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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31화 (231/649)

〈 23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4)

* * *

나는 술잔을 챙겨들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푸른 머리카락을 단정히 정리한 여기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칠흑의 후드를 벗은 여인의 미모는 오밤 중에도 빛이 났다.

마치 먼지를 걷어낸 보석이 광택을 뽐내는 듯했다.

물론 여인의 자랑거리는 그 한 떨기 꽃과 같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이 자랑하는 근위기사단의 일원이자, 5대 귀족 가문의 일좌를 차지한 루페미온을 등에 업은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아이린 루페미온.

제국의 제5황녀 시엔이 애타게 찾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설마 페르쿠스 저택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이미 황녀에게 언질을 들은 바 있던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이를 짐작이나 했을 턱이 없었다.

아이린 경의 등장이 일대파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난데없이 등장한 수수께끼의 검사가 제 실력을 뽐내더니, 연회의 주인공에게 무릎까지 꿇은 상황이었다.

네드는 환호하다 목이 막혀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리아는 마지막까지 넋이 나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와 아이린 경을 번갈아 바라보았을 뿐.

그만큼이나 아이린 경의 소속이 주는 무게감은 엄청났다.

성녀나 엘시 선배, 세리아까지는 아카데미라는 특수한 배경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아카데미는 귀족과 평민의 감동적인 우정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린 경은 달랐다.

이미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공식적인 직함까지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한 실력자가 연하의 사내를 서슴없이 '스승님'이라고 부르다니.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누가 봐도 범상하지 않은 실력자가 존칭을 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했다.

내가 아이린 경보다 윗줄에 있는 강자라는 뜻이었다.

리아는 어버버거리다가 가까스로 한 마디를 짜냈다.

"……서, 설마 '익스퍼트'야?"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리아가 염두에 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를 두고 한 말인지, 혹은 아이린 경을 두고 한 말인지.

어느 쪽이라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다만 나는 리아가 받을 충격을 염려하여 말했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그렇게 나는 아이린 경과 독대를 하게 되었다.

의문을 품은 사람들은 많았다.

어째서 아이린 경이 나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는지, 주군을 두고 왜 페르쿠스 저택을 찾아왔는지, 등장과 함께 보여준 수수께끼의 검술 기예는 무엇인지.

그 의문을 품은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온갖 의혹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나는 아이린 경과의 독대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나도 마땅히 내놓을 대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아이린 경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이전과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원인이 미래의 ‘나’라는 점은 명확했다.

그러므로 대략적이나마 사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미래의 ‘나’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이린 경은 다소 부끄러웠는지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였다.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한 그녀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술병이 기울었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주향이 퍼져 나갔다. 아이린 경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최근 워낙 암울한 일이 많았던 터라.”

뒷말이 생략되어 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했으니, 과한 반응을 보인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아이린 경이 오랜 시간 방황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그래서 더욱 의문이었다.

아이린 경이 선보인 기술은 미래의 ‘나’에 의해 전수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아이린 경은 기나긴 암흑의 시절을 이겨낼 희망을 보았으리라.

유일한 문제는 왜 하필 아이린 경에게 그러한 희망을 보여주었냐는 점이었다.

미래의 ‘나’는 온갖 조언을 하긴 했어도 기술을 전수한 적이 드물었다. 애초에 내가 사내의 기억을 바탕으로 알아서 강해진 덕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린 경이 전수받은 기술은 궤가 달랐다.

직관이나 직감만으로는 통달할 수 없는 현기가 느껴지는 기예였다.

아이린 경이 ‘스승님’이라 부를 만큼의 공을 들인 전수 과정이 수반되었을 터였다.

여기사는 조심스레 내게 술을 따랐다.

허공에서 잔이 부딪히고, 불길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나는 일단 예의를 갖춰 환영의 말을 건네기로 했다.

“……우선, 페르쿠스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 단지 스승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니까요…….”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이는 아이린 경은 무척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도대체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목젖까지 치고 올라온 의문을 애써 가라앉히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끌었다.

“검술이 많이 느셨군요.”

“호위기사니까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막힘없는 대답이었다.

도리어 그 말에는 전에 없던 자부심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다시 황녀 전하의 곁에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돌아갔을 때, 이전과 같은 실수만큼은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요."

나는 아직 명료한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해 침묵했다.

단지 술잔을 기울였을 따름이었다.

아이린 경은 내 침묵을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했다.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이내 다소곳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물론, 이 또한 스승님의 은혜 덕이겠지요.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보답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보답이라뇨?"

"네, 무엇이든!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 스승님께 보답하겠습니다.“

나는 다소 곤혹스러운 기분이었다.

사실 아이린 경에게 내가 무엇을 해주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보답을 하고 싶다니, 나로서는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었다.

짧은 대화를 통해 내가 유추해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이린 경은 미래에서 온 ‘나’에게 검술을 사사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말했듯 미래의 ‘나’는 아이린 경을 페르쿠스 저택으로 보냈다. 그렇다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였다.

당장 내가 궁금한 내용은 후자에 속했다.

나는 결국 헛기침을 하며 아이린 경의 주의를 돌려야 했다.

“그저 도와드릴 수 있는 만큼 도와드렸을 뿐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한 일에 보답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리가요!”

내 겸양 어린 말에도 아이린 경의 태도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힘을 주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물론,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다짜고짜 발길질을 하셨을 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다짜고짜 발길질을 했다고요?”

아이린 경의 진술에는 처음부터 턱, 하고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내가 무심코 반문하자 아이린 경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오히려 말하자면 문제 투성이였다.

난데없이 발길질을 하는 인간이 정상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 경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의심도 섞여 있지 않아서, 나는 그녀를 더는 추궁하지 못했다.

내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항복의 표시였다.

