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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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페르쿠스 저택에서는 자그마한 축제가 열렸다.
사실 축제라기보다는 ‘연회’에 가까운 느낌이긴 했다. 기껏해야 저택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오는 것이 전부인 행사였으니까.
평민들조차도 손을 귀하게 대접할 줄 아는 세상이었다.
귀족인 페르쿠스 가문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 주연을 베푸는 것쯤은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 밤의 연회를 ‘축제’라 부르는 까닭은 따로 있었다.
바로 방문객의 규모 때문이었다.
내가 돌아온 날이면, 나와 인연이 닿았던 고향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곤 했다. 그 숫자만 해도 ‘인파’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페르쿠스 가문이 대대로 평민과 격의 없이 지내온 덕이었다.
대장간의 한스 씨, 개구쟁이 네드부터 그 여동생인 메이까지 온갖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러 찾아왔다.
제 아무리 페르쿠스 저택이 크다 하더라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수십에서 수백에 달하는 인파가 찾아오면 페르쿠스 저택만으로는 응대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돌아오는 날마다 페르쿠스 저택 마당에 길쭉한 식탁 몇 개가 차려지곤 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웃고 떠들고 있으니 왁자한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마치 축제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고작 집 떠난 아들 하나가 돌아온 것뿐인데, 이처럼 성대한 환영식이 필요할까.
매번 의문이 들긴 했으나,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를 반기는 이들이 많을수록 마음이 고무되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마당 곳곳을 누비며 술을 얻어마시고 있었다.
마당의 구석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피어올랐다.
맛있는 고기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오늘의 메뉴는 통돼지 바비큐였는데, 영지의 재정을 담당하는 리아가 통을 크게 쓴 모양이었다.
혹은 그만큼 황녀에게 뜯어낼 자신이 있던가.
나는 내 옆에서 돼지고기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사내아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얼핏 보기에도 개구쟁이처럼 생긴 꼬맹이었다. 그의 이름은 ‘네드’로, 그 옆에는 긴장한 낯빛을 한 여자아이가 달라붙어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메이’였다. 네드의 여동생이었으나 그 천성은 정반대였다.
네드가 활달하고 장난기가 많다면, 메이는 조용하고 소심했다.
그래서 네드는 늘 여동생을 지켜줘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남매였다. 이를 딱하게 여긴 아버지가 네드를 저택의 심부름꾼으로 고용했던 인연이 있었다.
그때도 네드는 씩씩하게 제 여동생을 먹여살렸다.
내가 떠난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 싶었는데, 볼 때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네드에게 물었다.
“네드, 너 아직도 수련하고 있냐?”
“……그, 그럼요. 사부님!”
네드는 먹고 있던 돼지고기를 꿀꺽 삼킨 뒤, 펄쩍 뛰면서 내게 호언장담을 했다.
평소에는 꼬박꼬박 ‘도련님’이라는 존칭을 쓰던 네드였다. 하지만 수련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람이 달라졌다.
그는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기사가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또한 페르쿠스 영지에서 가장 기사에 가까운 인물인 나였으니, 그가 나를 ‘사부’로 모시고 추앙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실제로 나 또한 그의 수련을 몇 번 봐주기도 했고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끈기는 있는지 아직까지 수련은 계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속으로는 기특하다는 생각을 한 나였으나, 겉으로는 짐짓 못미덥다는 표정을 연기해야 했다.
수련은 한 번 풀어지면 끝이었다.
지치고 힘들고 죽을 것만 같아도, 다시는 꼴도 보기 싫을 만큼 질려 버려도 길은 언제나 주저앉은 너머에 있는 법이었다.
나는 네드가 풀어지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네드, 알고 있지? 부상을 제외하면 훈련을 쉬어도 되는 이유 따위는 없다. 그리고 훌륭한 기사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고요?”
이미 몇 번이고 건넸던 말이었기에, 네드는 이어질 말을 곧바로 간파해냈다.
나는 용하다는 뜻으로 그의 머리를 한 번 더 거칠게 쓰다듬었다.
네드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믿어요! 들었거든요, 도련님이 무슨 활약을 했는지!”
그 외침에 일순 사위가 고요해졌다.
단숨에 수십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네드의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메이의 몸이 흠칫 떨렸다.
너무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탓이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네드는, 개의치 않고 내게 물어왔다.
“그 소문 진짜에요?! 막, 막… 대귀족들이 참가하는 수렵제에서 뿔 달린 괴물을 처치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던 나쁜 마인을 쓰러트리고! 게다가 암흑교단의 나쁜 놈에게 위협 당하던 황녀님까지 구출, 크으……!”
듣자하니 네드가 이토록 신이 날 만도 했다.
마치 영웅담 속의 기사들이나 보일 무훈이 아닌가.
다만 그 화려한 기록의 이면에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핏자국들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내게 남은 기회는 이제 얼마 없었다.
