 거품을 물기 전에 얼른 술잔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루핀은 귀족의 품위를 완전히 잊어버릴 만큼 흥분하기 전이었던 듯했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나와 마주쳤다. 그리고 목구멍을 태우며 흘러내려가는 위스키의 향기.

크으, 하고 달구어진 숨을 내뱉은 나는 루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술을 홀짝이다가, 이내 혀를 쭉 내빼며 질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싸구려 술이라 입에 안 맞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애초에 술을 잘 못 먹는 성향이라든지.

어느 쪽이든 술은 대화의 윤활유에 불과했다. 나는 기회를 틈타 루핀을 채근했다.

“아니, 화만 내지 말고 자세한 사정을 말해 봐. 그래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뭐 사과라도 해야 하는지 알 거 아니야?”

“말 잘했다, 이 쓰레기 자식! 네가 우리 누나한테 무슨 죄를 지었는지 똑똑히 들어!”

벌써부터 술기운이 돌고 있는지 루핀은 더욱 분기탱천하여 외쳤다.

그로부터 이어진 그의 구구절절한 설명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결국 문제는 나와 엘시 선배가 처음으로 조우한 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날 내게 의외의 참패를 당한 엘시 선배는, 굴욕과 수치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풍문까지 퍼져 버리고 말았다.

예의 그 ‘오줌싸개’에 관한 소문이었다.

적어도 엘시 선배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터무니없는 음해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느 누가 후배 앞에서 오줌을 지렸다고 솔직히 고백하겠는가.

그 진상이 알 수 없어지면, 대중은 대개 그들이 원하는 쪽을 진실로 받아들이곤 했다.

당시 엘시 선배의 평판은 최악이었다. 아카데미 구성원들이 바라는 진실은, 엘시 선배를 어떻게든 더 깎아내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엘시 선배의 혼삿길이 막힐 뻔한 원인이기도 했다.

아무리 남녀의 권리가 동등해진 시대라지만, 아직도 세상은 여성에게 더 무거운 정조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었다. 하물며 귀족 영애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외간 남자한테 당해 오줌을 지렸다?

얼핏 보면 조금 우스운 사건에 불과하지만, 사교계의 깐깐한 입방아 위를 오르내리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창피를 당하고 끝날 일이 단숨에 치부로 돌변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고작 한 번 정도 그랬다고 혼인 시장에서의 입지가 치명적으로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엘시 선배는 그동안 저질러 온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 잔혹하고 폭력적인 성정은 명백한 단점 중 하나였다.

하물며 가진 바 실력까지 뛰어나니, 어지간한 신랑감을 붙여놓으면 가정폭력의 희생양이 될 미래가 뻔했다.

그러던 와중에 시골 자작가의 차남에게 수치를 당했다는 황당한 소식까지 들려온 마당이었다.

라이넬라 백작은 곧장 결단을 내렸다.

엘시 선배가 더 사고를 쳐서, 혼인 시장에서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시집을 보내기로.

그렇게 시작된 라이넬라 백작의 노력은 얼마 전 결실을 맺었다.

엘시 선배의 약혼자가 정해졌고, 그 사이에 엘시 선배가 또 무슨 사고를 칠까 염려한 라이넬라 백작은 약혼을 서두르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 엘시 선배를 데려가기 위해 라이넬라 가문의 기사들이 방문한다는 것이, 오랜 시간 이어진 루핀의 설명이었다.

흐음, 하고 내 입에서 무거운 침음이 새어나왔다.

강제로 이루어진 약혼이었다. 심지어 라이넬라 백작은 서두르고 있다고 했으니, 제대로 된 상대를 고를 여유는 없었겠지.

내 뇌리에 비극적 운명에 처한 몇몇 여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하지도 않은데, 나이도 많고 성격도 나쁜 무능한 남자들에게 팔려가듯 약혼을 해야 하는 불행한 신세.

엘시 선배가 그렇게 되도록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진지한 낯빛으로 루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약혼자는? 혹시 나이가 많거나, 폭력적이라거나, 무능하거나…….”

“아니? 명문가 출신에 잘 생기고 미래도 창창한 공자님인데.”

라이넬라 백작은 상상 이상으로 유능했다.

루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김이 팍 새고 말았다. 그 허탈함을 달래기 위해 술잔에 술을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내가 신경 쓸 문제도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라이넬라 가문의 외인이었다. 아무리 엘시 선배와 친하더라도 이는 달라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야? 귀족 가문이 자식들 팔아치우듯 약혼시키는 일이 드문 것도 아니고… 상대도 그만하면 훌륭하네.”

“너, 너… 아직도 문제를 모르겠어?!”

어느덧 술기운에 얼근히 달아오른 얼굴로, 루핀은 쾅쾅 식탁을 내리치며 화를 냈다.

“억지로 결혼하는 거라고! 우리 누나가 펑펑 울었다니깐?! 자, 봐! 달래 보려다가 화끈하게 구워진 거!”

