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24화 (224/649)

〈 22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7)

* * *

내 고향은 도회지와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제국의 대도시들은 대부분 황제의 직할령이었다. 예외적으로 5대 귀족 가문의 영지는 규모가 크긴 했지만, 이를 제외한 대개의 영지는 번영에 한계가 있었다.

워프 게이트라는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는 도시는 한정적이었다.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한 탓이었다.

따라서 귀족들은 여전히 마차를 타고 다니곤 했다.

영지 근방의 대도시로 이동한 뒤, 다시 제 고향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페르쿠스 영지로 돌아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일단 워프 게이트를 타고 인근의 대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리 가문에서 수매해 둔 마차를 타고 본격적인 귀향길에 올랐다.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는 마차로 대략 이틀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었다.

이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야 할 때마다, 나는 옅은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페르쿠스 영지는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도로를 비롯한 기반 시설에 투자할 자본 또한 부족했다.

그래서 그다지 멀지도 않은 대도시에서 이틀이나 더 이동해야 하는 것이다. 도로의 사정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여정은 더욱 단축되었을 터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동생은 언젠가 돈을 벌어 도로를 정비하는 것이 목표였다.

도로가 엉망이라 가장 큰 불편을 느낄 당사자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여동생의 도로 정비를 향한 집착은 상상 이상이었다.

얼마 전에는 목표 금액 달성을 앞두었다고 신이 나서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못난 오라버니를 둔 탓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미안하긴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물론 내심 여동생의 수완을 믿고 있던 결과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내 여동생을 오랜 시간 관찰해 온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녀는 결코 당하기만 할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실제로 여동생은 내 기대에 훌륭히 부응해 주지 않았는가.

상단의 파산 자체는 막지 못했으나, 재산은 상당 부분 온존할 수 있었다는 소식이 편지에 적혀 있었다.

다만 황녀에게 뜯어낼 것이 많으니, 이 정보를 흘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말이다.

이제부터는 여동생이 어련히 알아서 할 문제였다.

그 편지를 받아든 내가 품은 감상은, 여동생에게 탈탈 털릴 황녀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찌 보면 황녀의 죄책감을 빌미로 사기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허나 이 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난 뒤였다.

내가 황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 가서 여동생을 잘 타일러 보는 정도밖에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여동생은 가족 중 내 말을 제일 잘 따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어지는 여로에서 나는 여러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 의식이 부상한 것은, 일행들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무렵이었다.

“……이 외진 곳까지 성녀가 봉사 파견을 오다니, 참 대단하시네요.”

문득 귀에 닿는 목소리에 내 시선이 흘깃 마차 내부를 훑었다.

그곳에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셀린이 보이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시치미를 떼듯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성녀가 위치했다.

그 외에는 내 옆에 딱 달라붙은 엘시 선배와,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손질하는 세리아가 눈에 띄었다.

구석에 자리 잡은 레토는 얼굴 위에 책을 덮은 채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유렌은 마차를 몰고 있었기에 마차에 있어야 할 일행은 여섯 명이 전부였다.

성녀는 셀린의 은근한 견제에 성호를 그으며 대응했다.

“천신의 은혜란 햇볕과 같아서, 번화한 곳과 외진 곳을 가리지 않는 법입니다. 비록 여러 사정으로 한계가 있다한들, 성직자가 그 본분을 잊어서는 아니 될 일입니다. 임마누엘.”

말 하나는 청산유수였다.

그러나 셀린의 황갈색 눈동자는 더욱 떨떠름한 빛으로 가라앉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지난번까진 우연이라 치겠는데, 두 번이나 행선지가 겹치다니. 그리고 요즘 성녀님께서 이안 오빠를 대하는 태도가 유독…….”

“아아, 주여! 이처럼 기묘한 우연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어린양이 그곳에 기다리고 있겠지요.”

셀린의 입에서 결국 한숨이 새어나왔다.

항복 표시였다. 성녀를 아무리 찔러봐야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오갈 데 없는 불만에 그녀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말았다. 내가 네 명의 일행을 더 받아들인 이후, 셀린은 종일 이랬다.

심통이 날 대로 난 기색이었다.

셀린의 다음 목표는 얌전히 검만 손질하고 있던 세리아였다.

“야, 찐따.”

“무슨 일이시죠, 하스터 양.”

세리아는 차갑고 도도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이제 ‘찐따’라 불리든 말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젠 셀린조차도 ‘찐따’를 일종의 애칭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개중 가장 친한 사이는 하나밖에 없다고, 셀린은 괜히 세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너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을 통솔하러 가는 거지?”

“음, 일단은 그래요.”

“그럼 그쪽에서 머물겠네?”

내 눈이 흘깃 세리아를 향했다.

원칙적으로는 세리아 또한 유르디나 가문의 주둔지에 머무는 쪽이 맞았다. 하지만 세리아로서는 처음으로 오는 친구의 집일 테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터였다.

내게도 세리아의 결정은 중요했다.

세리아는 유르디나 가문의 일원이었다. 성녀나 엘시 선배에 못지않게 신경 써서 대우해야 할 귀빈 중 하나였다.

만약 세리아가 페르쿠스 저택에 머물기로 한다면, 그에 따르는 준비가 필요했다.

셀린의 물음에 답하는 세리아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으음, 그래도 되겠지만… 아무래도 페르쿠스 저택에 신세를 지는 편이 좋겠죠?”

