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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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시 선배를 찾아가기로 한 것은 한없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눈을 뜨니, 나는 어느새 마룻바닥 위를 구르고 있었다. 전날 밤에 소파에서 자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하품을 하며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다행스럽게도 전날 밤에 수통을 채워놓는 일을 까먹지는 않은 듯했다.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던 내 눈이, 슬쩍 침대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기절하듯 잠든 루핀이 누워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한참 동안은 그렇게 혼절해 있을 듯했다. 그래도 자다 깨서 토라도 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묘하게도 맑은 정신이었다.
전날 밤 술자리에서 들었던, 그 구구절절한 루핀의 이야기가 모조리 떠올랐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자 물맛이 뚝 떨어졌다.
벌컥벌컥 물을 식도에 퍼붓던 나는, 이내 수통을 들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아직도 술기운이 증기처럼 남아 내 날숨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괴로운 과거 이야기였다.
루핀도 술에 잔뜩 취하지만 않았다면 이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고위 귀족 가문이라면 대개 그처럼 치부 하나쯤은 숨기고 있는 법이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인간보다 살과 피로 빚은 주판알에 가까웠으니까.
엘시 선배도 나와 부쩍 친해졌지만 그러한 과거를 밝힌 적은 없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전날 내가 매몰차게 거절했던 엘시 선배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그녀는 진정 내게 복수를 하려 했던 걸까.
아니라면, 단지 구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다시 가문이 정한 운명대로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도와달라고.
그날 내가 거절했던 것은, 부탁이 아니라 비명이었나?
뇌리가 달아오르며 사고가 얽히고설켰다. 두통을 동반한 숙취가 찾아왔다.
한동안 나는 말없이 이른 아침을 지켰다.
오랜 시간 고민했으나 내겐 아직 일말의 망설임이 남아있었다.
내 이름은 ‘이안 페르쿠스’였다. ‘이안 라이넬라’가 아니라.
내게 라이넬라 가문과 얽힐 요소 따위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국의 하급 귀족이 라이넬라 백작쯤 되는 명문가와 접점을 가질 일은 드물었다.
다시 말해, 나는 라이넬라 가문의 명백한 외인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행동에는 당위성이 필요했다.
명분을 갖추지 못하면 그 어떠한 행위도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힘들었다. 라이넬라 가문의 혼사를 가로막는 일이니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도 막중했다.
결국 답을 내릴 수 없던 나는 다시 냉수를 들이켰다.
그러던 내 눈에, 편지가 눈에 띈 것은 우연이었다.
네 번째로 받은 편지였다. 늘 품속에 넣고 다녔는데, 무슨 일인지 어젯밤 술을 마시던 탁자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한 모양이라고, 내 손이 다시금 편지지를 낚아챘다.
그 뒷면에 휘갈겨 써진 문장이 내 시야에 틀어박혔다.
‘버릴 것은 버려라.’
짧고 단순한 글귀였다. 그럼에도 나는 홀린 듯이 그 한 줄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엘시 선배는 내게 버려야 할 존재인가?
그렇지 않았다.
엘시 선배는 내 소중한 동료였다. 지금껏 함께 수많은 사선을 넘어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울컥 치달은 감정은 곧 동력원이 되었다.
검과 도끼를 챙기고 방을 나섰다.
걷고 걷다 보니, 어느덧 엘시 선배가 머무르고 있는 고위 귀족들의 기숙사 앞이었다. 아직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은 재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내 느닷없는 등장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카데미의 유명인사가 왜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찾아왔나 싶겠지.
심지어 술도 덜 깨서 퀭한 몰골로 말이다.
뒤늦은 수치심이 몰려들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나는 애써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지금부터 저지를 짓도 상당한 창피를 동반할 것이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너무 늦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기숙사의 정문으로 몇몇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권세 있는 귀족 가문의 기사들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듬직한 남성들 사이로, 유독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여인이 돋보였다.
풀이 죽어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소녀였다.
엘시 선배는 늘 그렇듯 고깔모자와 아카데미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마치 어제의 꽃단장이 거짓말이었다는 듯한 차림새였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 고깔모자가 아니었으면, 인의 장벽에 가려 엘시 선배를 보지 못할 뻔했으니까.