그러면서 루핀은 제 팔을 펼치며 초라한 제 몰골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어떡해?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어쩔 수 없는 숙명인데. 지금껏 남들보다 좋은 삶 누리게 한 대가로 가문을 위해 팔려나가는 거지, 뭐.”

내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부분을 짚고 있었다.

귀족 사회에서는 그 무엇보다 가문이 우선시 된다. 귀족 자제로 태어나 누리고 싶은 것을 잔뜩 누리고 사는 삶은, 가문의 후광이 있어야 지탱이 가능했다.

엘시 선배도 그랬을 터였다.

지금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시점이고.

솔직히 말해 속이 조금 울렁거렸지만, 나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하지만 그 상식적인 이야기가, 루핀을 더욱 분노케 했다.

“……가문이?”

울컥, 하고 무심코 흘린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 열기로 이글거리는 한 마디에, 나는 술잔을 기울이던 손을 멈칫하고 말았다. 루핀의 푸른 눈동자가 사납게 타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밀도의 감정이었다.

오랜 시간 농축된 분노와 증오만이 그러한 빛깔을 가질 수 있었다.

“가문이, 우리한테 뭘 해줬는데……?”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서, 도리어 풀어서 해명하기 힘든 문제.

그러지 않아도 취해 있던 내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놓는 답변이라곤, 더듬거리며 뱉어지는 뻔한 말들뿐이었다.

“그, 어… 뭐냐. 먹고 자고 하는 거? 그, 그런 것들 있잖아.”

“우리 부모님은, 아무것도 안 해줬어……!”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문에서 밥을 주고 잠을 재우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루핀이 지금 보이는 분노는, 차라리 라이넬라 가문에서 학대를 당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루핀은 취기에 젖어 본심을 털어놓았다.

“부모님한테 우리는, 투견장의 개였을 뿐이야… 던져놓고 가장 강한 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어린 시절에 얼마나 비참한 꼴을 당했는지 알아?”

그의 목소리에는 점점 더 강렬한 색채가 더해지고 있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에서는 맹렬한 아픔이 소용돌이쳤다.

“심심할 때마다 끌려가서 맞았어! 까닭도 없이, 단지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러다 부모님한테 일러바치면? 한 번 혼내고 끝이었지… 그리고 나는 그 보복으로 더 잔인하게 얻어맞아야 했고. 어쩔 때는 기르던 개와 싸움을 붙인 적도 있을 정도야… 그만하라고 그렇게 애원했었는데!”

전조도 없이 흘러넘치는 감정의 폭풍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루핀의 어느덧 비어버린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을 따름이었다.

그가 흘려야 했을 눈물을 대신해서.

“그때, 그때 날 지켜준 건 엘시 누나밖에 없었어… 나를 대신해 그 커다란 개랑 싸웠지. 처음에는 물리고 피를 줄줄 흘리는데, 싸우라 시킨 형이 더 기겁하더라고? 큭큭큭…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한참 뒤에 기사들이 도착했을 때, 엘시 누나는 개의 목을 졸라 죽인 뒤였어.”

그러면서 루핀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쿵, 하고 그의 머리가 탁자 위로 처박혔다.

그제야 나는 조심스레 루핀을 만류했다.

“루핀, 너 많이 취했다. 이만 돌아가야…….”

“이제 겨우 자유로워졌단 말이야!”

그렇게 바락바락 고함을 내지르며, 루핀은 술잔의 위스키를 단번에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술 냄새가 훅 풍겨올 정도였다.

“그런데 또 가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주제에, 이제 우수한 투견이 됐으니 제 값 받고 팔아치우고 싶단 말이야?!”

나는 그 절절한 목소리에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술잔을 기울이니 불길이 내 속을 불태웠다.

아마도 알콜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못해… 우리 누나보다 약해빠져서, 벼락이나 맞고 입을 다물어야 한단 말이야…….”

다시금 루핀은 힘없이 제 고개를 탁자 위로 떨구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숨김없는 진심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는 아니잖아, 너는… 우리 누나보다 강하잖아…….”

루핀이 굳이 나를 찾아온 까닭이란 고작 그 정도였다.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겠지. 아카데미를 통틀어도 엘시 선배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울고, 곯아떨어지며 루핀은 애잔하게 중얼거렸다.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해? 그게당신들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

라이넬라 가문의 가훈일 터였다. 귀족 가문이라면 마땅히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뻔하디 뻔한 말.

루핀은 그 말이 못내 괴로운지 잠이 든 채로도 신음했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의 위스키를 다 비울 때까지만.

“……술도 약한 놈이 허세는.”

끄응, 하고 몸을 일으킨 나는 루핀을 대충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내겐 사내놈과 동침하는 취미가 없었기에, 나는 자그마한 소파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새우잠을 자는 와중에도 나는 생각했다.

엘시 선배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그렇게 만취한 내 정신이 혼곤히 암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내가 다시금 제정신을 되찾았을 때.

“……그만.”

엘시 선배를 데리러 온 라이넬라 가문의 기사들 앞에서, 나는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따위 대사를 읊고 있었다.

“엘시 선배한테서, 그만 손 떼시죠.”

진짜로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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