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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20화 (220/649)

〈 22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3)

* * *

성녀는 전날 밤을 눈물로 적셨다.

지금껏 수많은 관심을 받아왔던 성녀였으나, 정작 연애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성녀로서 연애를 하게 되리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대개의 인간은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누군가를 연민한 적은 있어도 사랑한 적은 없다.

만약 성녀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운운한다면 이는 필시 종교적인 사랑이어야 했다. 그만큼이나 천신교의 성녀로서 지녀야 할 정조의식은 투철했다.

하지만 어느 사내를 만난 이후, 성녀의 세계는 일변했다.

난생 처음으로 이성적 호감을 품게 된 것이다.

색다른 일상이었다.

누구 하나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성녀는 매일매일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첫사랑에 빠진 소녀가 으레 그렇듯이.

성녀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그만큼이나 연애 면에서만큼은 순백의 도화지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성녀였다.

그녀는 남녀가 어떻게 거리를 좁혀 연인이 되는지, 그리고 연인이 된 이후에는 어떻게 진도를 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어제 들었던 이야기는 성녀에게 더욱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먹버’라니, 그 불쌍한 여자 중 하나가 성녀란 말인가.

물론 이안이 찾아오지 않은 시간은, 이제 고작 사흘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보인 이안의 행적을 볼 때 그가 악의를 가지고 접근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어 찾아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고, 당장 오늘 찾아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늘 이성을 추종하지만은 않는다.

첫사랑에 빠진 성녀는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어느덧 가슴 한 켠을 채운 불안감에 성녀를 속으로 몇 번이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녀는 이별이 너무나 무서워 차라리 마음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그래. 기대하지 말자.

세상에 남자는 많았다. 이안은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다. 오직 하나.

성녀의 인생에, 유일한 첫사랑.

사랑에 빠진 여인의 사고방식은 늘 이따위였다.

성녀는 또 다시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지난밤 성녀의 베갯잇이 푹 젖어버린 전말이었다.

그래도 다음날 햇살을 맞으며 업무에 복귀하니, 성녀는 조금 진정이 되는 느낌이었다.

종일 울적하고 퀭한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생각해 보면 성녀는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이성적으로 관심을 보인 남자는 널리고 널렸다. 정작 성녀가 이성적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가 없어서 그렇지.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때 조건도 남달랐다.

천신교의 성녀라는 신분에, 신이 빚은 예술품이라는 찬사를 듣는 외모까지.

조금 반반한 시골 귀족 가문의 차남이 감히 노릴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아니, 이안은 반반할뿐더러 정의롭고 용감하며 듬직하기도 했지만.

아니, 아니. 한결같고 강인한 정신력을 지니고 있으며 약자를 사랑하는 청년이기도 했지만.

결국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다시금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나쁜 놈, 쓰레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당장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엉엉 울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성녀의 귀에 느닷없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때였다.

“이, 이안이 엘시 자매님의 약혼에 훼방을 놓았다고요?”

“그렇다니까요, 글쎄! 그 라이넬라 가문의 호위 기사들이 상대도 안 되더라고요. 얼마나 강하던지…….”

본래 남들 앞에서는 ‘이안 형제님’이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붙이던 성녀였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그래야 한다는 사실마저 까먹었을 정도였다.

성녀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람은 기숙사에서 일하고 있는 사용인 중 하나였다.

벌써 20년째 아카데미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그녀는, 늘 학생들의 이야기를 하지 못해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요리를 하다 입은 화상을 치료하러 왔을 때조차 소문을 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필 그 소문이 오늘 오전에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라서 문제였을 뿐.

성녀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런데 웃긴 게, 그 이후에 라이넬라 아가씨가 뭐라 했는 줄 알아요? 푸흐흐, ‘멍멍’이라고 하대요. 자기가 애완동물이라고! 그 자존심 강한 라이넬라 아가씨가!”

그러면서 중년의 여인은 박장대소를 터트렸지만 성녀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중년의 여인이 떠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성녀는 얼이 빠져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희미한 울먹임이 새어나왔다.

“나, 나는 신경도 안 썼으면서…….”

사흘 동안 찾아오지도 않았는데, 그 시간 동안 이안은 다른 여자를 신경 쓰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가슴까지 만졌으면서!

성녀는 슬프다 못해 분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얼른 눈가를 훔쳐내며, 속으로 이안을 향해 온갖 비방을 쏟아냈다.

바람둥이, 여자의 적, 인간쓰레기.

그러나 아무리 이안을 욕해도 미어지는 가슴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성녀는 조퇴라도 하고 방에서 홀로 펑펑 눈물을 쏟고 싶었다.

유렌의 목소리가 성녀의 귓전에 내리꽂힌 것은 그 직후였다.

“누님, 이안이 찾아왔는데요?”

“만날 기분 아니라… 아니, 아니! 누, 누구라고?”

처음에 성녀는 무심코 울적한 축객령을 내릴 뻔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직전에 성녀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유렌이 전하는 진실은 담백하고 한결같았다.

“이안이 찾아왔다고요! 누님이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던…….”

“아, 아아아아! 아, 알겠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성녀는 부끄러운 비밀을 폭로하려는 유렌의 입을 일단 틀어막고, 재빨리 제 모습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우선 눈물은 닦아냈고.

머리카락과 옷매무새까지 정돈하고 나서야 성녀는 약간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 제까짓 게 날 버리고 갈 수 있겠어?

난 성녀인데.

극적인 반전에 성녀는 그만 우쭐해지고 말았다. 도도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 성녀는, 그제야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발화할 수 있었다.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곧 문이 열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지닌 사내였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도 없이 본 얼굴이었지만, 성녀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반가워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다.

