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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19화 (219/649)

〈 21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2)

* *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달린 기사의 몸뚱아리는 은빛의 포탄과 같은 속도로 날아왔다. 파공성이 울리기도 전에, 이미 지척.

그가 휘두른 주먹이 대기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나는 슬쩍 상반신을 뒤로 눕혔다. 아슬아슬하게 내 앞을 스쳐지나간 주먹의 뒤를, 내 손이 휘감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앗, 하는 소리를 낼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곧 그의 마지막 반항이 되었다.

쿵, 하고 전력으로 업어 메쳐진 기사의 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올랐다.

부릅떠진 기사의 눈이 그 통증을 증언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로, 그는 한 줌의 핏물을 토해냈다.

뒤이어 두 명의 기사가 내게 달려들었다.

무장 없이 내게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검집을 씌운 칼로 나를 제압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무장을 활용하는 근접 박투는 내 전문 분야였다.

벼락같이 내지른 내 검집이, 교차하는 두 검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톱니바퀴 사이의 돌멩이처럼 정교한 합공을 막아내는 수였다.

그들이 당황한 사이, 나는 고정된 검집에서 칼날을 뽑아냈다.

진검을 앞에 둔 검사는 더욱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일순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기사들의 눈이 공포로 젖어들었다. 당장 내가 칼을 휘두르기만 하면, 그들의 목을 베어낼 수도 있었다.

당연히 내가 그럴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 나는 교차된 두 칼집 사이에 낀 내 검집을 발로 차올렸다.

두 기사의 검이 함께 퉁겨졌다. 그들이 당황한 틈을 타서, 나는 검 손잡이의 뭉툭한 끝을 기사 하나의 목덜미에 박아 넣었다.

콱, 하고 틀어박힌 검 손잡이가 내 완력을 그대로 충격으로 치환했다.

이를 얻어맞은 기사의 초점이 급격히 흔들리더니, 이내그의 신형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이 새끼가!”

그렇게 발악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마지막으로 남은 기사가 검을 내리그었다.

그가 간과했던 사실은, 내 손에도 검이 들려 있다는 점이었다.

얌전히 그 일격에 당해줄 만큼 나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캉, 하고 날붙이와 검집이 충돌하며 불꽃을 허공에 튀겼다. 그때쯤 하늘에서 핑그르르 돌고 있던 내 검집이 낙하운동을 시작했다.

내 손이 그 검집을 낚아챘다.

다시 한 번 검이 날아들자, 나는 또 다시 진검으로 그 칼집을 쳐냈다. 그리고 그대로 회전하듯 품을 파고들어 검집을 휘둘렀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사내의 관자놀이에 검집이 틀어박혔다.

그가 쓰러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기사가 연달아 쓰러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내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는지, 주저앉아 있던 기사들의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당연히 몰랐을 테지.

내가 익스퍼트에 올랐다는 사실은, 미트람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암흑사제는 지금 감감무소식이었다.

내 본 실력이 알려졌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 의외성을 노려 기사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다.

“무, 무슨 아카데미 3학년이…….”

최근 들어 많이 듣는 질문을 뒤로 하고, 나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이제 엘시 선배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내 어깨를 놓친 기사 하나만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뿐이었다.

“이는 명예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페르쿠스 공자!”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일단 물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랜만에 주는 포상이었다.

“괜찮아요, 엘시 선배?”

“……읏!”

엘시 선배는 울컥, 하고 더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녀는 제 모자를 꾹 눌러쓰며, 모자챙을 쥐어짜듯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약혼을 하기 싫었던 걸까.

상대는 젊고 미래도 창창한 명문가의 도련님이라는데, 하여간 엘시 선배의 취향도 독특했다.

나는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부, 분명… 흐윽, 데, 데이트… 흑, 하기 싫다고오…….”

“당연히 농담이었죠.”

물론 그때는 농담이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탄 내 입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버무리다 못해 숨기고 있던 진심마저 전했을 정도였다.

“왜 엘시 선배와 데이트를 하기 싫겠어요?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왔는데.”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엘시 선배는 결국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만큼이나 마음의 상처가 컸던 모양이었다.

그야 여자 쪽에서 용기를 내서 제안했는데, 그토록 매몰찬 거절의 말을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엘시 선배도 여자였으니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엘시 선배의 모습은 유독 사랑스러웠다.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를 달래 주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이 귀여운 여자를 울린 쓰레기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직도 바락바락 목청을 높이는 기사가 하나 남아있었다.

“정식으로 페르쿠스 가문에 항의하겠습니다! 라이넬라 가문의 행사를, 어찌 아무 관련도 없는 타인이…….”

“관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내 태연한 대답에 곧장 가라앉고 말았다.

기사는 멍청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관련이 있다니, 네가?’

그러한 의문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시선이라,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시 선배의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

엘시 선배가 어어, 하는 사이 그녀의 머리는 내 품에 폭 안기고 말았다.

“……저와 엘시 선배는, ‘특별한 사이’거든요.”

