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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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응접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리아는 이미 방을 나선 뒤였다. 사실 리아는 끝까지 남아있고 싶어 했으나, 나는 일부러 눈치를 주어 쫓아냈다.
결국 여동생은 마지막까지 툴툴거리며 떠나갔다. 불만스럽게 나를 흘겨보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 성깔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저 말괄량이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려나.
남몰래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며,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예전부터 리아는 그 미모로 유명했다. 몇몇 가문이 이에 혹한 덕인지, 제안 자체는 몇 번 받았다고 들은 바 있었다.
다만 리아가 모조리 단칼에 쳐냈을 뿐이지.
하기야 저 성질머리를 버티려면 남자도 범상한 인물이어서는 안 됐다. 최소한 맞먹을 수준은 돼야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재색을 겸비한 내 여동생과 맞먹는 짝이 존재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지금 중요한 것은 리아의 혼처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장 직면한 위기 상황을 해소할 묘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일행에게 다짜고짜 묻는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짧지만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많은 요소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내가 던지고자 하는 화두는 명확했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오고 있다.
실력 있는 기사도 희소한 자원이었으나, 마법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따라서 마도병단을 구성할 수 있는 가문은 소수에 속했다.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이나, ‘마도명문’이라 불리는 몇몇 가문들만이 그럴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라이넬라 가문도 그 소수의 가문 중 하나였다.
무려 기사단보다도 희귀하다는 마도병단을 보유한 곳이었다.
정확한 전력은 알 수 없었지만, 각 마도병단의 지휘관들이 라이넬라 가문의 혈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오늘 찾아온다는 마도병단 또한 예외는 아닐 터였다.
라이넬라 가문의 성을 받은 인물이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이는 지난번 라이넬라 가문의 기사를 건드렸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애초에 라이넬라 가문은 기사보다 마도병단이 더 유명했다.
수준 차이는 물론이고, 라이넬라 가문의 혈족이 이끄는 이상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엘시 선배를 무작정 데려가려 해도 막을 명분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특히 엘시 선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얼어붙고 말았다.
“누, 누구? 정확히 누가 온다는 건데?”
한참 동안이나 굳어 있던 엘시 선배가 내뱉은 말은, 공황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미 리아는 떠난 지 오래였으니까.
아무리 넋을 놓고 있더라도 엘시 선배가 이를 모를 리는 없었다.
다만 지나치게 초조한 나머지 아무 질문이나 던져본 모양이었다.
셀린은 두려움에 떠는 엘시 선배의 모습이 낯설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 뭐 그렇게까지 긴장해요? 제 아무리 마도병단이라도 선배는 직계잖아요.”
그것도 라이넬라 가문에서 촉망받는 수재 중의 수재.
현 가주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성취가 높은 인물이 바로 엘시 선배였다. 만일 오빠나 언니가 오더라도 엘시 선배가 주눅이 들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엘시 선배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성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있군요. 엘시 자매님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마도병단에.”
그렇다면 당연히 그 사람을 보냈을 터였다.
지금 엘시 선배는 폭탄선언을 하고 나와 도주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엘시 선배를 방치하기를 바랐으나, 아무래도 라이넬라 백작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어떻게든 가문으로 데려와 무언가를 할 심산인 듯 보였다.
아니라면 굳이 마도병단을 파견하는 귀찮은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엘시 선배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나 또한 그녀와 같은 배를 탄 몸이었으니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나 초조함을 느끼는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성녀는 도리어 잘 됐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가문으로 돌아가시면 되겠네요.”
“……절대 안 돼!”
엘시 선배는 성녀의 한 마디에 발작하듯 외쳤다. 아무리 라이넬라 가문의 적녀라도 성녀에게는 존칭을 써야 했으나, 그조차 잊을 만큼 간절한 외침이었다.
“그, 그러면 바로 외출도 금지당하고 나 몰래 이것저것 처리해버릴걸? 우리 아버님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성녀의 목소리에는 즐거운 마음마저 묻어나오고 있었다.
벌써부터 계산을 끝마쳤다는 투였다.
“엘시 자매님은 여러 풍문에 엮여 있으니, 당장 방학 동안에 무언가 합의가 이루어질 일은 없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일단 가문에 돌아가시죠.”
그러면서 성녀는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그 모습이 마치 명복을 비는 사제처럼 보였다.
“이안 형제님은, 제가 잘 보필할 테니까.”
세리아가 보이는 반응도 성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이넬라 선배님… 사정은 알겠지만, 귀족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래도 나름 공손한 어조를 쓰는 것으로 보아, 세리아도 그간 사회성이 많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그 점에 살짝 감동을 받는 내가 있었다.