이안 페르쿠스, 지난 며칠간 성녀로 하여금 마음을 졸이게 한 원인이었다.

그는 성녀와 달리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다만 조금 넋이 빠진 듯한 몰골로 한숨만 몇 번 내쉬었을 뿐, 그 까닭이 궁금했으나 성녀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반가움이 가시고 나니 이안이 괘씸해졌기 때문이었다.

순결한 처녀의 젖가슴을 희롱하고 이제야 찾아오다니?

종교재판을 열어도 모자란 중죄였다.

최소한 성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헛기침을 했다.

"……오랜만이네요?"

은근히 가시가 돋친 말이었다.

성녀가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낸 셈이었으나, 멍하니 앉아있던 이안은 그 마음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다만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됐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흐릿하게 잠겨 있는 그 목소리는, 고뇌에 찬 사내의 금빛 눈동자와 어우러지며 우수에 찬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성녀의 가슴이 일순 크게 뛰었다.

멋있다. 이대로 봐줄까?

망막에 사랑의 마법이 덧씌워진 성녀는 이안이 무슨 짓을 해도 멋져 보였다. 무심코 굳은 결심이 흔들릴 뻔했으나, 성녀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리 연애에 무지해도 주워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좋다고 해서 무작정 봐주기 시작하면 그 끝은 파멸뿐이었다. 본격적으로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 시점부터 관계의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었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다만 성녀는 이안을 그동안 보지 못해 서운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가 부끄러워, 상대가 이를 알아서 알아주기를 바랐다.

잠시 몽롱해졌던 성녀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크흠, 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그동안 바빴나 봐요?”

“뭐, 여러 가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이 있던 모양입니다.”

판에 박힌 변명이었다.

본인이 한 일을 본인이 모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처럼 뻔한 변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밝히기 싫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성녀는 못내 더 서운했다.

성녀는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싶은데, 이안은 그렇지 않은 것만 같아서.

그래서 성녀는 뾰로통해져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참나, 용건은 그것뿐이에요? 오랜만에 인사 나누기?”

이안을 마주한 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성녀의 서운한 마음을 만족시키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도리어 종일 함께 있더라도 성녀의 분은 풀리지 않을 터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앞으로 영원히 함께 있어야 마음이 풀릴까.

그러나 그 진심을 내뱉기에는 성녀의 용기가 너무니 부족했다.

성녀는 내심 이안이 그 말을 부정하며 쩔쩔매주기를 바랐다. 이는 성녀가 품을 수 있는 당연한 기대 중 하나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남녀관계에서 열위에 서 본 적이 없었다.

평생 동안 우위에 서 있던 여인이었다.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질척거린다거나, 매달려야 한다는 상상을 하기는 힘들었다.

만약 성녀가 사랑한 상대가 범상한 인간이었다면 그 소망은 이루어졌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상대는 이안 페르쿠스였고,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전의 ‘엘시 라이넬라 멍멍 사건’에 심대한 정신적 타격을 받은 탓이었다.

그에게 남의 마음을 읽어낼 여유는 남아있지 못했다.

“……네, 그것뿐입니다.”

“흥, 당연히 그럴 리가 없… 네, 네?”

이안의 무심한 대답에 성녀는 깜짝 놀라 그렇게 되물었다.

동그랗게 뜨인 그 연분홍빛 눈동자가 불신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이안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제 한동안 만나 뵙기 힘들 테니까요.”

성녀는 얼이 빠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이대로 떠나간단 말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성녀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이제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네, 그래서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안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켰다.

성녀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그녀가 기대하고 있던 재회는 이렇지 않았다.

조금 더 내밀하고 새콤달콤한 만남이 될 줄 알았다.

그러다 보면 늘 그렇듯 자연스레 마음도 풀어지고, 웃고 떠들면서 무언가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안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성녀는 당황스럽다 못해 살짝 눈물이 나올 뻔했다.

“저, 그… 그것뿐이에요?”

궁여지책으로 짜낸 한 마디는 그 정도에 불과했다.

이에 따르는 사내의 반응은 단순했다.

두어 번 고개를 끄덕거리며 깊이 고개를 숙였을 따름이었다.

“네,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려야 하니까요.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사내는 진료실을 떠나갔다.

난생 처음 겪는 사건에 성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껏 남자들이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인 적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이 정반대의 입장에 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사이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를 깨닫자마자 성녀의 눈에 다시금 물기가 돌았다. 그동안 부정해왔던 가능성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 먹버 당한 거야……?”

성녀는 결국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남녀관계에 무지한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질척거리고, 달라붙어야 진정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에 이르러 성녀는 시인하고 말았다.

말도 안 되고, 웃기는 이야기였지만 지금 성녀는 열위에 있었다.

그것도 남녀관계에서 열위에.

성녀는 결국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나, 나 버림받은 거냐고오…….”

이 또한 첫 실연의 눈물이 가신 이후의 이야기였으나 말이다.

**

길은 멀고도 가까웠다.

사실 나는 지금 사고회로가 마비되어 있었다. 당장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사고로 머리가 꽉 차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었다.

이제 끝이었다.

엘시 선배의 혼삿길은 완전히 막혔다.

연인까지는 그렇다 쳐도, 애완동물을 자처하는 여자를 데려갈 가문이 존재할 리는 없었다. 만일 그러한 가문이 존재한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었다.

페르쿠스 가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엘시 선배와 함께 가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성녀를 만날 때까지도 멍하니 답을 읊는 수밖에 없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지 않았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나 암청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를 만난 그 찰나.

“……멍, 멍멍!”

나는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황녀 전하, 혹시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습니까?”

소녀는 곧장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엘시 선배와 성녀가 이상해지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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