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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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물이 흥건한 현장은 그야말로 ‘참상’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성녀는 바삐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확인했다. 기본적으로 팔다리가 날아가 있거나 연골이 박살나 있거나, 과다출혈로 죽기 직전이었지만 죽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응접실에서 머리가 폭발한 이들을 제외하면.
그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도 살리고는 싶었지만, 암흑교단의 계약마법은 상상 이상으로 효과가 좋은 듯했다.
만약 길포드 고아원에서 그 계약을 맺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끔찍했다.
엘시 선배는 울상을 지으며 젖은 수건으로 내 얼굴과 몸을 닦아냈다.
내 몸은 남이 흘린 피로 흥건했다.
“주인님, 괜히 고생하시고… 저, 저를 불러 주셨다면 이까짓 쓰레기들은 전기로 확!”
그러면서 엘시 선배는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그 푸른 눈동자가 증오와 원독을 담아 피를 흘리며 널브러진 부상자들을 흘겼다.
나는 부상조차 없는데, 단지 내 몸에 피를 묻혔다는 사실만으로도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웅얼거리며 몰래 영창을 외고 있는 엘시 선배를 말리는 역할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그만하세요, 엘시 선배… 다 죽어가는 녀석들 감전시켜 봐야 뭐합니까.”
“그, 그래도!”
본래 포악한 맹수인 엘시 선배는 무언가 불만이 있는지,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을 튀기며 내게 반항을 시도했다.
이 흉폭한 짐승을 길들이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 손이 곧바로 엘시 선배의 머리 위로 툭 얹어졌다. 고깔모자 너머로 엘시 선배의 푹신한 머리카락 감촉이 전해졌다.
그대로 나는 엘시 선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도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엘시 선배.”
“에헤헤, 흐헷… 주, 주인님…….”
엘시 선배는 곧장 흐물흐물 녹아내리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내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얼굴을 부비적거리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익숙한 감촉이라 나는 얌전히 두기로 했다.
사랑스러운 소녀가 품에 얼굴을 파묻는 감촉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기분이 나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다친 사람들을 쭉 훑어보다 돌아온 성녀는,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예의 그 성깔 있는 표정을 지으며 제 옆머리를 검지로 배배 꼬았다.
“하, 누구는 일하고 누구는 애완견 노릇이나 하고…….”
물론 그 도발을 얌전히 듣고 넘길 엘시 선배가 아니었다.
그녀는 곧장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슬그머니 내 품에서 벗어나 성녀를 노려보았다.
“……지금 뭐라 그랬냐, 썅년아?”
하지만 성녀는 엘시 선배보다 한 수 위였다.
그녀는 싱긋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더니,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엘시 자매님? 혹여 오해를 살 만한 일이 있었다면 송구합니다…다만 청각에 이상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상담하러 오시기를. 임마누엘.”
일행의 시선이 또 시작이라는 듯 엘시 선배를 향했다.
도발을 한 쪽은 성녀였지만, 찰나에 흘린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를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나와 엘시 선배 정도뿐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성깔 더럽기로 유명한 엘시 선배에게 책망의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엘시 선배가 그러한 시선을 신경이나 쓸 턱이 없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푸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특유의 걸걸한 입담을 과시하기까지 했다.
“아니, 젖탱이 젖탱이 하니까 이젠 싸가지까지 젖탱이에 몰아주셨나…….”
“……그러는 엘시 자매님은 몰아줄 싸가지도 없는 모양이네요?”
“뭐, 애미애비가 없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성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고, 엘시 선배도 싸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욕설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리 엘시 선배라도 성녀에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욕설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성녀도 지금껏 쌓아온 사회적 인식이 있으니 차마 대놓고는 투닥거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처럼 사이좋게 속닥이며 날선 공방을 벌이는 웃긴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나는 간만에 본래의 인성을 드러내는 엘시 선배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 아얏! 주, 주인님!”
“아무리 그래도 남의 가정사는 건드리지 맙시다.”
“하, 하지만……!”
엘시 선배는 무척 억울해 보였다.
그녀에게 가슴 이야기는 가정사 이상으로 민감한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공방이었다.
성녀가 비정상일 뿐이지, 엘시 선배의 가슴도 보기 좋을 만큼 컸다. 굳이 열등감을 가질 것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시간이 없었으므로, 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재론의 여지조차도 없다는 뜻이었다.
엘시 선배는 곧장 풀이 죽고 말았다.
반면 성녀는 승자의 미소를 머금었다.
기분이 좋아진 성녀는, 가로채듯 엘시 선배의 손에 들려있던 젖은 수건을 빼앗았다. 그리고 살갑게 내 얼굴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이안 형제님… 어느 누구와는 달리 마음씨가 고와서, 목숨까지는 끊지 않으셨네요.”
“……죽일 필요까지는 없으니까요.”
내가 한숨과 함께 그렇게 한 마디를 내뱉자, 성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 슬쩍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금 전과는 달리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우리 둘의 모습에 엘시 선배는 다시 한 번 울컥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제 엘시 선배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엘시!”
