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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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는 부모님과 형은 건강해 보였다.
내 아버지이자 페르쿠스 가문의 가주, 테온 페르쿠스는 언제나 그렇듯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중년인 아버지는 격의 없는 태도로 유명했다.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권위 의식이 잘 느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대개의 귀족들은 자라나면서 예법과 함께 권력을 학습한다. 신분에 따른 격차와 칼과 같은 권위야말로 사회를 유지하는 기반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는 누대에 걸쳐 만들어진 일종의 사회 풍조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귀족들은 권위 의식을 멀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도리어 우리 아버지 같은 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아무리 개성적인 인간이라도 교육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일전에 아직 페르쿠스 가문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역사가 짧을수록 문화적 자산도 덜 축적되어 있기 마련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나야 그 덕에 아카데미에 적응하기 한결 수월했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교류를 해온 레토와 셀린을 제외하면, 아버지는 아들내미의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하물며 그 상대의 면면이 이토록 화려할 줄은 꿈에도 모르셨을 터였다.
성국의 최고위 지도자 중 하나, 성녀.
유르디나 가문의 천재 검사, 세리아.
마도명문 라이넬라 가문의 촉망 받는 수재, 엘시 선배.
아카데미 내에서도 한동안은 나와 접점이 없던 이들이었다. 그랬던 이들이 단 몇 개월만에 내 친구가 되어 찾아왔으니, 아버지로서는 뜬금없다고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로 아버지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반갑습니다, 손님 여러분. 제 못난 아들놈의 친구라고…….”
“아, 아니요!”
오히려 펄쩍 뛰는 쪽은 여인들 쪽이었다.
특히 엘시 선배는 ‘못난 아들놈’이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오, 오히려 제가 주인… 아, 아니. 이안님께 신세를 지고 있어요. 지, 진짜로요!”
엘시 선배의 호칭은 조금 나아졌지만 이상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주인님’까지는 어떻게든 참아냈지만, 당황한 나머지 ‘이안님’이라는 호칭까지 수정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뒷머리에 손을 얹으며 난감한 웃음을 터트렸을 뿐이었다.
“하하하, 라이넬라 아가씨께서는 말투가 특이하시군요? ‘이안 님’이라…….”
아버지의 인자한 황금빛 눈동자가 슬쩍 나를 향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직 그런 존칭을 듣기엔 한참 멀어 보이는데 말이죠.”
그야 아버지가 볼 때는 언제까지고 어린 아들로 보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본래 부모란 그러한 존재가 아니던가.
나 또한 아버지 앞에 한 명의 당당한 성인으로 서고 싶으면, 그에 마땅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터였다.
물론 오랜만에 찾아온 본가에서 나를 타박할 사람은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 또한 아직도 내가 한참이나 어린 아들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정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어머니는 여전히 젊어 보였다. 아버지도 동안이었지만, 어머니는 그보다도 더 어려 보였다.
얼핏 보면 내 어머니가 아니라 누나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 눈빛에서 일렁이는 애정과 걱정은, 자식을 가진 어머니만이 보일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어머니는 우선 오랜만에 본 아들을 한참 동안이나 꼭 안아 주셨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내쉬며, 본격적으로 나를 나무라기 시작하셨다.
“이안, 요즘 이상한 소문이 자꾸 들리더구나… 네가 마인을 쓰러트리고, 암흑교단의 음모를 망쳤다는 이야기 말이다.”
“……네, 뭐.”
나는 할 말이 궁해 또 다시 눈동자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질 어머니의 말이 무엇일지는 대략 예상이 갔다.
“물론 너도 성인이고, 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질 때가 됐지. 하지만 우리 페르쿠스 가문은 언제나 중용의 도리를 지켜왔단다. 소문에는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라지만, 네가 그토록 위험한 일에 엮였다니 어미로서는 염려가 앞서는구나.”
아무래도 어머니께서는 나에 관한 소문에 과장이 섞였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군소리 없이 아카데미나 다니고 있던 내가, 느닷없이 대륙에서 떠오르는 초신성이 되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셨겠지.
