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35화 (235/649)

〈 235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28)

* * *

나는 홀로 빈민가로 향하기로 했다.

우선 지난밤 연회의 여파로 일행들이 늘어져 있던 탓이 컸다. 특히 성녀는 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재빨리 시선을 피하곤 했다.

혹여나 어젯밤의 이야기를 꺼내려 들기라도 하면,

“후후, 혹시 달콤한 꿈이라도 꾸셨나요? 때때로 강한 소망은 꿈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군요. 이안 형제님께서 그러한 꿈을 꾸셨다니, 이 또한 천신의 은혜입니다. 임마누엘.”

처럼 되도 않는 소리를 할 뿐이었다.

너무 수치스러운 탓에 기억을 조작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성녀의 뜻이라면 존중해 주어야 했다.

그 외에 특이사항이 있다면 엘시 선배 정도였다.

그날따라 종종거리며 내 뒤를 따라오던 엘시 선배는, 이따금씩 슬픈 눈빛으로 제 가슴어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레 물어왔다.

“주, 주인님… 주인님은 그깟 살덩어리에 홀리지 않죠?!”

“아니요, 홀리는데요.”

남자니까 당연했다.

엘시 선배는 곧장 풀이 죽어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내게 매달리지 않고 얌전히 돌아간 것은 최근 들어 드문 일이었다. 그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였으나, 이내 신경을 끄고 말았다.

내 죄라고는 진실을 말한 죄밖에 없지 않은가.

의외의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여동생, 리아 페르쿠스였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소녀가 내 앞을 막아섰다. 손에는 삽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팍, 하고 삽날이 지면을 파고드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어딜 가시려고, 오라버니?”

“우선 삽부터 내려놓고 이야기하자, 리아…….”

내 입에서 한숨 섞인 말이 흘러나왔으나, 이를 곧이곧대로 들을 리아가 아니었다.

도리어 리아는 삽날을 다시 한 번 지면에 처박으며 위협적인 소리를 흘렸다.

화가 났으니 풀어달라는, 나름대로 귀염성 있는 표현이었다.

물론 갈 길이 바쁜 나로서는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리아의 화를 풀어주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그녀와 함께 있어줘야 할 테니까.

남매지간인 만큼 리아도 내 속내를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곤혹스러워 하는 나를 보며, 리아는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흥, 어제는 다른 여자들이랑 팽팽 놀았으면서.”

“내가 모시고 온 손님들이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침실까지 모셨고?”

“야, 그건…….”

나는 훅, 치고 들어오는 리아의 비꼬기에 할 말이 궁해졌다.

지난밤의 소란은 솔직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유야무야되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넘어가 준 쪽에 가까웠다. 진정으로 의혹들이 해소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질투심 많은 리아가 이를 얌전히 넘길 리가 없었다.

리아는 계속해서 툴툴거리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좋겠네, 좋겠어… 여동생은 오빠만 오매불망 기다리느라 독수공방 신세인데, 누구는 여자를 둘이나 들이고 말이야?”

“오해 살 말 하지 마. 두 사람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

“그런 것치곤 성녀님을 볼 때마다 특정 부위로 눈이 가던데?”

크흠, 하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리아의 시선을 피했다.

시인이나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내 솔직한 반응에 리아는 더욱 심통이 나고 말았다.

“흥, 아주 욕망에 솔직하셔? 이제 좀 있으면 여동생도 덮치려 들겠는데?”

그러면서 리아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바라는 대답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담백한 진심을 전해 주었다.

“아니, 미쳤냐? 내가 왜 널 덮쳐.”

“……무, 무, 뭐라고?!”

안타깝게도 내가 고른 선택지는 오답이었던 듯했다.

리아는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르더니,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왜, 왜, 왜 나는 안 되는데?! 이세상에 날 노리는 남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아니, 일단 여동생이고…….”

나는 무척 당연한 사실을 굳이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내 눈이 슬쩍 리아의 몸을 훑어 내렸다.

어느덧 적령기의 여인이 된 리아의 몸은 많이 성장해 있었다.

그 여성적인 굴곡이 매력적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동생에게 욕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애써 핑계거리를 찾아내기로 했다.

“……성녀님에 비하면, 너는 그닥.”

“아아악, 진짜!”

리아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짜증을 부렸다.

하기야 성녀와의 비교는 너무하긴 했다. 그 독실하다는 신학부 학생들조차 성녀의 입학 이후 고해성사가 늘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애초에 남과 비교당하는 경험 자체가 딱히 유쾌하지 않기도 했다.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리아는 납득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오늘의 리아는 내 생각보다도 더욱 고집스러웠다.

리아의 손이 툭, 하고 삽자루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어지간히 화가 나서는 하지 않는 짓이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리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뒤돌아선 채 슬쩍 엉덩이를 내밀었다. 둔부가 강조될 수 있도록.

