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34화 (234/649)

〈 23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7)

* * *

전날의 소란은 저택의 모두에게 알려졌다.

페르쿠스 저택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야 귀족이 살고 있는 곳이니 넓기는 넓었지만, 고위 귀족들의 영주성에 비할 규모는 아니었다.

내 침실에서 터져 나온 소음이 마당까지 닿을 정도는 되었다.

연회에는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심지어 오지랖 넓기로 유명한 페르쿠스 영지민들이었으니, 그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우르르 몰려들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물며 내 가족들이 앞장을 섰을 정도라면 더더욱.

평민 따위가 감히 귀족의 저택에 흙발을 들이미냐며 엘시 선배가 길길이 날뛸 뻔했으나, 안타깝게도 페르쿠스 저택에서 이를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의 사건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으니까.

엘시 선배는 이를 지적하기 전에 식칼을 들고 있던 전말부터 설명해야 했다. 아무래도 흥분해서 주방부터 찾아간 모양인데, 굳이 날붙이를 고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엘시 선배의 변명은 그랬다.

“마, 마법을 쓰면 주인님까지 다치니까…….”

다시 말해 찔러도 성녀만 찌르고 싶었다는 뜻이었다.

성녀는 기가 차다는 반응이었지만, 천신교의 성녀로서 지켜야 할 위신이란 것이 있었다. 연달은 사건에 조금쯤 정신을 차린 성녀는 그제야 내숭을 되찾았다.

성녀는 입술에 침조차 바르지 않고 거짓을 늘어놓았다.

“교리에 관한 몇 가지 조언을 위해 이안 형제님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눴는데, 엘시 자매님께서 이를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임마누엘.”

그러면서 은은히 백색의 신성력을 피워 올리는 성녀를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신앙심이 깊은 우리 어머니만이 성호를 그으며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임마누엘.”

물론 모든 이들이 의혹의 시선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세리아나 셀린의 눈빛은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엘시 선배에게 들켜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혹시 세리아가 식칼을 들고 찾아왔다면 그날 대참사가 벌어졌으리라.

여동생 또한 무척 짜증이 난 기색이었다.

흐트러진 침대와 후끈 달아오른 침실의 공기, 그리고 두 여자가 드잡이질을 하는 상황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울 만했으니까.

그러나 여동생도 함부로 이에 대한 추궁을 할 수는 없었다.

성녀와 라이넬라 가문의 여식이 얽힌 일이었다. 자칫하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이대로 묻고 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여동생은 내게 한 마디 경고를 남겼다.

“……내일 봐, 오빠.”

두고 보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내일 당장 ‘빈민가’로 향하려던 내 계획이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아침에 여동생에게 바가지를 긁힌 뒤에야 빈민가로 향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에야, 나는 평온한 고독을 되찾았다.

마시다 만 술이 남아있어 술잔을 계속해서 기울였다. 취기가 증기처럼 뇌리를 달굴수록 내 사고는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갔다.

도대체 암흑교단은 이곳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미래에서 온 ‘나’는 아이린 경에게 여동생으로부터 눈을 떼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렇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여동생이 위험에 처할지도 몰랐다.

또한 지금 영지에 집결한 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리 암흑교단이라 하더라도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 일천에,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에, 익스퍼트까지 다수 포진한 시골 영지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술에 취해 의식이 몽롱해질수록, 내가 꾸는 꿈은 가까워진다.

이제는 흐릿한 경계선을 넘듯 익숙한 감각.

또 다시 나는 누군가의 꿈을 꾸었다.

*

“흐름을 이해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질 나쁜 사기꾼이 할 만한 이야기였다.

하나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니, 대개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치부할 만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가 스승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고작해야 1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흑발의 여인은, 놀랍게도 퇴폐적인 미를 품고 있었다. 오죽하면 물고 있는 파이프 담배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정작 하는 짓은 어린 아이와 다름없었지만.

대마녀는 제 앞에 둥실 떠오른 물방울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좁은 틈새를 타고 물줄기가 찌익, 하고 내 몸을 적셨다.

탁, 하고 장작을 패고 있던 나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도대체 물총놀이가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고얀 놈, 이 스승의 깊은 뜻을 몰라본단 말이냐? 이처럼 흐름에 통달하면, 흐름을 좁은 틈새에 우겨넣어 수십 배는 강한 힘을 낼 수 있지.”

그러면서 대마녀는 톡, 톡, 하고 가녀린 검지로 물방울을 몇 차례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물줄기가 쏘아지며 내 옷을 적셨다. 어차피 땀으로 흥건히 젖은 판이었으니, 차라리 찬물로 몸을 식힐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마녀를 무시하기로 했다.

은근히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란 사실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지금껏 수년을 보아왔으니까.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제자들이 떠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련에 지쳐버린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마녀가 얼마 남지 않은 제자 중 하나에게 집착하는 것쯤이야,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게 할 일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차마 스승을 박대할 수는 없던 내 입에서 타박이 흘러나왔다.

“지금 장작 패고 있잖습니까… 이제 곧 사매가 올 텐데, 장작 제대로 안 패놓으면 또 한소리 들을 게 뻔하다고요.”

“흥, 사랑놀음에 빠지더니 이젠 스승보다 사매가 우선이냐?”

“……진짜 그런 사이 아닙니다.”

“두고 볼 일이지.”

