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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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엠마에게서 물약을 받아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독이었다. 엠마는 이 투명한 액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경고해 주었다.
“조심해, 마수도 한 방울이면 몇 초만에 기절시키는 약이야. 그 이상으로 투여하면 죽을 수도 있고… 그런데, 이렇게까지 강한 독이 필요해?”
“응, 최대한 빨리 기절하는 편이 좋거든.”
엠마는 못내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는 엠마를 향해, 나는 농담처럼 제안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나랑 같이 갈래?”
“……으, 응?”
엠마는 무슨 소리냐는 듯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내 입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페르쿠스 영지 말이야. 네가 옆에서 이상한 짓 안하나 감시하면 되잖아.”
실은 내 개인적인 욕심에 불과한 말이었다.
내가 없는 사이 엠마가 또 얼마나 무리를 할지 걱정이 됐다.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않는 터라, 오늘처럼 혼절하면 누가 그녀를 도와줄까 싶었다.
그렇게 짧은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엠마에게는 그 의미가 유독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잠시 호흡을 정지시킨 채, 엠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엠마는 결국 씁쓸한 미소를 띠우고 말았다.
“아니야, 괜찮아.”
“연구 때문에?”
“으응, 아니. 나는 평민이잖아.”
그 담백한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도련님의 친구라고 해서, 평민을 돌봐야 하는 사용인들은 어떻겠어? 귀족인 네 가족들은?”
“우리 가족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그럴지도, 하지만 내가 신경 쓰여.”
엠마는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나를 설득했다.
“이안, 나는 내 주제를 잘 알아. 고작해야 네 곁에 서고 싶다는 꿈을 가지는 것조차도, 내게는 욕심이야.”
그렇게까지 말하는 여인에게 어찌 재차 제안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간, 네 입에서 먼저 우리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해줄게.”
“그래 줄래?”
엠마는 그러면서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지금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는, 그 안타까운 미소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고마워, 이안. 그리고 기다릴게.”
“……2학기 때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엠마와의 작별인사를 마쳤다.
짐은 단출했다. 내겐 공간 확장 주머니도 있을뿐더러, 어차피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페르쿠스 가문에는 내 짐이 많았으니, 챙길 것이라고 해봐야 무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워프 게이트로 향하는 길목에는 의외의 인물들이 몇 명 대기하고 있었다.
우선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가 하나.
“……세리아?”
“이안 선배!”
내가 무심코 아끼는 후배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반색하며 내게 다가왔다. 검술학부의 2학년 수석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천재 검사, 세리아가 날 찾아온 것이다.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없어 멀뚱멀뚱 서 있던 내게, 세리아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언니께서 제게 페르쿠스 영지로 향하라는 지시를 내리셨거든요. 우선 페르쿠스 영지 근방에 주둔 중인 가문의 사병을 통솔하라고……!”
나는 그제야 델핀 선배가 준다던 ‘특별한 선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선물의 정체는 바로 ‘세리아’였다.
세리아는 내가 아끼는 후배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익스퍼트 초입에 이른 검사이기도 했다.
이제야 갓 익스퍼트에 오른 나라서 더더욱 절감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익스퍼트와 그 외의 검사들 사이에 놓인 격차는 크고도 높았다.
페르쿠스와 같이 영세한 가문에는 익스퍼트 하나만 머물러도 감지덕지였다. 게다가 네리스 선배도 후일 찾아오기로 했으니, 이제 가용 전력에 포함된 익스퍼트만 셋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암흑교단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최저한의 조건은 만족한 셈이었다.
물론 귀향길에 함께할 사람은 세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주, 주인님?”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온 소녀는, 고깔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엘시 선배였다.
당장 어제 폭탄선언을 한 이후, 엘시 선배는 본가로 돌아가기도 애매해졌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엘시 선배도 함께 귀향길에 오르기로 했다.
다만 요즘의 엘시 선배는 조금 이상했다.
아니, 원래도 이상하긴 했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랬다.
흘깃흘깃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떨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최근 엘시 선배는 나와 관계를 설정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했다. 정확히는 내게서 어떠한 위치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모양새였다.
그 단적인 예가 시내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워프 게이트로 가는 길에, 나는 전단 하나를 받고 말았다.
