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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22화 (222/649)

〈 22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5)

* * *

“……엠마!”

화들짝 놀란 내 입에서 황망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느닷없이 친구가 쓰러져 있더라도 놀랄 일이었다. 심지어 엠마는 내게 그보다도 더 각별한 존재였다.

미래에서 편지가 날아온 이후, 처음으로 잃을 뻔했던 사람이었다.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엠마가 다시 새하얘진 안색으로 쓰러져 있으니, 내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불길한 악몽이 떠올랐다.

창자를 쏟은 이후, 아무런 말도 없이 창백한 낯빛으로 누워만 있던 엠마의 모습이.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엠마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숨소리가 희미하긴 했으나 안정적이었다. 당장 죽을 위기에 처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지 못해,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엠마가 만들어 둔 물약 중 쓸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엠마의 공방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예전에는 익숙한 물약이 조금이나마 보였다면, 지금 엠마의 물약진열대에 남은 물약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못해도 일주일은 날밤을 새며 만들어야 할 양이었다.

저 많은 물약들을 엠마가 만들어야 할 까닭이 있었을까?

그 답을 알 수 없었던 내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고민에 잠길 시간조차 사치에 불과했다.

나는 엠마를 품에 안고,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사람을 부르거나 신전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혼절을 할 정도라면 최소한 몸이 많이 상했다는 뜻이었으니까.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더라도 전문가의 의견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게 내가 엠마를 끌어안은 채 바로 서자, 비로소 엠마의 입에서 흐릿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이, 이아안… 흐으으…….”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말조차 내 이름이었다.

엠마가 무슨 마음가짐으로 물약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최소한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점은 명료해 보였다.

더욱 내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엠마가 의식을 되찾을 수 있도록 다급히 말을 건넸다.

“엠마, 엠마! 정신이 들어?!”

“나, 나는… 으으으…….”

파르르 떨리던 엠마의 눈꺼풀이 열렸다.

그 연녹색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빛무리에 엠마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서서히 시야를 되찾고 넋을 놓고 말았다.

엠마는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얼떨떨한 눈빛으로 제 몸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엠마는, 곧 얼빠진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혹시 꿈이야?”

“아니, 엠마. 이건 현실이야.”

나는 우선 엠마가 정신을 되찾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혹여 엠마가 다시 의식을 잃을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너는 방금 전까지 혼절해 있었고…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심장이 덜컥거리는 경험을 한 내 입에서는 끝내 책망의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뱉어놓고 보니 조금 미안하긴 했다.

사실 엠마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죄가 있다면, 그토록 무리할 만한 이유를 제공한 사람에게 있을 터였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나의 탓이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다 말고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엠마를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그러든 말든, 엠마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게 꿈이 아니라고?”

“응, 현실이야.”

그럼에도 엠마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나 이안의 품에 안겨 있는데?”

“……그게 왜?”

설마 기분 나빴나?

하기야 엠마도 한창 때의 처녀였다. 당연히 외간 남자가 몸에 손을 대는 데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정을 설명하면 엠마가 나를 탓할 리는 없겠지만, 지금 막 눈을 뜬 상태에서는 당황스러울 터였다.

그렇게 내가 살짝 풀이 죽을 무렵이었다.

엠마는 달아오른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더니, 이내 행복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아…….”

아니, 죽으면 안 되지.

기껏 살려놓은 목숨을 버리겠다는 엠마의 말에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엠마가 그렇게 좋다면 나도 좋았다.

한참이나 서로의 체온을 만끽한 뒤에야, 비로소 엠마는 소심한 몸짓으로 땅 위에 내려섰다.

새빨개진 얼굴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귓불까지 붉어진 채 내게 더듬더듬 인사를 건넸다.

“……오, 오랜만이야. 이안.”

“그래, 엠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 퇴원할 때 얼굴도 안 비추고.”

엠마가 두 다리로 서는 모습을 본 다음에야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내게, 엠마는 우물쭈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물약 과다복용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대답에 나는 무어라 한 마디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돌부리가 뇌리에 틀어박힌 듯 답답했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 것 같은데, 엠마를 설득해 내야 할 것만 같은데 내 말솜씨는 그다지 유려하지 못했다.

다만 엠마의 마음만을 짐작했을 뿐이다.

내가 기어코 짜낸 말은 짧았다.

“……네 잘못 아니야.”

“으응, 아니야. 오히려 깨달았어. 내가 지금껏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생활비까지 아껴가며 물약을 만들어 내게 도움을 주었다.

엠마의 이러한 헌신에는 이기적이라 꼬집을 수 있는 지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엠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껏 이기적으로 굴었노라고.

이를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우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엠마…….”

“무작정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

엠마는 잔뜩 주눅이 들어, 그렇게 본심을 털어놓았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물약을 만드는 것뿐이니까… 네 곁에서 싸울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물약을 잔뜩 챙겨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 외에도 엠마가 내게 해준 것은 많았다.

아프다고 했을 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고, 루페시아 영애를 설득해 보겠다고 며칠 동안 병문안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엠마는 그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었어. 내가 널 위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너를 망치고 있었던 거야. 물약 과다복용이라니… 왜 그걸 고려하지 못했을까.”

“네 잘못 아니야.”