그렇게 스승은 코웃음을 치며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짜증이 어린 그 목소리로 보아, 그새를 참지 못하고 사매를 괴롭히러 간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툴툴거리며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녀가 나타났다.

갈색 머리카락이 물에 푹 젖어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는 짜증이 맺혀 있어, 누가 봐도 그녀가 저기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매는 내 앞에 서자마자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저놈의 할망구 짜증나 죽겠네!”

그러면서 사매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여전히 스승에 대한 존중이라곤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매, 스승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제자한테 물총이나 쏘는 꼬마가 스승은 무슨… 그, 그리고 사매 아니라고!”

팍, 하고 손도끼가 다시 한 번 장작을 갈랐다.

내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높이던 사매는, 흐응, 하는 소리와 함께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리에 한 손을 얹은 폼이 얼핏 보기에도 껄렁했다. 왕년의 버릇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왜 오늘따라 이 선배님이랑 눈을 마주치지 못하실까?”

하여간 눈치 하나는 귀신이었다.

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애써 사매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나 사매는 총총거리며 내게 다가와 일부러 몸을 밀착시켰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물에 젖은 선배님을 보고 욕정이라도 했어?”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하기가 힘들었다.

대수림의 살인적인 폭염에 사매는 늘 겉옷을 허리에 묶어놓고 일을 하곤 했다. 그러면 겉옷을 벗으면 되지 않나 싶지만, 마법사의 자존심이 있다나.

대신 안에는 늘 새하얀 반팔 셔츠를 입곤 했다. 그런데 사매의 옷이 홀딱 젖었으니, 그 안의 속옷이 비치는 것은 당연했다.

사매는 우쭐해져서 검지로 내 몸을 쿡쿡 찔렀다.

“새끼, 너도 남자구나? 얌마, 아무리 관심 없는 척해도 다 티 나! 꼴리냐? 꼴리지? 응?”

“……아, 그만해요. 진짜!”

“꺄악! 발정난 후배가 선배를 덮치려 해요!”

그렇게 키득거리며 한동안 나를 놀려대던 사매는, 까치발을 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야, 근데 꼴릴 거면 나한테만 꼴려라?”

“그게 됩니까?”

“아님 성희롱으로 신고할 거야.”

웃기는 소리, 당사자도 아닌 사람이 어떻게 신고를 한단 말인가.

한참이나 사매의 말상대를 해준 뒤에야 나는 보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매는 후, 후, 하고 입으로 바람을 불며 불을 피웠다.

왜 전격 마법사인 자신이 이따위 일을 해야 하느냐고 따졌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능숙한 솜씨였다.

그 옆에서 식기를 준비하고 있던 내가 물었다.

“……그래서, 스승님은 왜 갑자기 물총에 꽂혔답니까?”

“낸들 알아? 또, 뭐… 그 운명적 직감인가 뭔가겠지.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할 수 없는 적도 있다나?”

흐흥, 하고 웃긴다는 듯 사매는 이죽였다.

“이 대마법사님께 그럴 상대가 존재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최근 소기의 성과가 있었던 사매는 그 이후로 매번 이 상태였다.

물론 사매가 좋다면 나도 좋았다. 한동안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 아직도 남아있습니까?”

“……응? 무슨 개소리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사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입가에 또 다시 쓴웃음이 떠올랐다.

“이제 경지도 올랐고, 배울 것도 배웠겠다… 사실 그만둬도 상관없잖아요? 매일 스승님 욕이나 하면서.”

사실은 조금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사매마저 떠나버린다면,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매는 잠시 침묵 속에서 군불만을 때울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지키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있었거든.”

소녀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슴 속 깊숙한 곳에 파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못 지켰어, 남동생이었는데… 예전에 귀향제 기억하지? 그때 죽었어.”

귀향제.

황녀의 두 눈이 뽑히고, 수많은 학생들이 죽고 다쳤던 암흑교단의 습격 사건.

그때 목숨을 잃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대륙의 미래를 견인할 인재들이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라졌다. 그중에는 사매의 남동생 또한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매는 애써 강한 척을 했다.

“몇 년을 방황하고 나서야, 그제야 결심이 섰어. 내 사람을 지킬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젠 지킬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야, 얼마 전에 하나 생겼거든. 나한테 소중한 사람.”

그러면서 사매의 푸른 눈이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누구 같아?”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잠시 숨이 멎었다가.

“누굽니까?”

“……몰라도 돼, 이 아다 새끼야!”

깔깔거리며 내 등을 팍팍 두드리는 사매를 보고 생각했다.

나도 이 사람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아직 세상에 색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

헐떡이면서 눈을 뜬 내 손에, 어느새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이 쏟아져 내린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수통을 찾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손아귀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까닭 모를 불안감에 숨이 막혔다. 몇 차례나 심호흡을 하고 난 뒤에야,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문득 내 눈에 편지지가 들어왔다.

네 번째로 받은,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그곳의 뒷면에는 또 다른 글귀가 휘갈겨져 있었다.

‘빈민가의 사기꾼’

마침 원하고 있던 정보였다.

날짜는 그대로였고, 나는 점차 가설이 맞아들어 가는 느낌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검을 세로로 치켜들자 날붙이의 서늘한 예기가 느껴졌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오늘은 페르쿠스가의 도련님이 빈민가를 방문할 차례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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