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4)
* * *
엘시 선배를 찾아낼 때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뒤뜰에서 난데없이 뇌성벽력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쾅, 쾅, 쾅!
연달아 내리꽂히는 벼락에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 창문 밖을 기웃거렸을 지경이었다. 화가 난 엘시 선배는 주위를 살피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뜰로 향하니 벌써 나무 몇 그루가 탄내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어차피 뒤뜰은 관리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자그마한 수풀이 되어 있는 마당이었다.
엘시 선배도 이를 알고 나무를 쓰러트린 것이겠지만, 새벽녘부터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았다.
그나마 엘시 선배가 자제한 덕에 소음을 눈치 챈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창문 밖을 기웃거리는 사용인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댔다.
혹여 깨어난 사람이 있더라도 적당히 진정시켜 달라는 의미였다.
오랜 시간 페르쿠스 저택에서 근무한 사용인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고, 또 나와의 소통에도 막힘이 없었다.
금세 내 뜻을 눈치 챈 사용인들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사용인들이 어련히 알아서 해줄 테니까.
내 걱정거리는 오직 하나, 엘시 선배뿐이었다.
엘시 선배는 스스로 만든 참상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파지직, 거리는 전하가 아직도 지반을 타고 흘러내렸다. 쓰러진 나무들과 탄내를 풍기는 잡초들이 잿빛으로 물든 채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후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심지어 벼락이 내리꽂히기까지 했으니, 그 사이에 있던 엘시 선배는 귀가 먹먹해졌을 터였다.
그럼에도 엘시 선배는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내 소녀가 고개를 치켜들며 노성을 터트렸다.
“아아아악! 그놈의 약혼, 약혼, 약혼! 씹새끼들이, 언젠 좆밥 취급하더니 이젠 날 팔아치우지 못해 안달이 나? 두고 봐, 늙다리 새끼들 나중에 내가 지게 태우고 말 테니까…….”
아직 레이놀드 씨는 한창 때로 보였는데, ‘늙다리’라니.
엘시 선배의 입이 험하기는 험했다.
내 앞에서만 그러지 않을 뿐이지, 엘시 선배의 태도는 늘 일관적이었다.
시건방지고, 말도 험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부족하며 여전히 흉포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제야 보이는 면모도 존재했다.
엘시 선배는 사실 정이 많았다.
욕을 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경우는 얼마 없었다.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레이놀드 씨를 욕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엘시 선배의 본심만은 아닐 터였다.
다만 레이놀드 씨를 비롯한 ‘늙다리’들이 엘시 선배를 화나게 만든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조심스레 엘시 선배를 불렀다.
“……엘시 선배?”
엘시 선배는 단박에 내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귀도 먹먹하고 매캐한 연기가 눈과 코를 찌르는 상황이었다. 일부러 집중하지 않는 이상 주위를 명확히 파악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엘시 선배는 제 성질대로 곧장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앙? 기분도 꿀꿀해 죽겠는데 어떤 새끼가…….”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던 엘시 선배는, 나와 눈을 마주친 직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엘시 선배는 그 이후로 몇 단계의 변화를 거쳤다.
우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이내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내게 달려들었다.
마치 이전의 모습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했다. 엘시 선배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내 품에 폭 안겨 버렸다.
“……주인님!”
나는 그 극적인 변화에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방금 전에는 분명 ‘어떤 새끼’라고…….”
“그, 그, 그럴 리가요!”
엘시 선배는 허둥지둥 내 말을 부인했다.
그녀는 무척 다급했는지 세차게 고개를 내저으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치켜든 주먹이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응징하겠다는 듯 부르르 떨렸다.
“감히 어떤 시건방진 새끼가 주인님을… 마, 만일 그런 놈이 있으면 제가 처리할 테니 안심하세요! 에헤헤…….”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엘시 선배는 흘끔흘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면피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더는 엘시 선배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엘시 선배는 곧장 순한 양이 되었다.
몽롱한 표정에서는 전에 없던 흡족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엘시 선배가 이토록 헤실거리는 것은 오직 내게서 쓰다듬을 받을 때뿐이었다.