길고양이를 지켜달라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 길고양이 마수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 최근 시내에서는 길고양이에 대한 혐오 여론이 커진 상황이었다. 그에 반대하는 고양이 애호가들이 꽤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그러한 다툼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이를 북북 찢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쪽을 지지해도 문제가 될 내용이었다.
나는 섣부른 판단으로 괜한 책임을 감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엘시 선배는, 그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듯했다.
조심스러운 질문이 내게 던져졌다.
“……주인님, 혹시 고양이 좋아하세요?”
“아니요, 딱히… 그냥 뭐, 생긴 건 귀엽다고 생각하는 정도죠.”
내 대답에 엘시 선배는 분한 기색으로 펄쩍 뛰고 말았다.
그녀의 자그마한 입에서 이내 열변이 터져 나왔다.
“고, 고양이는 의리도 없고 민폐만 끼치는 동물이잖아요! 누가 보면 지들이 주인인 줄 알겠다니깐? 만약 지난 마수 습격 사태 때, 고양이가 아니라 강아지가 마수로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막, 막…눈물을 머금고 혼자 죽었을걸요? 그런데 그 싸가지 없는 털바퀴들은…….”
“……왜 고양이랑 경쟁하는데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렇게 지적했지만, 엘시 선배의 고양이 타박은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저 반쯤 포기했다는 눈빛밖에 돌려줄 만한 것이 없었다.
의외의 동행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툭, 하고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리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내 배후를 점할 실력자는 많지 않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유렌이 서 있었다.
“안녕, 이안!”
“유렌!”
나는 반갑게 유렌과 악수를 나누었다. 부풀어 오른 짐가방을 보니 유렌도 어딘가로 향하는 중인 듯했다.
의례적인 질문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성국으로 가는 길이야?”
“아니, 특별 임무가 있어서 말이야.”
그러면서 유렌은 내게 한 쪽 눈을 찡긋하더니, 이내 슬쩍 비켜섰다.
유렌의 몸에 가려져 있던 여인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은빛 머리카락에 연분홍빛 눈동자, 신이 빚은 예술품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아름다운 소녀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성녀였다.
“흠, 흠… 우연이네요? 어쩌다 보니 다음 봉사지가 페르쿠스 영지로 결정됐거든요.”
“페르쿠스 영지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페르쿠스 영지에는 허름한 신전이 한 채 있을 뿐이었다. 신관이라고 해야 나이 든 성직자 하나뿐이었다.
살면서 페르쿠스 영지에 성국에서 파견된 봉사단이 왔다는 소식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중에서도 최고위직이라 할 수 있는 성녀가 페르쿠스 영지로 오다니.
무언가 이상했지만, 성녀는 내 의아한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필사적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지, 진짜로 우연이니까요? 절대로 질척거리거나 하는 건 아니에요… 지, 진짜로!”
질척거린다는 말을 꺼내는 까닭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만 성녀가 합류한다면 전력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반색하면서 성녀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성녀님.”
“……흠, 흠. 그래요. 우, 우연이지만 한동안 잘 부탁드려요.”
그러면서 성녀와 유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얼핏 성녀가 주먹을 쥐며 쾌재를 내지르는 듯한 장면이 보였는데, 나는 굳이 그 사실에 신경을 기울이진 않기로 했다.
상상 이상으로 페르쿠스 영지로 향하는 인파가 많아진 탓이었다.
예정보다 무려 넷이나 더 많은 인원이 합류했으니 말이다.
페르쿠스 영지의 주인은 페르쿠스 가문이었다.
당연히 손님 자격으로 찾아온 귀빈들을 대접할 의무도 페르쿠스 가문에 있었다. 손님이 많아질수록, 신경 써야 할 문제도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성녀나 엘시 선배, 세리아 같은 손님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다만, 이는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지금 페르쿠스 영지에서는 정체불명의 사악한 계획이 진행 중이었다. 동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했다.
물론 이는 내 생각에 불과했다.
내가 몰고 온 인물들의 면면을 확인한 셀린은, 곧바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뭐냐고!!!”
오붓이 셋만 함께하는 여행을 꿈꾸던 셀린이었다. 느닷없이 인원이 대폭 늘어버렸으니 화를 내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저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그리운 내 고향으로 향하는 길뿐이었다.
내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페르쿠스 영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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