그리고 치맛단을 앞으로 쭉 잡아당겼다. 리아의 숨겨져 있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리아의 얼굴은 이미 터질 듯이 붉어진 뒤였다.

그녀가 씩씩대며 외쳤다.

“자, 봐! 상체는 성녀님에 비해 조금 모자랄지 몰라도, 하체는 제대로 다 컸다고!”

“아니, 넌 무슨 다 큰 처녀가……!”

나는 그 남사스러운 광경에 곧장 눈을 가리고 말았다.

그동안 넉넉한 치마폭에 가려져 있던 둔부 굴곡이 드러나니 배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찌나 치맛단을 꼭 잡아당겼는지, 엉덩이 골마저 얼핏 비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한창 때의 처녀가 그러한 자세를 취하면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리아는 내가 눈을 돌리자 도리어 더욱 우쭐해지고 말았다.

“……오호, 왜 그러셔? 여동생한테는 욕정 안한다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요염한 미소를 짓는 리아의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섣불리 정면을 바라보지 못하는 나를 보며, 여동생은 더욱 신이 났는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한 술 더 떠 그녀는 이제 장난스레 엉덩이를 살랑이고 있었다.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큰일이다, 큰일이야… 이대로면 여동생한테 욕정하는 변태 오빠한테 덮쳐질지도 모르겠네? 아아, 덮쳐지면 어떡하지~ 평생 책임져 달라고나 할까~”

결국 나는 이어지는 리아의 도발을 참아내지 못했다.

내 손바닥이 곧장 리아의 탐스러운 엉덩이를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리아의 몸이 감전이라도 당한 듯 펄쩍 뛰어 올랐다.

“꺄악!”

짤막한 비명과 함께 리아는 제 두 손으로 엉덩이를 가린 채 잰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곧 나를 흘겨보며 소리를 높였다.

“……무, 무슨 짓이야! 다 큰 여동생의 엉덩이나 때리고!”

“그러게 누가 먼저 도발하래?”

델핀 선배에게 단련된 내 목소리에는 마땅한 동요가 없었다.

감촉이 좋긴 했지만, 여동생의 몸이니까.

당연히 잊어줘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어냈다. 결국 내게 일격을 허용한 리아는 낯빛을 새빨갛게 붉힌 채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채, 책임지게 만들 줄 알아! 누가 손을 댄 건 처음이었단 말이야!”

“언제는 안 그랬고?”

내 심드렁한 반응에 리아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옅은 웃음을 터트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리아.”

“……흥, 왜. 변태 오라버니.”

그래도 ‘오라버니’라니 오빠보다는 한 단계 높은 호칭이었다. 주로 리아가 삐졌을 때 거리감을 두기 위해 사용하는 호칭이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리아는 착한 여동생이라 내 질문에 대충 답할 리는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신뢰를 담아, 나는 리아에게 재차 물었다.

“빈민가의 ‘사기꾼’이라고 들어봤어?”

“……‘사기꾼’?”

입술을 삐쭉 내민 채 툴툴거리던 리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인간들은 왜?”

“아니, 뭐… 잠깐 볼일이 있어서 말이지.”

내 뻔한 변명에도 의혹의 눈초리는 풀리지 않았다.

리아는 페르쿠스 저택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을뿐더러, 상단을 운영했던 만큼 영지 내의 사정에 대해 빠삭했다. 어쩌면 아버지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던진 질문이었는데, 리아의 반응을 보니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리아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지?”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나, 이안 페르쿠스야. 폭력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라고.”

리아는 흐응, 하고 한참 동안이나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내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정보를 건네주었다.

“진짜지? 진짜 진짜 믿는다…오빠? 괜히 마찰 빚지 마. 그 녀석들, 생각보다 위험하거든.”

나는 걱정말라는 듯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나 알잖아, 페르쿠스 가문의 순한 양."

그리고 몇 시간 후.

팍, 하고 빛살이 허공을 가르며 내리찍혔다. 핏물이 터져 나오고 손가락이 하늘을 날았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 앞에서 사기를 치려 들어?"

비명과 함께 사내가 나동그라진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을 견디지 못한 사내는, 땅바닥을 구르면서도 핏대를 올렸다.

"이, 이 새끼 조져! 귀족이니까 너무 다치게 하지는 말고!"

"그걸 왜 저 사람들한테 말하고 그래……."

쏜살같이 틀어박힌 발길질이, 목재로 된 책상을 으스러트리며 목재 파편을 비산시켰다.

내게 달려들려던 몇 명의 덩치들이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콰직, 하고 손도끼 하나가 사내 하나의 어깨를 으스러트렸다. 덜렁거리며 통제권을 잃은 팔을,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흐, 하고 되다 만 웃음을 흘렸다.

"……나한테 부탁해야지."

페르쿠스 영지의 뒷골목에 평화주의자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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