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33화 (233/649)

〈 23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6)

* * *

느닷없이 찾아온 성녀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울먹이는 성녀를 앞에 두고 난감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전조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내 품에 안겨 훌쩍이는 여인을 보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하물며 그러면서 질문이 ‘내가 질렸어요?’라니.

마치 헤어진 연인 중 하나가 매달리는 모양새가 아닌가.

이것만 하더라도 꽤 곤란한 구도였는데, 문제는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바로 내 품에 안긴 성녀의 몸이 전하는 감촉이었다.

성녀의 굴곡진 여체가 꾹꾹 내 몸에 푹신한 감각을 전하고 있었다.

술에 취하면 촉각이 무뎌진다지만, 성녀의 몸이 그리는 예술적인 곡선은 취기에 젖은 신경마저 일깨웠다.

그만큼이나 색정적인 육체였다.

나는 속으로 성호를 그으며 내 인내심이 버틸 수 있기를 기도했다.

임마누엘, 천신이여 부디 자비를 내리시기를.

“성녀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왜 성녀님이 질려요?”

“……그, 그렇지만!”

성녀는 울먹이며 내게 항의했다.

술에 취한 탓인지 성녀의 눈물샘이 오늘따라 헤펐다.

“지난번에 가슴 만진 이후로… 시, 신경도 안 쓰잖아요! 계속 기다렸는데!”

“아니, 그게 무슨……!”

나는 성녀의 폭탄발언에 다급히 주위를 훑었다.

내 방이었으므로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 사실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더더욱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도대체 성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러나 당장 그녀를 달래주지 않으면 위험한 발언이 이어질 듯했기에, 나는 재빨리 성녀를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질리다니요, 어떻게 성녀님한테 질릴 수 있겠습니까? 음… 그러니까 신성력도 뛰어나고.”

“……‘신성력 주머니’가 좋다고요?”

그러면서 성녀는 은근슬쩍 제 젖가슴을 내 몸에 들이밀었다.

꾹꾹, 기분 좋은 탄력이 느껴지자 나는 기겁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그, 그럼 싫어요?”

나를 올려다보는 연분홍빛 눈동자에 다시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성녀가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쪽은 무조건 나였다.

남녀가 단 둘이 침실에 있는데, 여인이 울음을 터트린다?

심지어 상대는 천신교의 성녀였다.

내 사회적 위신은 물론이고, 성녀가 마음먹기에 따라 종교재판이 열리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성녀가 농담거리로 ‘종교재판’을 운운했던 기억이 문득 내 뇌리를 스쳤다.

궁지에 몰린 나는 우선 성녀를 계속 달래 보기로 했다.

“아니요, 아니요! 좋습니다! 당연히 좋죠, 솔직히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지, 진짜죠?”

성녀의 얼굴에는 그제야 화색이 돌고 있었다.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자 나는 이보다 한 술 더 뜨기로 했다. 나 또한 술에 취한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요! 그렇지 않으면 소원까지 쓸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만지고 싶었으면… 실은, 지금도 그래요.”

성녀의 낯빛에 퍼져 나가던 웃음기가 곧 만발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 성녀가 다소나마 만족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또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주정뱅이를 상대하는 일은 질색이었다.

이제 성녀를 적당히 구슬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술 몇 잔을 더 먹이면 성녀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잠들 터였다. 그때 유렌을 부르면 그가 알아서 처리해 주겠지.

그러나 내 희망은 이어지는 성녀의 돌발행동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럼 증명해 봐요!”

무엇을, 이라고 되묻기도 전이었다.

성녀가 눈을 질끈 감고 제 몸을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린 채 나를 재촉하듯 말했다.

“그, 그렇게까지 좋으면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고요!”

왜 이리 질척대지.

나는 한숨과 함께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으나, 그러면서 은근슬쩍 동하는 음심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솔직히 혹했다.

누가 혹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이 빚은 예술품과도 같은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반면, 그 몸은 사내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환상을 시각화한 듯했다.

