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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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핀잔에 황녀는 곧장 풀이 죽고 말았다.
물론 그 노력까지는 폄하하고 싶지 않았다. 황녀는 나름대로 강아지를 흉내 내 보겠다고 앙증맞은 자세까지 취해 보였다.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그만한 굴욕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다.
제국의 하급 귀족 앞에서 황족이 강아지 시늉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명백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지금 내 앞에서 재롱을 부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아지란 본능적으로 인간의 애정을 갈구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나마 길을 오고가는 행인들이 없어서 망정이었다. 만일 방학이 시작되기 전의 아카데미였다면, 또 다시 황녀의 명예는 진흙탕에 처박혔으리라.
황녀가 강아지 흉내를 낸다는 것은 그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황녀가 왜 이러는지 까닭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다만 어여쁜 소녀가 귀여운 짓을 하고 있으니, 객관적으로 볼 때 귀엽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오전의 사건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엘시 선배의 애완동물 선언으로 두통이 일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황녀까지 그 기억을 쿡쿡 찌르고 있으니, 내게서 좋은 반응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반응이 좋지 않자 황녀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 소문에 따르면 이안 경이 여자를 강아지 취급하기를 즐기신다고…….”
“절대 아닙니다!”
나는 터무니없는 오해에 무심코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황녀는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거, 다 헛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해가 있었는데…….”
“……아, 아아!”
유심히 연회색 동공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던 황녀는,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밀이었군요! 그럴 만도 해요. 그럼 강아지 흉내는 단 둘이 있을 때만…….”
“황녀 전하.”
황녀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어느덧 내 목소리는 서늘해져 있었다.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으십니까?”
소녀는 결국 또 다시 어깨를 축 늘어트려야 했다.
“미, 미안해요. 이안 경… 오늘따라 우울해 보이길래, 이안 경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어요.”
“그 배려의 결과가 강아지 흉내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안 경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해드릴 수 있어요!”
우쭐한 기색으로 황녀의 몸이 꼿꼿이 펴졌다.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가 못내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무엇이 자랑스러운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무,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러니까, 정 강아지가 필요하시다면 엘시 양 말고…….”
“아니라니까요.”
“……네, 넷.”
그러나 황녀의 기세등등한 표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추었다. 내 입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탓이었다.
황녀는 움츠러든 자세로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나쁜 뜻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니, 더 화를 내기는 힘들었다. 결국 내 입에서는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나는 황녀에게 본질적인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용건은 그것뿐입니까? 고작 제 기분을 풀어주겠다고 황녀 전하께서 일부러 발걸음 하실 것까지는…….”
“무, 물론 저 따위가 이안 경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의기소침한 변명이었다.
다소 울적해진 황녀의 낯빛에는 후회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애초에 첫 만남이 좋지 않았으니, 그 이후로 황녀를 나를 마주할 때마다 저자세를 보였다.
이미 나는 황녀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이미 아무런 감정이 없음에도 그랬다.
솔직히 여동생의 상단이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화가 났긴 했다.
하지만 때마침 내게 건네진 여동생의 편지는 내 분노를 잠재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비록 여동생이 대외비라 해서 아직 밝히지는 못했으나, 여동생은 아직 건재했다.
상단이 파산해 짜증이 났을지언정 치명타는 피해낸 것이다.
여동생은 늘 그랬다.
수완이 워낙 좋아서, 언제나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하곤 했다. 파고를 온전히 받아넘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앉아서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이 맞이할 성격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영지에 돌아가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테지만 말이다.
편지에 짤막한 글귀로 쓰여 있던 ‘두고 보라’라는 경고를 떠올리자, 저절로 내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못난 오빠를 둔 여동생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편지 내용을 알 턱이 없는 황녀는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저… 이안 경, 혹시 아이린이 어디 갔는지 아시나요?”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이린’이라,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도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나 싶어 나는 황녀에게 되물었다.
“……‘아이린’이라니요?”
“앗! 그, 그러니까 늘 제 곁에 있던 여기사 말이에요.”
황녀는 내 의아한 테도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재빨리 보충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 덕에 내 머리 한 켠을 스치는 인물이 하나 떠올랐다.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미모의 여기사.
얼핏 보기에 황녀의 최측근으로 보였는데, 그 행방을 내게 묻다니 더더욱 의문이었다. 나는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물었다.
“그분의 행방을 왜 제게 물으시는지……?”