황실에서 포상으로 내려받은 신물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 이후에는 페르쿠스 영지를 통째로 팔아치워도 내 목숨을 건질 수 없을 터였다. 이러한 말을 하면 과연 네드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물론 내가 그러한 말을 할 리는 없었다.
아직 네드는 조금 더 꿈을 꾸어도 좋은 나이였으니까.
나는 늘 그렇듯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글쎄다? 진실은 어떨까.”
정작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엘시 선배가, 곧장 내 앞에서 어깨를 쫙 폈기 때문이었다.
무척 우쭐한 기색이었다. 아마 그녀 자신이 그렇게 칭찬을 받더라도 이처럼 기뻐하지는 못할 터였다.
내 눈빛에 옅은 불안감이 어렸다. 엘시 선배의 입은 내게 시한폭탄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주로 사회적 평판이라는 부분에서.
아직 엘시 선배의 ‘주인님’ 선언이 이 시골까지 닿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만일 그와 같은 상황이 또 한 번 반복된다면 큰일이었다.
가족까지 머물고 있는 고향에서 쓰레기로 불리는 일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시 선배는 의기양양하게 제 허리춤에 양손을 얹었다.
“주인… 아, 아니! 이안 님께서는 대단한 활약을 하셨지. 오죽하면 황제 폐하께서 신물까지 내리셨겠어? 특히 길포드, 그 씹어 죽여도 시원찮은 영감탱이…….”
평소와 같이 걸출한 입담을 뽐내려던 엘시 선배의 목소리가 멈칫했다.
주위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인형 같은 외모로 내뱉는 걸걸한 입담을 처음 접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그랬으니까.
다만 엘시 선배가 주춤한 까닭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녀는 곧장 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신해진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 씹어 죽여도 시원찮은 어르신께서, 우리 뒤통수를 후려… 아, 아니 배신했을 때 홀로 그 원숭이 새끼… 가 아니라, 아기 원숭이의 멱을 따셨거든! 심지어 그 꼴같잖은 골통까지 박살… 은 아니고 시체까지 남김없이 처리하는 그 잔악성까지!”
‘잔악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의 말이 아닌 것 같았으나, 나는 일부러 이를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청중들이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엘시 선배는 내 질렸다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주인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애완동물처럼, 내게 머리를 부볐다.
엘시 선배의 말랑한 볼 감촉이 좋기는 했다.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여, 역시 주인님이야… 멋있어…….”
시체의 머리를 으깨버렸다는 점이 엘시 선배에겐 무척 인상 깊었던 듯했다.
그 난해한 감수성은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엘시 선배가 내게 달라붙자, 어디선가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장신의 중년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레이놀드 씨였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수십 명이 넘는 관중이 있는 자리라는 점을 떠올렸다.
요즘 엘시 선배가 하도 적극적으로 달라붙기에 눈치 채지 못했는데, 한창 때의 귀족 남녀가 보일 거리감으로는 부적절한 면이 있었다.
누가 보면 연인으로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웅성거리는 고향 사람들의 눈빛이 묘해지기도 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엘시 선배를 떼어내려던 차였다.
팍, 하고 엘시 선배와 내 사이에 삽날이 틀어박혔다.
나와 엘시 선배는 본능적으로 서로 거리를 벌렸다. 엘시 선배의 얼떨떨한 눈빛이 삽자루를 쥔 여인을 향했다.
그곳에는, 싱긋 미소를 머금은 리아가 서 있었다.
“……라이넬라 님, 아직 정식으로 혼담조차 오고가지 않는 사이입니다. 아무리 각별하더라도 이러한 자리에서는 자제해 주시죠.”
엘시 선배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성질대로라면 이제 울컥해서 온갖 욕설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엘시 선배는 직전에 내 눈치를 살피고 말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던 엘시 선배는, 시무룩해져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 으, 아… 네.”
쓸쓸하게 돌아서는 엘시 선배의 뒷모습이 유독 처량해 보였다.
잠시 안쓰럽다는 눈빛을 하고 있던 나는, 흘깃 리아를 바라보았다.
리아는 흥, 하고 새침하게 코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녀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넌 또 왜 삽 들고 있는데?”
“그야, 숯 장작을 넣을 구덩이가 필요하대서. 돼지 굽는 게 보통 일인 줄 알아?”
그 정도는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시키면 되지 않을까, 라고 핀잔을 주려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삽질을 하는 것만이 리아의 유일한 정신적 피로 해소 수단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리아는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내쉬며 소매로 땀을 닦아냈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이 번들거리며 요염한 미색을 드러냈다. 어디 내놓기만 한다면 채가려는 남자들이 한 수레는 될 텐데, 그 성깔이 문제였다.
그리고 리아는 오늘도 그 성질머리를 유감없이 뽐내기 시작했다.
“네드,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소문에는 으레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니까.”
