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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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아서의 대답은 당연한 것이었다.
암흑교단이 그렇게 간단히 꼬리를 잡힐 리는 없었다. 설령 어쩌다 암흑교단을 발각했다고 해도, 고작 이 정도 전력만 파견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적어도제국의 근위기사단이나 성국의 이단심문관들이 찾아와야 무게가 맞았다.
제국의 황족 측근까지 파고들었던 위험요소가 암흑교단이었다.
태생부터 암흑교단과 척을 질 수밖에 없는 성국은 물론이고, 제국과 열왕국 또한 최대한 빨리 위험부담을 도려내고 싶을 테지.
황족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은, 곧 마음만 먹으면 건드리지 못할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열왕국의 왕족과 귀족들도 한동안 간담이 서늘했을 터였다.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이토록 담백한 대답이 돌아오니 맥이 풀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레이놀드 씨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그 외에는 쓸모도 없는 빈민들을 데려갈 까닭이 따로 있을 리가 없잖나. 단적으로 말해, 고아원을 차리고 아이들을 착취해도 무상의 노동력을 합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데 말이야.”
“……레이놀드 경.”
아서는 지친 목소리로 레이놀드 씨를 만류했다. 그러나 레이놀드 씨는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어느덧 대화는 한참이나 진행된 뒤였다.
그럼에도 내 의문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었다.
갑작스레 너무나 많은 정보가 주어진 탓이었다.
나는 일단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지끈거리는 머리를 진정시켰다. 내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종래에 내 의문이 향한 곳은 레이놀드 씨였다.
“아니, 엘시 선배를 데리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겸사겸사 온 걸세, 그렇지 않으면 이 시골 영지에 굳이 내가 올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 자체는 파견될 예정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급이 높은 레이놀드 씨가 파견된 사유는 그러한 모양이었다.
엘시 선배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경지가 높은 레이놀드 씨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가주인 라이넬라 백작이 자리를 오래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제야 사정을 파악한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엘시 선배만 얽힌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조사하고 있던 사건과 관련되어 수많은 문제들이 얽히고설킨 채였다.
이를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할지.
내가 헷갈린다는 눈빛을 하고 있자 아서가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짝, 하는 소리에는 다시금 분위기가 환기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서는 기세 좋게 연약한 두 팔로 회의실의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봐야 소리도 잘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여간! 지난 아카데미의 마수 습격 사건을 본 폐하께서는 크나큰 경각심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수상한 사건이라면 일단 싸그리 조사해 보라는 지시가 내려진 상황입니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제 아무리 라이넬라 가문이라도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긴 했다.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라이넬라 영지 내의 실종 사건은 꽤나 드물어진 모양이었다. 그들로서는굳이 페르쿠스 가문까지 발걸음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황제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고작해야 신원미상자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사건에 불과했다.
애초에 교외에 사는 빈민들은 관리 대상이 아니었다. 권력이 해낼 수 있는 일에도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이를 대충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엇이라도 결과를 내야 했다.
아서의 낯빛이 거무죽죽해진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그러한 압박감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페르쿠스 영지에는 자랑스러운 영웅이 하나 계시지 않으십니까? 무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지목하신 조력자이신…….”
“……설마 접니까?”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대개 이러한 의문에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은 법이었다.
“네, 이안 페르쿠스 경 말입니다.”
나는 품에 손을 넣어 제국 황실의 인장을 만지작거렸다.
굳이 용혈 문자를 보여주지 않더라도, 이를 보여주는 순간 나는 온갖 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제국 황실의 직인은 곧 제국 황실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아직 아서나 레이놀드 씨는 내가 황실 직인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서가 조금 과하게 나를 대우해 주기는 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내가 황제의 눈에 들 만큼 뛰어난 인재이기 때문으로 보였다.
참 감개가 무량한 일이었다.
제국의 하급귀족, 그중에서도 시골 자작가의 차남이 이처럼 과분한 대우를 받게 되다니.