솔직히 나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판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겪으면서, 이제 신물이 없으면 몸뚱아리가 회복되지 않는 지경까지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그 자리에서 혼절하실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린 분이셨다. 나는 자식된 도리로서 어머니를 조금이나마 안심시켜 드리기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래도 사지 멀쩡한 채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내 말에 더욱 구슬픈 눈빛을 하셨을 뿐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쩔쩔 매고 있었다. 한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더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입을 연 것이 성녀였다.
“어머님, 그 마음이 어떠실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다.”
“……아, 성녀님.”
독실한 천신교의 신자인 어머니는 성녀의 등장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성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만류했다.
여전히 얼떨떨한 눈치였지만, 어머니는 주춤거리며 자리에 다시 앉으셨다.
애초에 성녀쯤 되는 인물이 페르쿠스 저택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이안이 전투에 나설 때마다 마음을 졸이는 사람은, 어머님뿐만이 아니랍니다. 저 또한 이안의 곁에서 수없이 많은 시간을 불안에 떨어야 했죠.”
그렇게 은근한 목소리가 어머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머니께서는 무려 성녀가 공감해 주고 있다는 점에 퍽이나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하물며 자신과 함께 나를 걱정해 주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자식이 상상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 받지 않을 부모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황송하다는 표정을 짓자, 성녀는 재빨리 어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제가 늘 이안의 곁에 있으니까요. 주께서 허락하신 이 힘으로, 언제까지고 이안을 보필하겠습니다.”
언제까지고 보필한다니.
말만 들으면 마치 구혼이라도 하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무척 감읍해서 눈물을 머금으셨다. 성녀가 행사하는 신성력은 일종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그녀가 곁에 있다면, 내가 목숨을 잃을 일까지는 없으리라.
어머니는 성녀의 손을 꼭 쥐면서 몇 번이고 부탁의 말을 남기셨다.
“우리 이안을 잘 부탁드립니다, 성녀님. 흑… 워낙 착하고 여린 아이라 피를 보는 것도 힘들어하거든요. 처음에 검을 들게 할 때도 고민이 많았는데…….”
“아하, 아하하… 그, 그 이안이요? 피를 보기를… 시,싫어한다고요?”
성녀는 어떻게든 웃어넘기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는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사실이었는데.
그래도 아버지나 어머니는 사정이 조금 나은 편에 속했다.
페르쿠스 가문의 후계자이자 내 형, 아론 페르쿠스는 유독 말수가 적은 사람에 속했다.
주로 여리여리한 체형인 페르쿠스 가문에서 홀로 선이 굵은 외형을 한 형이었다.
듬직한 인상의 거구가 말이 없으면 묘한 위압감을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형은 주변에서 오해를 살 때가 많았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세리아는 형 앞에서 쩔쩔 매며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든 말든 형은 아무 말도 없이 세리아를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황금빛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부모님께 그제야 인사를 마친 내가 형에게 다가섰다.
형은 아무 말도 없이 내게 시선을 보냈고, 나는 함박웃음을 머금고 형에게 달려들었다.
“……형!”
내가 친근하게 형에게 다가서자, 형은 늘 그렇듯 말없이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무심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나는 알았다. 그 눈빛에 흡족한 기색이 어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만에 보는 동생이 반가운 것이다.
겉모습은 이래도 형은 속이 깊고 배려심이 강했다. 동생도 아끼는 편이라, 나와 가장 친근한 사이이기도 했다.
정작 리아는 아론 형을 묘하게 어려워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형의 곰과 같은 외형이 리아에게 거리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한때는 형도 그 탓에 시무룩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적응했는지 딱히 슬퍼 보이는 기색도 없었다.
물론 리아가 형을 은근히 피할 때면 여전히 상처받은 얼굴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 사이와 마찬가지로 가족 사이도 잘 안 맞는 사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리아는 어린 시절 병 때문에 오랜 시간 타지에 나가 있었으니, 본가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이 전부 낯설어 보였을 터였다.
그녀가 내게 집착하는 까닭도 그 탓일지도 몰랐다.
그 당시 리아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돌봐주었던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부모님은 페르쿠스 가문의 주인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했고, 아론 형은 워낙 천성이 말수가 없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리아는 지금도 부모님과 아론 형을 대할 때만큼은 깍듯이 예의를 지키곤 했다. 여동생이 편하게 대하는 상대는, 오직 나뿐이었다.