목덜미부터, 흉부, 허리, 골반, 둔부, 그리고 발까지 이르는 그 모든 곡선들이 그랬다.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육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물며 지금 성녀는 취한 상태였다.

바라는 대로 해주지 않는다면, 또 울음을 터트릴지도 몰랐다.

어설픈 핑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술 취한 사내가 솔직해지기에는 그 정도 변명이면 충분했다.

내 손이 턱, 하고 누운 성녀의 가녀린 손목을 눌렀다. 성녀가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지만, 나는 마치 덮치듯 그녀의 위를 점한 뒤였다.

달큰한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성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헐떡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향이 풍겨왔지만 그마저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성녀의 고운 살결이 어느덧 눈앞에 놓여 있었다.

여태껏 울고불고 하던 것과는 달리, 성녀는 실전을 앞두자 무척이나 긴장한 기색이었다.

숨조차 죽인 채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겠다는 듯.

일단 성녀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나는 성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진짜 마음대로 해요?”

여인의 속눈썹이 전율하듯 파르르 떨렸다.

성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의 개폐만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나는 그 뜻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성녀의 결심을 기다리기를 한참.

결국 성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마, 마음대로 하든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자였다.

아무래도 충격요법이 필요할 듯 싶었다.

그렇게 내 손이 성녀의 존재감 넘치는 흉부를 움켜쥐었다.

“흐으… 으으응?!”

그것만으로도 성녀는 몸을 살짝 비틀며 달콤한 비음을 흘렸다.

그 색정적인 신음에 도리어 내가 당황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성녀도 놀랐는지 남은 한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말았다. 슬쩍 내 눈을 피하며, 성녀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노, 놀라서 그래요… 그냥 놀라서…….”

“그럼 계속합니다?”

성녀는 아무런 말도 돌려주지 않았다.

단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나는 늘 까칠하던 성녀가 얌전해졌다는 사실에 미약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뺐다.

“흐으, 으응… 흐으읏?!”

성녀의 부드러운 살덩이는 힘을 주는 대로 그 형체를 마음대로 흐트러트렸다. 손에 전해지는 저항감이 그 탄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옅은 몸부림을 치는 성녀의 모습은 절경이었다.

음심이 절로 치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성녀의 숨소리는 어느새 거칠어져 있었다. 잘 모르겠지만, 나도 그럴지도 몰랐다.

애써 그러지 않은 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절한 연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 이아안…….”

녹아내릴 듯 흐느적거리는 음색이었다.

취기에, 흔들리는 달빛에, 열기와 조명에,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꼿꼿하던 여인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완연한 무장해제였다.

처음에는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녀는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절벽 위의 꽃이라 생각해서 건드리지 않았을 뿐이지, 내가 그녀에게 어떠한 매력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넋을 놓았다간 어느새 그 포로가 되어있을 것만 같아서 무시했을 뿐이다.

술기운은 그 모든 것을 흐물거리게 만든다.

의지와 자제심.

이성과 남녀지간의 거리감.

그리고 여인의 육체까지도.

성녀는 다시 한 번 애원했다.

“이, 이안…….”

나는 또 다시 망설이는 수밖에 없었다.

술기운에 이러는 것이 과연 맞을까?

무엇이 욕망이고 진심인지조차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성녀의 연분홍빛 동공이 흔들렸다.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를 보는 순간 나는 가슴속에서 치닫는 감정이 있었다.

잠시 주저하다가,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진다.

애초에 처음인지라 무엇이 순서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본능에 이끌리듯 두 남녀의 입술이 서로간의 격차를 줄여갔다.

달콤하고, 달콤한 주향이 뜨겁고 눅눅했다.

뇌리를 녹일 만한 온도였다.

성녀는 아무런 거부 의사도 표명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순종적인 태도였다.

그러므로 이 모든 행위의 책임은 오롯이 내게 있었다.

유혹한 것은 성녀였지만, 결정은 내가 내렸으니까.

말없이 두 남녀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홀린 듯 입술을 마주치려던 그때.

“……주, 주인님?”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떨리는 음색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어질 상황을 짐작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성녀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내 침실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울먹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엘시 선배였다.

