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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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달빛이 흔들리는 커튼의 틈새로 쏟아져 내린다.
어느덧 침실의 창문은 열려 있었다. 기척조차 없이 찾아온 여인이 지나온 흔적일 터다.
실력 면에서 또 한 번의 발돋움을 한 나조차도 그 낌새를 눈치 채기가 어려웠다. 그림자가 내 앞에 내려앉을 무렵에야 그 존재를 눈치 챘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상대는 평생토록 그러한 기술만을 연마한 전문가였으니까.
목을 덮을 만큼 기른 갈색 머리카락에 진녹색 눈동자, 그리고 앞머리의 머리핀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내 앞에 설 때마다 여인은 유독 파리한 안색을 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네리스 선배’, 내가 그렇게 부르는 제국 첩보부의 공작원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선 도착이 지연되어 사죄드립니다. 미리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확인해야 할 내용이 있어…….”
“부상은 마저 돌보셨습니까?”
느닷없는 안부 인사에 네리스 선배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얼떨떨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마침 탁자에 앉아 실종자의 신상명세를 담은 서류를 보고 있던 차였다.
알고 지내던 이름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 피곤하고 괴로웠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애써 피로를 가라앉혔다.
“상처 말입니다. 전부 나으셨냐고요.”
“아, 그, 그게…….”
네리스 선배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뻣뻣이 굳은 몸에서 그녀의 긴장과 공포가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이 모든 것이 미래에서 온 ‘나’의 안배라고 생각하면 절로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죄 없는 여인을 괴롭혔단 말인가?
사실 죄가 없지는 않았다.
네리스 선배는 일전에 내 소중한 사람들을 괴롭힌 전적이 있었다. 다만 그 대가를 조금 과하게 치렀을 뿐.
그 탓에 네리스 선배는 나를 볼 때마다 온갖 부정적인 상상을 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 불길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하고 말았다.
“죄, 죄송합니다! 결코 몸을 돌보느라 늦은 것이 아니라… 지, 진짜로 정보를 수집하느라……!”
“탓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네리스 선배를 제지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네리스 선배는 재차 머리를 땅에 찧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미 한 번 찧긴 했다.
말릴 새도 없이 쿵, 하는 소리가 울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혹시 누군가 이 소리를 듣고 침실에 찾아올까 봐.
남몰래 미모의 여인과 단 둘이 심야를 보내는 광경이 좋게 보일 턱이 없었다.
지난 침실에서의 사건 이후 세리아의 심기가 특히 불편해 보이던 차였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유려한 말솜씨의 성녀나 걸걸한 입담의 엘시 선배였다. 이에 부담을 느낀 세리아가 애써 자제하지 않았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세리아는 기본적으로 소심하고 사회성이 부족했으니까.
그래도 세리아가 자제는 할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이 또한 사회성이 길러졌다는 방증이리라.
아직도 시한폭탄에 가까운 존재임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내심 세리아의 성장을 대견스럽게 여기면서도, 나는 말을 이어갔다.
“말 그대로, 이제 괜찮아지셨냐고 묻는 말이었어요. 네리스 선배가 아프면 곤란하잖습니까.”
네리스 선배는 내 말을 듣자마자 강한 의문을 품은 시선을 돌려주었다.
순 또라이를 보는 눈빛이었다.
하기야 네리스 선배는 나와 미래의 ‘나’를 구분할 만큼 나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일전에 네리스 선배의 손가락을 날린 범인과, 지금 그녀를 걱정하는 내가 동일인물처럼 보일 테지.
그녀가 볼 때 이중인격자처럼 보이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네리스 선배를 납득시키는 데 실패한 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됐습니다.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네요. 그보다, 보고해야 할 사항이란 건?”
“앗, 네… 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네리스 선배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폈다.
혹여 또 다시 책을 잡힐까 두려운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게서 책망의 기색이 보이지 않자, 약간의 용기를 얻은 네리스 선배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시, 실은 이 근방에서 기묘한 소문이 떠돌았다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소문인데, 우연인지 최근에 다시 비슷한 소문이 돌고 있다더군요.”
10년도 더 넘은 시차를 타고 다시금 돌기 시작한 소문이라.
최근에 페르쿠스 영지에 다발하는 실종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제국의 행정관 아서와 상담해 봐야 할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내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오자, 네리스 선배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내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부였다.
“예전과 소문이 퍼지는 양상도 비슷합니다. 우선 실종 사건이 발생하고,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사람이 있다든가, 숲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다든가…….”
“……혹시 도플갱어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희박합니다. 도플갱어쯤 되는 마물은 함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 일대에서 월식이 관측된 적은 근래에 없습니다.”