황녀는 내 질문에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가, 허둥지둥 하며 알고 있던 정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 어라? 아이린이 분명 이안 경을 뵈러 간다고 그랬는데…….”
아무래도 그 ‘아이린’이라는 기사는 나를 찾아온 듯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으나, 지금으로서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은 하나뿐이었다.
여기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내게는 그러한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나는 또 다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황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게 언제였습니까?”
황녀는 혹여 내 심기를 상하게 했나 싶어 불안한 눈빛이었다.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이내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틀 전이었는데요…….”
그럴 줄 알았다.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나는 머리를 짚었다.
이틀 전이라면 내가 아직 정신을 차리기 전이었다.
즉, 아이린 경은 내가 아니라 미래에서 온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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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이린 경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기억도 증발한 뒤였고, ‘나’와 아이린 경이 마주쳤을 당시의 목격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미궁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그 문제에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다만 ‘나’를 만나고 난 이후, 아이린 경이 기사 수행을 떠나겠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겼다니 재회의 날을 가늠해 볼 뿐이었다.
언젠가 아이린 경을 본다면 그제야 그날의 진실을 듣게 될 터였다.
이제 내일이면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해질녘, 나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네야 할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바로 연금학부의 엠마였다.
지난 습격 때도 엠마의 물약 덕에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지난 몇 달 동안 나와 엠마는 부쩍 가까워졌으니, 떠나기 전에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는 것이 도리였다.
다만 내게는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내가 지금껏 엠마를 찾아가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가시처럼 심장에 틀어박힌 불안감으로부터 기인하고 있었다.
루페시아 영애는 나에게 엠마를 찾아가 볼 것을 권했다.
내가 퇴원하던 날, 엠마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상냥하고 걱정이 많은 그녀였다. 당연히 친한 친구의 퇴원일을 몰랐을 리는 없었다. 당연히 나는 그날 엠마와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엠마는 나를 보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으리란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름 아닌 엠마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한편으로 엠마가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타인에게 상냥한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한 여인이었다.
사소한 오해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겠지.
다소 조급한 걸음으로 나는 엠마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일단 엠마는 기숙사에 없었다.
그렇다면 엠마가 향할 곳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내 길은 엠마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연금학부의 연구동은 방학인데도 인기척이 남아 있었다.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더라도 연구 설비를 갖추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카데미에 남아 연구를 지속하는 편이 더 나았다.
이곳에 남은 학생 중 상당수는, 그러한 사정을 가진 평민일 터였다.
다행스럽게도 엠마 또한 그중 하나에 속하는 듯했다.
엠마의 공방에서는 흐릿한 약 냄새가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최소한 얼마 전까지 공방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는 뜻이었다.
아직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 목격담을 종합해 볼 때, 엠마가 공방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명료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공방의 문을 두드렸다.
“엠마, 나야.”
똑똑, 하고 울려 퍼지는 소음과 함께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혹시 나를 보고 싶지 않은 걸까.
옅은 불안감에 젖은 내 몸짓이 조금 더 가빠졌다. 똑똑똑, 다시금 내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엠마, 괜찮아? 아무래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몇 번이나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러도 엠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순 나는 지금껏 들었던 목격 증언을 의심했다.
혹시 엠마는 다시 공방을 떠난 걸까?
마력이 전신에 퍼져 나가며 감각이 예민해졌다. 곤두선 신경 말단이 일제히 문 너머의 광경을 비추고 있었다.
문 너머는 고요했다. 희미한 약 냄새가 흘러나왔고, 액체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외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내가 익스퍼트에 이르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한 단계 발전한 내 감각은 기어코 내가 원하던 조짐을 포착해 냈다.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그 기세는 너무나 옅어서, 공방 안에 아무런 사람도 없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건강한 인간이 내쉬는 호흡이 아니었다.
내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엠마? 괜찮은 거 맞아?”
공방 안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만약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면,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엠마에게서는 어떠한 반응도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한 결론을 내린 내 머리가 새하얘졌다.
“엠마!”
나는 곧바로 마력을 담은 발길질로 문을 차버렸다. 쾅, 하는 폭음이 터져 나오며 산산조각 난 문의 파편이 비산했다.
다급히 문짝을 뜯어내고 들어선 내 눈에 공방 안의 풍광이 스쳤다.
수없이 많은 연구 자료와 연금학 재료들, 끓고 있는 물약이 엠마의 연구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창백한 낯빛으로 쓰러진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하나.
엠마가 혼절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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