나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그래,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내게 지워진 짐은 아직도 잔뜩 남아있었다.

세상을 구하고 그 도중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한가롭게 사랑놀음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장 엘시 선배에게 해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엘시 선배는 그 자리에서 석상이라도 될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 엘시 선배? 사실은 말입니다…….”

엘시 선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눈물을 흩뿌리며 소녀가 도망친다.

그녀의 손에는 자그마한 수통이 들려있었다. 곤두선 후각으로 맡아보니 꿀물의 냄새였다.

숙취를 걱정해서 나를 찾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엘시 선배를 붙잡으려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두 번째였다.

엘시 선배에게 성녀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다 들킨 것이.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울먹거리던 엘시 선배를 보니, 뜨겁던 뇌리가 단번에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녀는 당황한 탓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시 선배한테는 제가 설명할게요. 우선 쉬고 계세요.”

그러면서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마지막 순간, 성녀의 연분홍빛 눈동자에 희미한 결기가 스치기 전까지는.

스륵, 하고 성녀의 다리가 내 몸을 휘감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성국의 비전 유술 중에는 다리를 쓰는 기술도 있었다.

내 상반신이 다시금 훅, 하고 쓰러지듯 성녀의 몸 위를 덮었다.

내가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성녀는 색정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나 말고 다른 여자 생각 금지.”

그러면서 성녀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오직 나만 생각해요. 그러기로 했잖아요?”

단 한 번도 그러한 약속을 맺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성녀의 유혹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이미 분위기는 넘어간 뒤였고, 불길처럼 타던 음심에 새로운 장작이 던져진 마당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는 성녀의 목소리가 걸렸다.

은은한 떨림이 묻어나오는 음색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와 성녀의 눈이 다시 한 번 마주쳤다.

달빛을 배경 삼아,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려던 그 찰나.

“……야 이 씨발년아!”

야밤의 저택을 울리는 고함 소리가, 문 앞에서 터져 나왔다.

너무나 큰 소리였다.

이 정도라면 연회가 벌어지는 마당까지도 들릴 터였다. 나는 또 다시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 또한 이러한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문 앞에는 엘시 선배가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그 손에 식칼을 든 채로.

파직거리는 전하가 식칼에 맺혀 있었다.

내 눈빛이 일순 멍청해졌다. 엘시 선배가 식칼까지 들고 올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애초에 식칼보다 엘시 선배의 전격 마법이 수십 배는 더 강하기도 했고.

그러든 말든 엘시 선배는 결의가 서린 목소리로 계속해서 외쳤다.

“우, 우리 주인님한테 안 떨어져?! 이 젖탱이 년이!”

“……저, 젖탱이?!”

그 모욕적인 입담에 성녀 또한 튕겨 오르듯 몸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연분홍빛 눈동자에는 어느덧 수치와 분노, 그리고 짜증이 서려 있었다.

“지, 지금 말 다했어요?!”

“그래, 말 다 했다! 가진 건 젖탱이밖에 없는 주제에… 어딜 감히 우리 주인님을 넘봐?!”

문득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우리 술 취해 있었지.

나는 두개골을 웅웅 울리는 두 여인의 말싸움을 들으며, 터벅터벅 걸어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단번에 입 안에 털어넣었다.

그제야 좀 두통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 젖탱이? 그, 그러는 당신은 뭔데요? 그 ‘젖탱이’도 없는데 이안을 유혹할 수는 있나?”

“……우, 우리 주인님은 고작 그깟 젖탱이에 홀리지 않아!”

“푸흡, 아하하… 그런 것치곤 두 번이나 저와 이안을 방해했잖아요? 지난번처럼 눈물이나 흩뿌리며 방에 처박힐 것이지!”

결국 나는 또 한 잔의 술을 술잔에 따르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둘 다 그만합시다… 다 들려요."

어느덧 웅성거리는 소음이 내 침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얼굴이 다 수치심으로 벌개질 지경이었다.

엘시 선배가 점점 더 이상해지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