나는 다시금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내가 선택한 거야. 어떻게 될 줄 몰라서 내린 결정도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그러지 않았다면 승리를 따내지도 못했겠지.”

“……이안.”

망설이면서, 엠마는 내 이름을 불렀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애절했다.

“넌 대단한 사람이야. 이제 아카데미 내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곧 온 대륙이 네 활약을 듣게 되겠지. 그런데 그에 비해서, 나는 그냥… 평민 계집애잖아. 하는 짓이라곤 쓰러져서 네게 1만 골드짜리 은혜를 입거나, 괴롭힘 당할 때 네게 도움만 받고…….”

“단순한 평민 계집애가 아니라, ‘엠마’잖아.”

내가 엠마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곤 그러한 진심밖에 없었다.

의외의 말이었는지 엠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니까 소중하고 특별한 거야. 평민이니, 도움만 받는다느니… 제발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마. 그리고 1만 골드도 잊으랬잖아.”

“……어떻게 그래.”

침묵 속에서 내 말을 꾸역꾸역 듣고 있던 엠마는, 그렇게 말하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 귀찮은 여자라서 절대 그런 거 잊지 않거든. 그리고 이대로 가면 네 옆에 설 자격조차 잃어버리는 거니까…….”

엠마의 눈동자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주전자를 향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끓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미세한 차이로 효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 물약 조제였다.

버려야 할 테지.

엠마는 아련한 눈빛으로 새로운 물약으로 가득 찬 진열장을 훑어보았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연구를 계속했어. 그, 그래도 오해하지 마? 널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야, 단지… 그러한 마음까지 억지로 참아야, 널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빨리 올 것만 같아서.”

“……앞으로는 참지 마.”

나는 조심스레 엠마의 가녀린 손을 쥐었다.

피가 돌지 않은 탓인지 조금 찼다.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걱정했잖아.”

엠마는 후후, 하고 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아직도 조금 처량해서, 나는 엠마가 계속해서 무리를 저지를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엠마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게 빚을 지고 있다는 그 생각이 문제였다.

결국 나는 우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기절할 때까지 고생한 보람은 있었어?”

“어느 정도는?”

조금쯤 자신감을 되찾은 음색으로, 엠마는 자랑스레 물약진열대에 가득 찬 물약들을 보여주었다.

“물약들은 기본적으로 독성을 가지고 있어. 비단 물약뿐만 아니라, 모든 약이 그래. 독을 다르게 쓴 것이 바로 약이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독성을 줄이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는 시도였지.”

나는 어차피 약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엠마의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엠마는 그런 내 모습이 귀엽다는 듯 쿡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처음으로 보는 즐거운 미소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독성을 그대로 두고, 효과를 결합하면 어떨까? 어차피 이안, 너는 전투를 할 때마다 물약 여러 개를 복용하는 편이니까.”

엠마는 지난 며칠 동안 그러한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던 듯했다.

어떻게 하면 내게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 고민의 결과물들이 바로 저 물약들일 테지.

엠마에게도 커다란 도전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의 물약에 두 가지 효능을 섞는다는 건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실패작도 수도 없이 많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전투’라.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나는 엠마에게 물었다.

“혹시 독성과 함께 약효를 강화시키는 건?”

“……으응, 불가능하진 않지.”

엠마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입술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 물약의 독성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차라리 그건 약보다는 독에 가까울 거야. 다들 그러지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니까.”

“그럼 아예 독을 만들면?”

엠마의 목소리가 우뚝 멎었다.

그리고 그녀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침 나는 엠마의 죄의식을 덜어줄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녀에게 부탁을 하나 하기로 했다.

“엠마, 혹시 마취약을 하나 만들어 줄 수 있어? 즉효성으로, 최대한 순식간에 정신을 잃을 수 있도록.”

“오늘 밤부터 시작하면 가능이야 하겠는데…….”

그 독을 어디다 쓰려고, 라는 질문이 엠마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직전이었다.

꼬르륵, 하는 소리가 공방에 울려 퍼졌다.

근육 관리를 위해 끼니만큼은 곧잘 챙겨 먹는 나였다. 지금 이 시간에 배가 고플 리는 없었고, 그렇다면 그 소리의 진원지는 하나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엠마의 얼굴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그녀의 고개가 수치심으로 푹 숙여졌다.

다시 보니 엠마의 낯빛이 아직까지도 파리했다. 그동안 야윈 느낌도 들었고, 엠마는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아 걱정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식사 안했어?”

“으, 응… 사실, 재료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지난번에 건넨 수백 골드조차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새로운 연구에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한 법이었다. 매일 연구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엠마는 숲에 가서 버섯을 구해올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엠마에게 말했다.

“밥이나 한 끼 먹으러 갈까?”

“그, 으… 응, 알겠어.”

결국 그날은 엠마에게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은 양의 음식을 먹였다.

엠마가 더는 못 먹겠다고 우는 소리를 할 때까지.

그리고 나는 엠마에게 신신당부했다.

“앞으로 또 끼니를 거르거나 무리하면, 더 먹일 수도 있어.”

엠마는 입술을 삐쭉이더니, 이내 조금 부끄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단 둘이라면 뭐. 나, 나쁘지 않네.”

하여간 제 몸을 돌볼 줄 모르는 아가씨였다.

주기적으로 엠마의 공방에 방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밝았다.

드디어 귀향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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