그야말로 고육지책에 불과한 수였다.

제국과 왕국을 막론하고, 귀족 가문 사이에는 불문율이 하나 존재했다.

‘절대로 남의 가문에 간섭하지 말라.’

이는 무척이나 오랜 전통을 가진 규율이라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암묵적 규칙에도 불구하고 엘시 선배의 혼삿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를 정당화시킬 명분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짜낼 수 있는 수단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 또한 희생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희생한 것은, 바로 ‘진실’이었다.

“트, 특별한 관계……?”

기사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안색은 창백해져 있었다. 그가간절한 눈빛을 엘시에게 보냈다.

제발 부정해 달라는 소망이 담긴 눈동자였다.

귀족 가문이 내거는 약혼의 조건에는, 으레 정절의 의무가 포함되기 마련이었다.

만약 연인이 존재한다면 그에 따른 추가적인 조율이 필수적이었다. 그렇다면지금 당장 엘시 선배를 데려갈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애초에 내가 한 말 자체가 거짓이었다. 라이넬라 가문이 사전에 엘시 선배의 '연인'을 파악해 두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곧 희비가 갈리기 시작했다.

절망에 잠긴 기사와는 달리,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은 탄성을 터트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쏟아져 내리는 박수 소리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특히 몇몇 여자들은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자그마한 소란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열애담이란 전통적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넓은 인기를 끄는 소재였다.

오늘 벌어진 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 전역으로 퍼져나갈 예정이었다. 방학이라 돌아간 학생들이 많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성공적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그리고 나와 엘시 선배의 열애담이 낭만적으로 여겨질수록, 라이넬라 백작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토록 사랑하는 두 연인을 찢어놓은 냉혈한이 되는 것까지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나와 엘시 선배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이미 있는 귀족 영애였다.상식적으로 귀족 가문이 비싼 값까지 지불하며 데려올 까닭이 없었다.

명백한 계산 착오였다.

라이넬라 백작은 새로운 혼담을 얻어내기 위해 한동안 머리를 쥐어짜내야 할 터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도 만족스러운 혼처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지금 내 마음에 걸리는 점 중 하나는, 바로 엘시 선배였다.

라이넬라 백작이 겪을 난항은 곧 엘시 선배가 마주할 문제이기도 했다.

나중에 엘시 선배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오늘의 일이 두고두고 발목을 붙잡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겠지만 말이다.

결국 칼은 엘시 선배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들이 엘시 선배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마다 품고 있는 감정만은 달랐으나, 엘시 선배의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점만큼 동일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제발, 엘시 선배. 눈치 좀 채 주세요.

그러나 느닷없이 내 품에 안긴 엘시 선배는,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엘시 선배로부터 반응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더니, 이내 펑, 하고 연기가 터져 나오는 착각이 일 만큼 새빨개졌다.

엘시 선배는 더듬거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내, 내, 내가?! 나, 나는… 그, 그러니까?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어, 어라아?"

듣기만 해도 엘시 선배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절이 느낄 수 있는 중얼거림이었다.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내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벌써 창피는 당할 대로 당했는데, 마지막에 계획이 어그러지지는 않겠지?

내 간절한 마음에 응답하듯, 엘시 선배는 곧 탄성을 내질렀다.

"……아, 아앗! 마, 맞아!"

결국에는 눈치 챘구나, 엘시 선배.

나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엘시 선배는 곧 내 품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라이넬라 가문의 기사에게 말했다.

"맞아, '특별한 관계'."

털썩, 하고 비참한 현실을 견디지 못한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멍하니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에는 짙은 절망이 어려 있었다.

반면 기숙사 앞에 모여든 구경꾼들은 더욱 큰 환호성으로 화답하고 있었다. 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엘시 선배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나, 나…이안 님을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거든!"

그 당당한 선언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절망에 빠져 땅바닥을 내려보고 있던 기사의 고개가 슬그머니 들렸다. 그의 눈빛에는, 충격과 공포를 넘어선 어떠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신이었다.

이는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뜨였다. 그만큼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발언이었다.

예전에도 엘시 선배가 내게 '주인님'이라 부른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곧장 엘시 선배를 데리고 도망쳤기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있었다.

엘시 선배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다들 말도 안 되는 환청을 들었다 치부하고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었고, 그 앞에서 엘시 선배는 당당히 선언하고 만 것이다.

이안 페르쿠스가 엘시 라이넬라의 주인님이라는 사실을.

나조차도 눈을 부릅뜬 채, 입술을 떼고 닫기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머리가 새하얘졌다.

엘시 선배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자,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허둥대고 있던 그녀는 곧,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양 어색하게 내 가슴팍에 머리를 부볐다.

그리고 또 한 마디.

"……멍멍?"

끝났다.

내 손이 낯가죽을 훑었고, 엘시 선배의 선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다하게 퍼져나가고 말 터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얼마 가지 않아 증명되었다.

이 다음으로 찾아간 성녀의 귀에도 오늘의 사건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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