그 서늘한 호명에, 엘시 선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엘시 선배의 눈동자가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막 응접실에서 레토와 함께 걸어나오는 레이놀드 씨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네가 남들 앞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냐? 그리고 아직 이안 공자를 네 짝으로 인정한 적은 없을 텐데.”
“사, 삼촌…….”
엘시 선배는 놀랍게도 대번에 기가 죽어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엘시 선배는 난생 처음이라, 나도 성녀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엘시 선배를 바라보아야 했다.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놀드 씨는 엄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럴 시간에 너도 현장에 와서 감식안을 길러야 할 것이 아니냐. 대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지식을 익혀야 한다고…….”
“아, 알아서 한다고요……!”
엘시 선배의 소심한 반항에 레이놀드 씨의 눈빛이 우묵해졌다.
여전히 무표정한 사내라 그 속내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내 됐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멋대로 하거라. 어차피 대마법사가 되지 않는 이상, 네가 가문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엘시 선배는 그 말에 전에 없이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소녀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해서 달래주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무심코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레이놀드 씨가 내게 다가오는 쪽이 더 빨랐다.
그는 내가 만든 핏빛 풍경을 잠시 훑어보더니, 조사 결과를 알려왔다.
“자네 말대로야. 기존의 마법 체계에 속하지 않은 마도의 흔적이 발견되었네.”
“……암흑교단과의 연관성은요?”
“아직 구체적인 물증까지는 아닐세.”
어느덧 레이놀드 씨는 내게 ‘공자’라는 호칭과 함께, 다소 예의를 차린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하대는 하대였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평가가 올랐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이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또 한편으로는 고심에 빠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암흑교단과의 연관성을 증명할 증거까지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이로써 조사 범위가 많이 좁혀졌으니… 결국 이 행방불명 된 이들의 행적만 쫓으면 되지 않겠나.”
그러면서 레이놀드 씨는 내게 서류 뭉치를 하나 내밀었다.
탁자 위에 있던 행방불명된 채무자들의 신상명세가 적힌 서류들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를 받아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놀드 가문의 마도병단에, 제국의 행정관까지 와 있으니 앞으로 조사에는 더욱 속력이 붙을 터였다. 심지어 네리스 선배까지 도착한다면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던 차에, 찬물을 끼얹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여동생 리아였다.
그녀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덜덜 떨면서 내가 만든 참상을 둘러보던 차였다. 그러더니이내 목청을 높였다.
“미, 미, 미쳤어… 오빠?!”
일행의 의문을 담은 시선이 일제히 리아를 향했다.
그러나 리아는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제 손으로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가리켰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리아는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위, 위, 위험하잖아… 이 녀석들이 얼마나 인근에 악명이 높았는지 알아?! 지금도 봐! 수, 수십 명이라고… 수십 명! 그것도 무장한 병력이!”
나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 또한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비단 성녀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하던 일행은 전원이 그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리아의 황금빛 동공이 불신을 담아 세차게 떨렸다.
리아는 레이놀드 씨에게 애원했다.
평소의 기품 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레, 레이놀드 님… 오라버니한테 한 마디 해주세요! 이렇게 위험하게 혼자 맞서 싸우면…….”
“라이넬라 가문의 데릴사위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여전히 무감정한 음성이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흡족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아는 더더욱 절망해서 성녀에게로 말을 돌려야 했다.
“서, 성녀님… 이, 이렇게 막 몸을 굴려도 괜찮을까요? 위험하잖아요?!이러다 우리 오빠 죽으면 어떡해요… 나, 난 우리 오빠 없이 못 사는데…….”
“……이안은 다치지 않았잖아요?”
물론 성녀라고 해서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되묻는 성녀를 보고, 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리아는 이제 울먹이며 셀린에게 매달렸다.
어린 시절부터 리아는 유독 셀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믿을 사람은 셀린뿐인 모양이었다.
“세, 셀린 언니… 언니가 뭐라고 해봐. 이 사람들 이상해! 어떻게 혼자 수십 명의 무장 병력이랑 싸우는데 위험하지 않을 수 있냐고!”
“아하하…….”
셀린은 난감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레이놀드 씨 옆에 선 레토와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아.”
셀린은 제게 매달리는 리아의 어깨 위에 손을 턱 얹더니,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 걱정이 너무 과하다… 이안 오빠가 고작 이 정도로 다칠 리가 없잖아.”
“……고작이라니?”
리아는 그렇게 반문하며, 레토와 세리아에게도 의견을 구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수,수십 명인데? 그것도 전원 무장한 전직 용병 출신?”
하지만 두 사람에게 돌아오는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토와 세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결국 리아는 울상을 지으며 그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고 말았다.
핏물이 꽃처럼 피어오른 곳에 앉은 흑발의 미소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절경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리아는 음울한 읊조림을 반복할 뿐이었지만.
“이, 이상하다? 우리 오빠가 이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 나랑 단 둘이 오순도순 살기로 약속했는데…….”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담.
벌써 몇 년은 더 된 약속이었다.
나는 걸음을 옮겨, 리아의 어깨를 위로하듯 몇 차례 두드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본격적으로 암흑교단을 쫓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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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 밤.
“……이안 님, 보고 드려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림자가 내려앉으며,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네리스 선배의 도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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