성장했구나, 세리아.
그러나 궁지에 몰린 엘시 선배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든 해 달라는 눈빛.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슬쩍 레토에게 눈짓을 보내야 했다.
레토는 무척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내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곤 입을 열고 말았다.
“……반대로 별일 없을 수도 있잖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일행의 시선이 레토에게로 몰렸다.
그러자 레토는 조곤조곤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들 착각하고 있는데… 라이넬라 가문으로서는 굳이 이안과 엘시 선배를 떨어트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공인된 연인 관계로 만들고자 할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레토의 말에 셀린과 세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오직 성녀만이, 살짝 미간을 좁혔을 따름이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얼굴이었다.
유렌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느긋한 관중 역할을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가문이야 격의 차이가 있다곤 하지만, 이안은 한창 명성을 높이고 있는 신성입니다. 게다가 엘시 선배는… 그, 솔직히 말해 지난 '주인님' 선언이 치명적인 추문으로 작용하겠죠 "
"……그러니 차라리 엘시 자매님으로 이안 형제님을 잡아두겠다?"
"심지어 엘시 선배는 가문이 아끼는 수재입니다. 남 주기엔 아까운 인재였는데, 이안은 차남이라 굳이 가문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죠."
데릴사위.
레토는 그러한 가능성마저 언급하고 있었다.
아직은 아내가 남편을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전례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레토의 가설이 일리가 있다 생각했는지 희비가 다시금 교차했다.
셀린과 세리아, 성녀의 낯빛이 심각해졌고 도리어 엘시 선배의 표정은 밝아졌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사실 레토도 한 번 던져본 말일 뿐이었다. 레토의 말대로 될 수도 있지만, 라이넬라 백작이 정반대의 길을 택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애초에 귀족들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 사이의 혈연 관계를 맺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니까.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나와 엘시 선배의 결혼은 여전히 하책이었다.
결국 질긴 논의에 일단락을 낸 것은 성녀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지금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어요."
"수가 없단 뜻입니까?"
"아니요, 남은 시간 자체는 넉넉해요."
내 반문에도 성녀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이곳에서 정치에 관해서는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녀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그녀는 의견을 정리해 두었을 터였다.
"마도병단은 기본적으로 무력집단이에요. 아무리 평화의 시대라지만 남의 영지에 그만한 전력을 파견하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하죠."
"가출한 딸내미를 찾으러 왔다는?"
"그랬다면 방금 리아 자매님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죠. 하물며 이안 형제님은 페르쿠스 가문의 일원인데, 두 사람의 도피를 명분으로 삼으면 실례에요."
어차피 힘으로 찍어누르면 할 말이 없겠으나 내 뒤에는 또 다른 힘이 있었다.
유르디나 가문과 제국 황실이 그것이었다.
델핀 선배나 황녀와 내가 각별한 사이라는 점을 라이넬라 백작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작정 페르쿠스 가문을 홀대하기도 난감했다.
"그러니 명분 자체는 다를 거예요. 무언가 파견을 와야 할 까닭을 만들어냈겠죠. 그렇다면 우선은 그 용무를 수행하는 시늉이라도 낼 수밖에 없어요."
"결국 답은 그 다음에 내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으로선 그쪽 뜻도 모르니까요."
성녀의 말에 우리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였다. 아직 라이넬라 가문의 진의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더 말을 해봐야 이야기만 중구난방으로 튈 뿐이었다.
내가 내놓을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럼 일단 기다려봅시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라이넬라 가문의 의견을 기다릴 여유는 있었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 엘시 선배의 어깨를 토닥였다.
별일 없으리라고.
만약 별일이 생긴다면 애초에 내가 저항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건넬 수 있는 위로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는 라이넬라 가문에서 파견된 마도병단을 마주해야 했다.
얼핏 보기에도 강렬한 마력의 냄새가 풍기는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유독 강인해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마치 백화된 숯을 보는 느낌이었다.
타고 타서 마지막으로 남은 부분만 긁어모은 듯한 인간.
갈색 머리카락과 어우러지는 푸른 눈동자가 피로해 보였다.
슬쩍 살펴봐도 190cm가 넘어보이는 장신의 사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내게 악수를 건넸다.
"……반갑다. 조카사위 '후보'."
그 말을 들은 엘시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사내의 그 서늘할 정도로 푸른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확신했다.
이 자가 엘시 선배가 두려워하던 사람이다.
나와 중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고,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사, 삼촌!"
엘시 선배는 부르짖은 사내의 호칭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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