‘도플갱어’, 타인의 모습과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마물이었다.
마물이란 마수와는 달리 태생부터가 괴물인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악신 오메로스가 다스리는 마계에서 살아가는데, 월식이 일어날 때 마계의 존재들이 현세로 넘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물론 마물이 그렇게 우연히 현세로 넘어오는 일은 무척이나 드물었다.
차라리 인위적으로 불러냈다는 가설이 더 신빙성 있을 터였다.
그러나 현세와 마계의 경계가 무너진 적은 신마대전 이후로 전무했다. 신마대전 당시에도 델피렘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만약 의도적으로 마계의 존재를 불러냈다면, 그 전조가 있었어야 했다.
세계와 세계의 충돌은 그 정도의 대사건이었으니까.
네리스 선배의 말처럼 도플갱어의 소행일 가능성은 배제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조사해 보는 편이 좋겠군요.”
“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소문의 진원지를 몇 가지 추려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네리스 선배는 몇 장의 서류를 건넸다.
소문의 내용과 관련된 증언이 수집된 장소를 표시해둔 서류였다. 나름 세심한 조사를 거쳤는지 특정된 구역은 넓지 않았다.
한동안 서류를 살피고 있던 내 시선이 잠시 멈칫했다.
조금 특이한 곳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페르쿠스 영지가 아닌데요.”
“네, 네… 하, 하지만 그 장소까지 포함해서 확인해 보는 편이 좋을 듯해서…….”
그러면서 네리스 선배는 불안한 듯 흘깃흘깃 내 눈치를 살폈다.
그 어깨에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혹여 실수를 했나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는 딱히 네리스 선배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매사에 철저하다는 것은 좋은 자세였으니까.
굳이 내가 특정 장소를 콕 집어 물어본 까닭은 따로 있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주둔지라…….”
마침 내일 세리아가 주둔지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났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세리아의 협조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무래도 외부인보다는 내부인이 나섰을 때 더 질 좋은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리아와의 동행은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네리스 선배는 그새 더욱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 혀로 입술을 몇 번이나 축이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나는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러한 네리스 선배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네리스 선배로서는 아무런 말도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끼를 휘두르는 인간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다급히 헛기침을 하며 네리스 선배의 주의를 끌었다.
내 입에서 의례적인 치하의 말이 흘러나왔다.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네리스 선배에게는 그러한 흔해빠진 칭찬조차 의외였던 듯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잘하셨다고요. 조금 늦더라도 관련된 정보를 꼼꼼히 수집해 오신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본래 칭찬이란 구체적으로 좋았던 부분을 언급해야 진정성이 느껴지는 법이었다.
한동안 뻐끔거리며 입술을 뗐다 붙이기를 반복하던 네리스 선배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옅은 감정의 파문이 느껴졌다.
고작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이토록 격한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의문이 일순 뇌리를 스쳤으나, 네리스 선배가 좋다면 굳이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먹먹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도 못했다.
네리스 선배의 낯빛이 갑작스레 창백히 질렸던 탓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네리스 선배는 벌벌 떨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절대 의문을 품고 반문한 것은 아닙니다… 절대! 겨, 결단코 의문을 품은 것이 아니라…흑, 흐으윽. 요, 용서를…….”
“……됐으니까 그만두세요.”
결국 내 입에서 한숨이 끊이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네리스 선배와의 관계를 수복하기 위해선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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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의 페르쿠스 저택은 고요했다.
아침을 준비하는 사용인 몇 명만이 분주히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차디찬 새벽녘의 공기와 어스름을 감상했다. 소수의 부지런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오늘은 세리아와 함께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물론 전날 밤에 급히 결정한 일정이라 세리아와 상의할 필요는 있었다.
내가 이른 아침부터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유였다.
어차피 세리아라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을 터였다. 만일 마주친다면 오랜만에 함께 수련을 해도 좋겠지, 나는 그토록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걷고 있었다.
도중에 누군가를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아, 진짜 알겠다고!”
“엘시!”
고성이 들리나 싶더니,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소녀 하나가 내 앞을 지나쳤다. 그 뒤를 쫓아 나온 중년의 사내까지도 내게는 익숙한 인물들이었다.
엘시 선배와 레이놀드 씨였다.
레이놀드 씨는 허망하게 손을 내뻗었다가, 이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제 낯가죽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람.
물론 내가 위로해 줘야 할 사람은 명확했다.
나는 슬그머니 엘시 선배가 뛰쳐나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중년의 남성을 위로하는 취미 따위는 내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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