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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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는 얼마 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사랑하는 사내의 곁에 거슬리는 여자가 하나 달라붙었기 때문이었다.
엘시 라이넬라, 아카데미 최고학년의 악명 높은 ‘꼬마 악당’.
본래부터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성녀 또한 엘시에게 당한 몇몇 학생들을 치료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
도를 넘은 폭력이 어째서 무서운지 말이다.
엘시에게 당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증언을 거부했다. 감히 보복이라도 하려 들었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엘시는 영악했다.
결코 라이넬라 가문의 휘광으로도 감출 수 없는 죄는 짓지 않았다. 건드리는 것은 주로 하급 귀족과 평민들이었다.
약자들만 계산적으로 괴롭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고아 출신이었던 성녀에게 있어 엘시의 인식은 최악이었다.
잔인하고 비열한 여자가 아닌가.
그 외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하지만 그 알맹이만큼은 ‘악당’이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으리라.
그랬던 여인이 한 사내에게 패배했다.
그날 이후, 소녀는 사내에게 굴종했다. 처음에는 굴욕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여인은 얼마 뒤 순종적인 애완동물이 되었다.
그리고 사내를 대하던 그 태도는 얼마 전을 기점으로 또 다시 일변했다.
사내의 팔에 매달려서,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그 달콤한 눈빛.
모를 리가 없었다.
성녀도 때때로 그러한 눈빛을 하곤 했으니까.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성녀의 낯빛에 자그마한 균열이 일었다. 성녀는 이를 감추고자 살짝 입술을 짓씹었다.
그 옆에는 미색이 출중한 귀부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성녀와 자매지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젊은 외양의 여인이었다. 통칭 ‘페르쿠스 부인’이라고 불리는 저택의 안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독실한 천신교의 신자인 그녀는 주로 성녀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페르쿠스 자작이 엘시를, 아론이 세리아를 유독 신경 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페르쿠스 부인이 성녀에게 가지는 관심의 종류는 조금 달랐다.
엘시나 세리아는 이안의 예비 신부로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애초에 페르쿠스 자작은 레이놀드로부터 라이넬라 가문의 입장을 전해들은 마당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며느리가 될지도 모를 엘시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사돈이 될 라이넬라 가문의 위세가 페르쿠스 가문보다 높으니 더더욱.
세리아 또한 무뚝뚝한 아론으로부터 많은 신용을 받는 와중이었다. 아론은 그 묵직한 성격답게 신의를 중시했는데, 세리아의 일편단심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혹은 사회성이 떨어지는 두 인간의 동병상련일지도 몰랐다.
반면 페르쿠스 부인이 성녀에게 가진 흥미란 주로 신앙에 관련된 부류였다.
시골 영지에서 제대로 된 성직자를 만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성녀씩이나 되는 최고위 성직자가 찾아왔으니, 신도로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리어 페르쿠스 부인이 이안의 신붓감으로 내심 낙점하고 있던 인물은 따로 있었다.
“……성녀님, 과연 이안이 라이넬라 가문과 잘 해나갈 수 있을까요?”
그 한숨 섞인 질문에 성녀는 움찔 몸을 떨고 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안의 곁에 달라붙던 엘시가 거슬리던 차였다. 심지어 최근 이안은 엘시에게 너무 무르기까지 했다.
수십 명 앞에서 이안을 ‘주인님’이라고 불렀다던데, 그 이후부터 이루어진 변화였다.
성녀는 그 점이 유독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작 몸에 손을 댄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
그녀는 조금 불퉁한 심정이 되어, 애써 가라앉힌 어조로 답했다.
“이 또한 이안 형제님께서 하기에 달렸겠죠. 천신께서는 의로운 자에게 의로운 고난을 내립니다. 중요한 것은, 바람 속에서도 굳건히 버틸 뿌리를 지니는 것이겠죠. 신앙이든, 정의감이든… 임마누엘.”
마음 같아서는 라이넬라 가문에 대한 온갖 중상모략을 늘어놓고 싶은 기분이었다.
약소가문 출신 데릴사위라면 차별을 당할지도 모른다느니, 혹은 위험하고 힘든 자리만 전전할 수도 있다느니.