“……그, 아닙니다, 계속 하시죠”

아이린 경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기나긴 감사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하여간 그 발길질을 포함해서, 스승님께는 너무나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꺾일 뻔한 제 자신을 가다듬을 기회가 됐으니까요. 심지어 소드 서클의 비전까지 가르쳐 주시다니…….”

나는 아이린 경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정보를 차곡차곡 뇌리에 쌓아올렸다.

술이 독한 탓인지, 두어 잔을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아이린 경의 이야기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날의 기억을 모조리 털어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물론 나 또한 술기운이 올라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처럼 페르쿠스 저택까지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간의 성취를 스승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것뿐입니까?”

내 짤막한 질문에 아이린 경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아이린 경의 이야기는 짧은 만큼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다. 당장 자세한 사정까지 파고들 수는 없더라도, 나는 조금 더 숨겨진 내용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아이린 경이 페르쿠스 저택으로 와야만 했던 이유.

나는 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금 더, 중요한 언질이 있지 않았습니까? 페르쿠스 저택으로 와야만 하는…….”

“아.”

아이린 경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조금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쩔쩔 매면서, 그녀는 내게 사죄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곧장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을 기세였다.

“그,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스승님. 당장 시정을……!”

“아니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연상의 여인이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경험은 델핀 선배로 충분했다.

나는 다급히 아이린 경을 뜯어말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이라도 떠올리셨다니 다행입니다.”

“네, 네… 이제 기억났습니다.”

아이린 경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춤주춤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내 눈짓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몸이 곧 의자 위로 무너져 내렸다.

달아오른 얼굴로 술잔에 남은 술을 단번에 들이키며, 아이린 경은 증언했다.

“……여동생 분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리아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술잔을 기울이던 내 손이 단번에 정지하는 순간이었다.

**

“꺄, 꺄악!”

벌컥 응접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내 여동생, 리아였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내 여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여쁜 외모였다.

응접실의 문에 귀를 대고 나와 아이린 경의 대화를 엿듣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러한 시도를 한 사람은 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부터, 네드를 비롯한 고향 사람들 몇몇이 응접실 바깥에서 바짝 귀를 기울이고 있던 차였다. 리아의 비명을 듣자마자 다들 딴청을 피웠지만 말이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뭐해요?”

“아니, 뭐…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왜 오지 않나 싶어서 말이다.”

애써 내 시선을 피하며,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채근하지 않았다.

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휘휘 손을 휘저었을 뿐이었다.

“자, 이제 끝났으니 돌아갑시다. 그리고 참, 아이린 경은 한동안 페르쿠스 저택에 머물 예정이라고 하시네요.”

내 말에 아버지의 눈빛이 미묘해졌다.

손님이 늘어날수록 귀족으로서의 위신은 더욱 굳건히 서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귀족들은 손님을 대접하기를 어려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내 집에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아무리 가주라고 해도 눈치가 보이는 것이 정상이었다.

심지어 새로 온 손님도 루페미온 가문의 여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귀족으로서의 권위에 딱히 관심이 없는 아버지로서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나는 어쩔 수 없이 불효자를 자처하기로 했다.

아이린 경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결국 응접실 앞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내 재촉을 이겨내지 못했다. 하나둘씩 아쉬운 걸음을 옮겼는데, 그 눈동자는 여전히 아이린 경에 대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참 오지랖도 넓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인물도 있었다.

“……흠, 흠흠!”

헛기침을 하며, 내 주의를 끌어보려고 노력하는 흑발의 미녀.

내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새침한 체를 하고 싶었는지 옆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봐야 볼에 떠오른 홍조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안 가고 뭐해?”

“그, 그야 페르쿠스 저택의 접대를 담당하는 몸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거지! 상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오빠와 어떤 관계인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잖아?”

그러면서 검지를 척 치켜드는 여동생의 모습은 일견 당당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눈을 감은 채, 나의 시선을 피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직도 여동생의 수치심은 온전히 가시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이제 곧 성인이 될 텐데 오빠가 나누는 대화나 훔쳐들으려 들다니.

남들이 보기에는 오해를 사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내 여동생은 그만큼이나 나를 좋아했다.

나도 내 여동생을 무척 아끼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꾹 조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만일 여동생이 위험에 처한다면 십중팔구는 나 때문일 터였다. 그동안 암흑교단에게 너무나도 밉보여 왔던 나였으니까.

내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여동생은 계속해서 횡설수설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그리고 상대는 루페미온 가문의 사람이잖아? 대화를 들어보면 장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고… 또, 또…….”

“리아.”

내 나지막한 호명에 리아는 감겨진 눈꺼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 아아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그래, 나성인식이 내년이야! 그런데 아직도 오빠한테 집착하는 여동생이 꼴불견이라고? 하, 하지만 오빠 잘못도 있잖아! 왜 종일 나 말고 다른 여자랑……!”

그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나는 말없이 리아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턱, 하고 내 손길이 리아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리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하지 마, 너만큼은 다치지 않도록 할게.”

리아의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그러기를 아무리 반복해도 그 틈새로 언어가 새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난데없는 말에 내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취기가 열기처럼 뇌를 달구었다.

아이린 경이 넘긴 정보는 하나가 더 있었다.

“……그리고 외곽의 빈민가를 순찰하라고 하셨던가요?”

자그마한 시골 영지라 본격적인 빈민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외곽의 허름한 시골 마을을 그렇게 부를 따름이었다.

나는 내일 당장 그곳으로 향해 보기로 했다.

*

그리고 그날 밤.

“이, 이아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연분홍빛 눈동자가, 내 품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호, 혹시내가 질렸어요?!”

그 달콤한 목소리에는 은은한 주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내 손이 낯가죽을 훑어내렸다.

이 여자, 취했다.

그것도 남의 침실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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