리아의 일침에 네드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펄쩍 뛰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유년기의 영웅을 잃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하, 하지만 방금 그 귀족 아가씨가 분명히!”
“너는 그 말을 믿니? 라이넬라 님은 우리 오빠랑 절친한 사이에, 친구 고향에 내려왔으니 한 번쯤 띄워줄 수도 있는 거지.”
그러면서 리아는 심통이 난 얼굴로 제 귀밑머리를 쓸어 넘겼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우리 오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 중위권에 불과했다고. 그런 사람이 몇 달만에 대륙을 울리는 초신성? 후후…….”
스산한 웃음을 터트리던 리아는, 이내 느닷없는 고함을 터트렸다.
“……웃기지 마!”
그러면서 리아의 금빛 눈동자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시선을 피했다.
또 잔소리 시작이었다.
아마 오늘 오후에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지 못해 화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위험하잖아! 상식적으로 마인이니, 암흑교단이니… 전부 신화 속에 나오는 괴물들이라고! 그, 그런데 우리 오빠가 왜 그딴 일에 얽혀야 하는데?!”
그러나 네드도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꼬마아이가 더듬거리며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하, 하지만 진짜일 수도 있잖아요! 도련님은 옛날부터 수련도 꾸준히 해왔고…….”
“……후, 네드.”
안쓰럽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리아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네드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안타깝지만 노력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게 존재한단다… 그리고 우리 오빠는 재능이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못해. 알아듣겠니? 백날천날 노력해야 겨우겨우 ‘익스퍼트’에 도달할 수준이란 말이야!”
그 말에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었던 네드는 그만 격추되고 말았다.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은 리아는,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오빠도 알아들었지? 앞으로는 괜히 쓸데없이 위험한 일에 얽히지 말고, 우리 주제에 맞게 오순도순…….”
그러나 리아의 말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말굽 소리가 야밤의 페르쿠스 저택을 울렸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였다.
하지만 이미 연회가 시작된 지 한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지 않은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와 리아의 눈이 동시에 그 진원지로 향한 까닭이었다.
그곳에는 후드를 깊게 눌러쓴 정체불명의 인물이, 말을 탄 채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금속음이 그의 무장 상태를 짐작케 했다.
최소한 기사였다.
메마른 정적이 내려앉은 마당에서, 몇 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나와 셀린, 엘시 선배나 성녀, 그리고 세리아까지.
아무도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레이놀드 씨도 아무런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보겠다는 듯 말없이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말은 저택의 앞에서 멈췄다.
그가 이곳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명료해 보였다.
시골 영지라 기사를 볼 만한 일이 드물었던 고향 사람들은, 다소 불안한 기색이었다. 후드를 눌러쓴 정체불명의 기사를 본다면 나라도 그랬을 터였다.
내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댄 채,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새파란 궤적이 은하수처럼 세계를 양단했다.
반응할 수조차 없었다. 너무나 느닷없이 나타난 일격은, 환상처럼 스러졌다. 그러나 그 후폭풍은 명백했다.
칼바람이 터져 나오며 사방을 뒤흔들었다.
몇몇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종으로 그어진 검은 지반을 폭파시켰다. 흙먼지가 뒤섞인 바람 소리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암흑교단인가?
상대는 최소한 익스퍼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 전과 같은 신위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내가,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들려던 그 찰나.
“……스승님!”
해맑은 목소리와 함께 후드가 벗겨졌다.
그 안에서 나타난 여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단번에 어둠에 잠겨 있던 시야가 조금쯤 밝아졌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미모의 여기사는, 신이 나서 내게 다가왔다.
“마, 말씀대로 됐어요! 가르쳐 주신 그 기술, 완전하지는 않아도 느낌만큼은 알 것 같습니다!”
나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지금 내 손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 연신 감사의 말을 전하는 여기사가 낯이 익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려냈다.
황녀를 호위하던 루페미온 가문의 여식.
그녀는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 근위기사단의 아이린 루페미온이라고 합니다. 즐기시는 와중에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연달아 벌어진 사건에 할 말을 잃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세등등하던 리아조차도 넋이 나간 얼굴로 아이린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 근위기사단의 아이린 루페미온.
처음에 보여준 무위로 보았을 때 비범한 경지에 이른 인물임은 분명했다. 하물며 그 유명한 제국의 근위기사단 소속이라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루페미온’이라는 그 성.
“동부의 푸른 늑대…….”
누군가 읊조린 그 호칭이야말로, 제국의 5대 귀족 가문 중 하나를 대표하는 말이었다.
제국의 동쪽을 수호하는 루페미온.
그 일원이, 느닷없이 내게 ‘스승’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당장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리아나 네드는 물론이고, 나조차도 그랬다.
분위기가 영 좋지 않자 아이린 경은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깨달았다는 듯 곧장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마, 말씀대로 지금 도착했습니다! 스승님!”
자그마한 시골 영지에, 상상 이상의 전력이 집결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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