하지만 지금 페르쿠스 부인은 성직자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함부로 사감(??)을 담아 신의 뜻을 왜곡할 수는 없었다. 이는 성녀가 지닌 성직자로서의 신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속이 쓰리긴 했지만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녀의 조언에도 페르쿠스 부인의 불안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요즘 아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에요. 마인이니, 암흑교단이니… 그런 끔찍한 괴물들을 우리 연약한 이안이 어떻게 쓰러트릴 수 있겠어요?”
잘만 쓰러트리던데요.
성녀는 당장이라도 그렇게 반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끼 한 자루 들고 마수 수십 마리를 쓰러트리던 이안을 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귀향제 당시 마수들을 남김없이 베어버리던 그는 전장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그렇게 미소 지은 입꼬리가 흔들릴 뻔했으나, 성녀는 또 다시 감정을 다스려냈다. 단지 이어지는 페르쿠스 부인의 한탄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었다.
“사실, 행복하기 위해 반드시 유명해질 필요는 없잖아요. 이안이 쓸데없이 너무 위험한 일에 엮인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조용히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셀린이랑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면서 페르쿠스 부인은 연민을 담아 소녀 하나를 바라보았다.
키득거리며 이안의 고향 사람들과 시시덕거리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셀린 하스터’였다.
오랜 시간 이안의 가족들과 인연을 이어왔고, 붙임성도 좋아 오늘의 연회에서 셀린의 인기는 높았다. 그 옆에 앉은 레토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위 귀족인 엘시나 세리아나, 성국의 최고위직인 성녀보다는 덜 부담스러운 상대라는 점도 한몫 했다.
연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세리아야 제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니 제외하더라도, 가족의 지원을 등에 업은 셀린은 살짝 위협적인 상대였다.
가문과 가문 간의 혼약까지 추진 중인 엘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성녀는 바짝바짝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페르쿠스 부인이 따라주는 술을, 무심코 받아들고 말았다.
페르쿠스 부인은 뒤늦게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그, 죄, 죄송합니다… 성직자 분께 술을 따라드리다니…….”
일반적으로 천신교들의 성직자들을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만일 실수라도 성직자에게 술을 권했다간 실례라는 인식이 대중적이었다.
하물며 손님으로 온 성녀에게 술을 권하다니.
이 얼마나 커다란 무례란 말인가.
페르쿠스 부인의 낯빛이 창백해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혹여 아들의 앞날에 방해라도 될까 싶어 페르쿠스 부인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성녀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도 그때였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숙이려 하는 페르쿠스 부인을 향해, 성녀는 깜짝 놀라 도리질을 쳐야 했다.
“아, 아니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성직자도 음주가 금지된 건 아니거든요… 기, 기분만 내는 정도라면야!”
그러면서 성녀는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단숨에 술을 식도에 털어넣었다.
페르쿠스 부인은 그때까지도 조금 얼떨떨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당황하는 성녀의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낀 덕이었다.
성녀는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작열감에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페르쿠스 부인이 따라주는 술을 감히 거절할 도리가 없어, 몇 잔이나 되는 술을 들이킨 이후.
성녀는 헤롱헤롱 풀어진 얼굴로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자는, 여자의 몸에만 관심이 있는 걸까요?”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술자리란 때때로 맥락에서 벗어난 물음조차 흘려버리는 법이었다. 마찬가지로 취기가 올라 발그레한 홍조가 떠오른 페르쿠스 부인은, 슬쩍 성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여인이 보더라도 감탄스러운 굴곡이었다.
사내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했다. 그래서 페르쿠스 부인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성녀님의 몸이 워낙, 음… 그렇잖아요? 하지만 많은 여인들이 성녀님을 부러워할 거예요.”
“……부럽다고요?”
“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그날 밤에 찾아가서 확…….”
그렇게 장난스러운 말을 이어가던 페르쿠스 부인은, 문득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이내 부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크흠,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썼다.
“……화, 확 마음을 전하러 가본다든가~?”
딴청을 피우며 수습을 시도하는 페르쿠스 부인의 목소리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평소라면 이를 눈치 채지 못할 성녀가 아니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녀는 술에 무척 취해 있었다.
물론 이는 연회에 참가한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래서 남몰래 성녀가 연회장을 빠져나갔을 때도, 이를 눈치 챈 사람은 얼마 없었다. 고작해야 유렌 정도가 흘깃 시선을 옮겼으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성녀가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는 대략 짐작이 갔으므로.
그렇게 성녀는 이안의 침실을 습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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