나야 부모님이나 까탈스러운 리아보다는 아론 형이 가장 편했지만 말이다.
어릴 때 짓궂은 장난을 쳐도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착한 형이었다. 나는 반색을 하며 형에게 물었다.
“오랜만이야, 형! 그동안 잘 지냈어?”
“음, 그래. 나야 잘 지냈다만…….”
형의 무뚝뚝한 눈동자가 다시금 세리아를 향했다.
세리아는 혹여 무언가 잘못이라도 했나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형의 관심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면이 있었다.
“……제수씨냐?”
“제, 제숫! 제수씨!”
세리아는 그 한 마디에 숨이 턱턱 막혀 말조차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다. 무척이나 놀란 기색이었다.
나는 왜 형이 세리아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몇 달만에 돌아온 동생이 어여쁜 여자들을 잔뜩 데려왔으니, 혹시 그중에 내 짝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있나 싶어 궁금했던 듯했다.
내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니야, 형. 세리아는 유르디나 가문 사람이라고… 뭐가 아쉬워서 나를…….”
“……아, 아니요!”
세리아는 조금 흥분한 목소리로, 내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에서는 묘한 결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괘, 괜찮아요! 제숫, 으으… 제수씨라고 불러주셔도! 오, 오히려 이안 선배는 제게 과분한 사람이니까요!”
세리아가 이토록 열을 올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존경 받는 선배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이 빠져서 한동안 세리아를 바라보고 있던 나를 뒤로 하고, 아론 형은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자그마한 루비 원석을 세리아에게 건넸다.
이제는 세리아가 넋을 놓을 차례였다.
아론 형의 뜻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세리아에게, 나는 또 다시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한다는 뜻이야. 아론 형의 취미가 채굴이거든… 그래서 뭐, 발견한 보석 원석 같은 것이 있으면 가지고 있다 선물해줘.”
그래서 아론 형의 방에 가면 곡괭이들이 한 무더기나 전시되어 있었다.
세리아는 내 설명에 황송하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그, 그러니까… 으으… 아주버님?”
드물게도 아론 형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장하다는 듯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해주거라.”
도대체 뭘 잘해주라는 걸까.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페르쿠스 가문의 응접실에는 사람이 붐볐다. 그 난장판에서 나를 꺼내간 것은, 바로 셀린이었다.
셀린이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기며 내게 속삭였다.
“……이안 오빠, 이안 오빠!”
이제 막 구석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리아에게 향하려던 찰나였다.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내가 상대를 안 해주니 삐친 모양이었다.
여동생을 달래주어야 한다는 중대사를 앞두고, 멈춰 서야 하는 내 사정이 원망스러웠다.
내 눈이 의문을 담아 셀린을 향했다.
무슨 일이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셀린은 몸을 으슬으슬 떨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기, 저기 좀 봐!”
그러면서 셀린은 은근슬쩍 나를 끌어당겼다. 그 덕에 내 팔이 그녀의 부드러운 흉부와 접촉했으나, 셀린은 일부러 시치미를 뚝 뗐다.
허허, 나는 헛웃음을 머금으며 셀린의 볼을 쭉 잡아당길까 고민했다.
아무리 모르는 척을 해도 내 눈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일단 셀린의 표정이 불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내 시선이 셀린의 검지를 따라 흘렀다.
그곳에는 문 앞에서, 유심히 나를 노려보고 있는 장신의 중년이 서 있었다.
엘시 선배의 삼촌이었다.
방금 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어느새 그는 문 앞으로 돌아와 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부담스러웠다.
셀린은 그 점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
“저 사람, 눈빛이 딱 봐도 위험하지 않아? 이러다 오빠 죽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내 부정의 말에도 셀린은 조금도 불안이 가신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제안했다.
“눈빛이 싸늘해… 오빠가 가서 좀 대화해 보면 안 돼?”
나는 셀린에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실 나 또한 엘시 선배의 삼촌이 무척 신경 쓰이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헛기침을 하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페르쿠스 일가부터 손님들까지 뒤섞인 응접실 내에서, 내 걸음걸이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마주한 엘시 선배의 삼촌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어디 실력 좀 볼까.”
참으로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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