내 몸이 지연스레 기사들이 나아갈 길을 가로막았다.
“……그만.”
내가 내뱉은 한 마디에, 기사들이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울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던 엘시 선배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서도 엘시 선배는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떴다.
누가 봐도 얼떨떨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러든 말든 내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엘시 선배한테서, 그만 손 떼시죠.”
담백하고, 깔끔한 요구사항이었다.
설령 라이넬라 가문의 사정에 무지한 이들이 듣더라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벌써부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숙사 앞의 학생들은, 어느새 나와 기사들을 중심으로 원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흥미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내게 시선을 던졌다.
도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지를까, 하는 기대가 남긴 눈빛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 하는 내 신세가 서글펐다.
엘시는 호송하려던 기사 중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내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그가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야, 이 주정뱅이는…….”
“그게, 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부하로 보이는 기사가 귓속말을 하자 그의 태도는 일변했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라이넬라 가문의 기사라 하더라도 내 명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암흑교단은 인류의 적이었고, 나는 수백의 고아와 황녀를 구출한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기사는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페르쿠스 공자?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다소 당황스럽구려. 혹시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 물어도 되겠소?”
“말 그대로입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엘시 선배, 그대로 두고 가시죠. 저와 가야 할 곳이 있거든요.”
“……흐음, 약속이라?”
기사의 눈이 흘깃 엘시 선배를 향했다. 부연설명을 요청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엘시 선배는 내 등장 이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블루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가 못 박힌 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진작 했어야 할 말을 내뱉어 보기로 했다.
“단 둘이, 어디 가기로 했거든요. 그러는 김에 옷도 조금 갈아입고.”
전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엘시 선배가 이를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푸르른 눈동자에 흐릿한 물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엘시 선배는 눈을 비비며 몇 번이고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나였다.
그 사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니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엘시 선배는, 제가 데려갈 테니.”
기사들이 멀뚱멀뚱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의 죄라곤 엘시 선배의 심란한 기억을 들추어내지 못한 것과, 가주로부터 어떻게든 엘시 선배를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받은 것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아카데미의 뜨는 신성이 그들을 가로막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난감한 표정을 한 기사 하나가 내 걸음걸이를 가로막았다.
턱, 하고 솥뚜껑 같은 사내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얹어졌다.
“페르쿠스 공자,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라이넬라 가문의 중대사를 위한 임무를 수행 중, 이라……?”
그러나 사내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툭, 하고 내 어깨에 얹혀져 있던 사내의 손이 흘러내렸다.
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생각하고 있던 기사는 그대로 얼이 빠지고 말았다.
마치 공간이 왜곡되는 듯한 잔상만이 그 손에 잡히고 있을 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겠지.
그러라고 보여준 솜씨였다. 내 걸음은 계속해서 엘시 선배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한 기사 하나가 두 팔을 벌려 내 앞을 가로막았다.
“페르쿠스 공자! 아무리 친해도 외인이 가문의 행사에 간섭하는 건 너무 무례…….”
훅, 하고 철갑을 입은 거체의 사내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내가 전력으로 그의 장딴지를 후려찼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익스퍼트에 이른 내 완력은 통상적인 기사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허공에서 반쯤 회전한 채 철푸덕 쓰러졌다.
“크, 크으……?!”
고작해야 다리를 한 대 걷어차인 정도였다.
단련된 기사에게는 부상 축에도 들지 못하는 고통일 터였다. 그럼에도 기사는 주저앉은 채 얼빠진 눈빛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너무 막무가내로 나서고 있던 탓이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라이넬라 가문의 외인에 불과했다. 지금처럼 라이넬라 가문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참견할 권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기사들은 이러한 내 행동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노기 어린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페르쿠스 공자! 자꾸 이러면 우리도…….”
“긴 말 말고 덤비시죠.”
내 당당한 태도에 소리를 내지르던 기사는 도리어 주춤하고 말았다.
그를 노려보는 내 눈동자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아니면, 엘시 선배를 두고 가든가.”
“모욕도 정도껏 해야지……!”
결국 참지 못한 기사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남은 기사는, 이제 셋.
그들을 처리할 때까지는 이제 몇 초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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