“엥? 왜?”

의외라는 듯 셀린이 그렇게 되묻자, 세리아는 오랜만에 보는 멋진 미소를 선보였다.

“우리, 친구잖아요.”

셀린은 곧장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세리아는 단호한 어조로 한 어절을 반복할 뿐이었다.

“친구.”

셀린의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음대로 하든가.”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목표는 하나밖에 없었다.

유독 불편한 눈빛으로, 셀린은 인상까지 찌푸려가며 입을 열었다.

“저, 엘시 선배?”

“응?”

엘시 선배는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던 터라 셀린조차 일순 기세가 누그러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은 셀린은, 깊은 의문을 담아 엘시 선배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자꾸 이안 오빠한테 달라붙어요?”

그 말대로였다.

엘시 선배는 꾸준히 내 곁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지금도 내 팔에 바짝 몸을 기댄 채 머리를 부비고 있을 정도였다.

설마 이를 지적당할 줄은 몰랐는지, 엘시 선배는 헛기침을 하며 슬쩍 얼굴을 붉혔다.

“무, 뭐! 왜! 불만 있냐?! 어디 후배가 싸가지 없이 선배가 하는 일에…….”

“이안 형제님께서 불편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셀린을 지원한 여인은, 다름 아닌 성녀였다.

엘시 선배는 의외의 일격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내 사나운 눈빛이 성녀를 향했으나, 성녀는 말없이 두 손을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가늘게 뜨인 그 연분홍빛 눈동자에서 은은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그렇지, 남녀가 유별한데…….”

“주, 주인님과 나는 특별한 관계거든?!”

“……아무튼 간에, 그게 남녀관계는 아니잖아요.”

성녀의 엄숙한 말씨에 엘시 선배는 곧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다만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도대체 무얼 해주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내 입에서 한숨 섞인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두시죠.”

“네, 당연히 그래야… 네?”

그 한 마디에 갈린 희비는 명확했다.

내게 돌아올 대답을 지레짐작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성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반면 엘시 선배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고 있었다. 감동했다는 듯 반짝거리는 그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든 말든 내가 내놓을 대답은 같았다.

“엘시 선배가 좋을 대로 하게 두세요. 어차피 소문 좀 퍼진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습니까.”

그렇다. 이미 나와 엘시 선배는 이미 불가분한 관계나 다름없었다.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한 이상, 엘시 선배를 데려갈 가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나와 열애설이 퍼진다고 해봐야 떨어질 평판도 남아있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엘시 선배가 조금이라도 행복해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다시 생각해도 한숨이 푹푹 나오는 상황이었다.

정 안 되면 내가 엘시 선배를 책임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내 말에 돌아오는 성녀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지, 지금 저 여자 편 드는 거예요?”

울컥해서 내뱉어진 말에는 흐릿한 물기마저 어려 있었다. 나는 조금 당황한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성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저 여자’라는 호칭은 가식을 걷어냈을 때나 나올 표현이었다. 셀린이나 세리아도 살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을 정도였다.

“주인님…….”

오직 엘시 선배만이, 그렇게 눈치 없이 내 팔에 머리를 부비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성녀가 이상해졌다고 느낀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정확히는 워프 게이트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나와 성녀 사이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성녀가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혹시 작금의 반응도 그와 관련이 있는 걸까.

내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던 그때,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좀 합시다, 여러분.”

레토였다.

여태껏 잠을 자고 있던 그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얼굴 위를 덮고 있던 책은 떨어져 내린 지 오래였다.

“어차피 이제 곧 페르쿠스 영지 아닙니까. 그곳에 가서는 제대로 다투지도 못할 텐데.”

셀린을 제외한 전원의 의아한 시선이 레토를 향했다.

특히나 성녀나 엘시 선배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긴장감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그 둘을 바라보는 레토의 표정이 너무나 능글맞았던 탓이었다.

그가 피식, 하고 웃으며 한 마디를 건넸다.

“리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거든요.”

레토가 던진 말의 무게를 실감하는 이라고는 셀린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질린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이내 턱을 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차 안은 그렇게 얼떨떨한 정적 속에 잠겨 버렸다.

이제 수레바퀴는 페르쿠스 영지의 경계를 밟고 있었다.

**

마차는 한가한 시골 마을을 지내 읍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중심지를 넘자, 그곳에는 영지 내에서 ‘대저택’이라 불릴 만한 유일한 건물이 위치하고 있었다.

페르쿠스 저택이었다.

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가녀린 외모의 소녀였다.

흑단과 같이 내려앉은 긴 생머리에, 뽀얀 피부와 낭창낭창한 팔다리는 가냘프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페르쿠스 가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황금빛 눈동자.

그 강렬한 눈빛이 유약해 보이던 소녀의 인상에 단번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름답고, 연약하며, 강하다.

그 모순적인 요소의 연쇄야말로, 이 아리따운 소녀가 품은 진정한 매력이리라.

그녀는 살짝 치마를 들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리아 페르쿠스'로, 페르쿠스 가문의 막내딸입니다. 오늘은이처럼 귀중한 손님을 맞이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여동생은 뜻 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못난 오라버니를 돌봐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부디, 앞으로는 제게 맡겨 주시길.”

나는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다.

낯선 여인들을 셋이나 대동한 채로.

그리고 내 여동생과 여인들 사이의 첫 만남은, 솔직히 말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어느덧 싸늘한 침묵이 물안개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