그러나 레이놀드 씨는 아서의 말에 다시 코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디, 엘시의 짝이 될 만한 남자인지 보지.”
그 후로도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결국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이나 하라는 소리였다.
예상하고 있던 결말이었지만, 나는 울적한 얼굴로 아서가 건네는 서류를 받아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정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특히 페르쿠스 영지 중에서도 실종 사건이 다발하는 곳을 표시해 둔 지도가 눈에 띄었다. 나는 슬쩍 레이놀드 씨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영지 내 지리를 묘사한 지도는 전략자산인데…….”
“설마 나를 못 믿겠단 건가?”
그 스산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만일 엘시 선배의 삼촌만 아니었어도 한 번쯤 대거리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나와 엘시 선배는 이제 운명공동체나 다름없었다.
엘시 선배의 가족과 굳이 갈등을 빚을 필요성은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만을 온전히 불식시키지 못해, 내 입에서는 기나긴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언제부터 조사에 착수하면 됩니까? 지금도 영지민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속이 쓰린데요.”
“우선은 여독을 푸시고, 내일부터 착수해 주시죠.”
아서의 말에 나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지도를 품에 넣었다.
네리스 선배가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었다.그 전까지는 아서가 제공하는 정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오늘밤에는 제 일행들에게 이야기를 꺼내야겠군요.”
나 혼자 조사에 나설 바에야 그 편이 몇 배는 더 나았다.
애초에 아직 증거가 없을 뿐, 나는 이 사건에 암흑교단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가 이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암흑교단이 배후에 있다면 절대로 보통 사건은 아니리라.
특히 암흑교단이 몇 년에 걸쳐 교묘히 준비해 온 무언가가 엮여 있는 일이었다.
결코 이를 방해하게 두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문득 광소를 터트리던 여인의 머리를 떠올렸다.
암흑사제 미트람.
그의 장기는 생체 개조였다. 묘하게도 나는 그와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겠다고 했으니까.
만일 그가 이 사건의 주범이라면, 실종자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우울한 낯빛으로 회의실을 나섰을 때였다.
레이놀드 씨가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직 라이넬라 가문은 너를 인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정해 달라 한 적도 없었다.
엘시 선배가 멋대로 ‘주인님’이라고 선언했을 뿐이지.
내 입에서 그러한 반론이 맴돌았으나, 참았다. 어차피 지금 반항해 봐야 손해를 보는 쪽은 내가 아닌 엘시 선배였다.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 그러니 아직 엘시의 운명은 정해지지 않은 셈이지…네가 라이넬라 가문의 데릴사위가 될 수 있을지는, 이 일에 달렸다.”
그 말을 끝으로 레이놀드 씨는 나를 등진 채 걸음을 옮겼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려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레이놀드 씨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조카가 느닷없이 외간남자를 ‘주인님’이라고 부른 상황이었다. 그의 눈에는 내가 쓰레기 중의 쓰레기로 보일 테고, 엘시 선배를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닌지 불안할 테지.
그래서 나는, 레이놀드 씨의 널찍한 등에 대고 외쳤다.
“……엘시 선배 말입니다.”
레이놀드 씨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저한테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무언가 오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흥, 하고 레이놀드 씨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한 마디는, 그가 지금껏 내게 던진 말 중에서 가장 긍정적이었다.
“지켜보겠네.”
그 말을 들은 내 입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레이놀드 씨가 실망할 만한 사건은 한동안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델핀 선배나 네리스 선배가 돌발 행동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둘이 그럴 리는 만무했다.
델핀 선배에게는 사회적 위신이 있었고, 네리스 선배는 신분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문으로 보이는 페르쿠스 영지를 바라보았다.
나의 고향, 이 시골에서.
나는 또 다른 핏자국을 남겨야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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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밤, 미모의 여기사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나는 마당에 나섰다.
그곳에는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녀가 서 있었다. 달빛을 등진여인은 나를 보자마자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이내 넙죽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마, 말씀대로 지금 도착했습니다! 스승님!”
단숨에 내 주위의 기온을 몇 도나 떨어트리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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