“흐헤, 에헤헤… 주, 주인니임…….”
만일 엘시 선배가 강아지였다면 벌써 귀를 눕힌 채 끙끙거리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시 선배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그, 그거어언…….”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와중임에도 엘시 선배에게서는 옅은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기를 꺼려하는 기색이었다.
본래라면 나는 엘시 선배의 의사를 존중해 주었을 것이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은 한둘쯤 있는 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나와 엘시 선배는 운명공동체가 아닌가.
엘시 선배는 몽롱한 표정을 짓던 와중에도 으으, 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곧 새로운 수단을 동원해 보기로 했다.
“……앗.”
슬그머니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떼자, 엘시 선배의 표정이 대번에 안타까워졌다.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게 엘시 선배가 풀이 죽기 직전, 나는 이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새로운 ‘포상’을 시도해 보았다.
내 손가락이 엘시 선배의 턱 밑을 살갑게 쓸었다.
엘시 선배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는지, 숨을 들이키며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반응만으로는 아직 내 새로운 시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엘시 선배의 보드라운 살결을 긁듯이 쓰다듬었다.
턱밑에서부터 목, 그리고 쇄골 어림까지 손으로 쓸어내자, 비로소 엘시 선배에게서 유의미한 반응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흐으, 응?! 하아, 흐으, 흐으응…….”
묘한 소리와 함께 엘시 선배의 숨결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엘시 선배의 눈빛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엘시 선배의 감촉을 만끽하고 있던 차였다.
“으응, 주, 주인니이이임… 흐읏!”
처음에는 당황했던 엘시 선배였지만, 이내 적응을 끝마쳤는지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달콤하기만 했다.
도리어 엘시 선배는 그만두지 말라는 듯 내 팔을 두 손으로 꼭 쥐었을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내뺀 자세를 취한 엘시 선배는, 이내 고개를 떨군 채 헐떡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심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시도라서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엘시 선배의 마음에도 든 모양이었다.
내 손길이 멎은 것은 그때였다.
내 팔을 붙잡은 채 달뜬 숨을 내쉬고 있던 엘시 선배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푸른 눈동자에는 어떠한 욕망마저 일렁이고 있을 정도였다.
그제야 나는 준비하고 있던 대사를 꺼냈다.
“엘시 선배, 레이놀드 씨랑 왜 다툰 거예요?”
“그, 그거언…….”
엘시 선배는 마지막까지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숨기고 싶은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물론, 내친김이었으므로 내가 엘시 선배의 사정을 봐줄 리는 없었다.
나는 엘시 선배의 턱 밑을 아주 살짝 쓸었다. 이전의 감촉이 다시 떠오를 만큼만.
그러자 엘시 선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숨소리가 다시 한 번 달아올랐다.
내 팔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엘시 선배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말하지 않으면, 더 안 해줄 텐데.”
“그, 그런…….”
엘시 선배는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으나 내 결심은 확고했다.
짐직 시치미를 떼며 내가 손을 빼려고 들자, 엘시 선배는 더욱 조급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빼다 만 내 입에서 마지막 제안이 던져졌다.
“……어떻게 할래요?”
엘시 선배의 동공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우측으로, 그리고 좌측으로.
한동안 입을 열지 않던 엘시 선배의 고뇌는 그러한 시선의 이동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엘시 선배가 내뱉을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엘시 선배는 달큰한 숨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마, 말씀드릴게요! 뭐든 말할 테니까… 부, 부디 계속… 흐으응?!”
나는 엘시 선배의 요망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엘시 선배는 한참 동안이나 내 손길에 헐떡여야 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부르르 몸을 떨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을 정도였다.
눈동자에 초점이 풀린 엘시 선배에게, 나는 혹시나 싶어 질문을 던졌다.
“……좋았어요?”
“네, 네헤… 쥬, 쥬아여… 평생 받고 시퍼여, 쓰담쓰담…….”
아무래도 혀까지 풀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시 선배가 좋다니 나도 좋았다.
이제 엘시 선배가 꽁꽁 숨겨두었던 비밀을 들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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