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42화 (242/649)

〈 242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5)

* * *

엘시 선배와의 대화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에야 성사되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포상’은 엘시 선배에게 너무 자극이 강한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도 엘시 선배는 주저앉은 채 한참이나 숨을 헐떡여야 했다.

그 잔향인지 엘시 선배의 볼에는 아직도 홍조가 남아있었다.

혹은 방금 전까지 보여주었던 극적인 반응이 부끄럽게 느껴졌거나.

어느 쪽이든 고깔모자의 챙을 꼭 쥔 엘시 선배는 귀여웠다. 얼굴을 숨기려는 듯 모자를 꾹꾹 눌러쓰는 시도까지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엘시 선배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엘시 선배는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할 듯해서, 나는 그 욕망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단지 아무런 말도 없이 엘시 선배의 옆자리를 지켜 주었을 뿐이었다.

어느덧 하늘에서는 아침 햇살이 나고 있었다.

계절이 여름이라 이제 막 드러난 햇빛조차도 뜨거웠다. 그나마 나와 엘시 선배가 앉은 자리가 그늘이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나갔다.

엘시 선배가 비로소 운을 뗀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쪼그려 앉은 채, 무릎을 안고 말했다.

“……어린 시절에,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어요. 가족들한테.”

낯선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전에 루핀과 대작을 하며 들은 적이 있었다. 엘시 선배와 루핀의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해서.

그럼에도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침묵하기로 했다.이러는 편이 엘시 선배가 속내를 털어놓기 편하기를 바랐다.

다행스럽게도 엘시 선배의 숨결은 어느덧 정돈되어 있었다. 그것이 내 배려 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눅눅하지만 꿋꿋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는 마력도 없고, 마법도 없고 뭣도 없었으니까. 유독 몸집이 작은 저와 남동생을 괴롭히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가문의 어른들은 멀거니 쳐다만 보고 있었고.”

“……그래서 지게를 태우겠다고?”

“정말 멋진 전통… 이 아니라, 노, 농담이었어요! 에헤헤…….”

약육강식의 가치관이 지배적인 남부 열왕국의 이야기였다.

그중에서도 자원이 턱없이 부족한 곳에 살아가는 일부 부족만이 공유하는 문화였는데, 아카데미에서는 나쁜 의미로 유명한 전통이었다.

그 내용이란 다음과 같았다.

한정적인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인들을 지게에 태워 밀림에 유기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끔찍한 관행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악습이었다. 남부 열왕국에서 ‘패륜적 문화’라는 까닭으로 탄압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엘시 선배가 진심으로 그러한 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럴 터였다.

나는 엘시 선배를 향한 최저한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더 이상의 의심은 삼가기로 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이어질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따름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끔찍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어요. 형제 중 하나가 제 남동생을 데리고 사냥개와 싸움을 붙이더라고요.”

이 또한 들은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돌이켜 보면, 엘시 선배는 형제자매에게 ‘오빠’나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무기질적인 어휘에서 그녀의 감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가문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남보다도 머나먼 사이라는 뜻이겠지.

그러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자그마한 애가 사냥개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어요? 남동생은 덜덜 떨고만 있었고, 그 새끼들이 낄낄대는 소리가 제 귀를 더럽혔죠. 더는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뭘 어떡해요? 머리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동생 대신 사냥개한테 달려들고 있었죠.”

하여간 성깔하고는, 나는 헛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엘시 선배의 입으로 들으니 또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날 엘시 선배는 루핀을 구하고 싶었다기보다, 제 성질을 이겨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 자그마한 아이가 말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씩씩해 보이는 이야기 속의 여자아이와는 달리, 그날의 이야기를 읊는 엘시 선배의 목소리는 음울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마른 걸레에서 물을 짜내는 것만 같았다.

소녀는 가까스로 성대를 비틀어 그날의 악몽을 토해냈다.

“그거 아세요? 체급이 비슷하면 인간은 개를 이길 수 없어요. 그날 뼈저리게 느꼈죠. 그 개새끼가 얼마나 강하던지, 아가리로 깨무는 자리마다 핏물이 튀고 뼈가 으스러졌거든요.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너스레마저 떠는 그 목소리에서는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쏟아지는 핏빛의 언어 사이사이로 우울한 심상이 스며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슬픈 기억은 이어진다. 언제까지고.

“피가 나니 정작 겁을 먹은 건 그 새끼들이었죠. 뒤늦게 누구를 부르러 갔지만, 그동안 저는 사투를 벌여야 했어요. 그쯤 되니까 이제 세상에 개밖에 보이지 않더라고요.”

나는 엘시 선배를 위로할 겸,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그만두었다.

애초에 엘시 선배는 위로를 바라고 한 말도 아닐 터였다.

그래서 나는 단지 엘시 선배와 아픔을 공유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개가 개고, 나도 개고… 그렇게 개처럼 싸우다 온힘을 다해 목을 졸라 겨우 살아남았어요. 그런데 죽이고 나니까 어이가 없더라고요.”

픽, 하고 난데없이 터져 나온 웃음은 조금 애달팠다.

그녀는 그제야 꼭꼭 숨겨왔던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왜 죽인 거지?”

허탈한 음색이었다.

그리고 근본적인 의문이 담긴 한 마디였다.

“사실, 사냥개한테 죄는 없잖아요. 그냥… 개새끼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나도 그랬을 뿐이고. 그런데 투견장의 개처럼 싸웠던 거죠. 가장 우수한 투견이 되기 위해서.”

“슬프셨군요.”

“슬프다기보다는, 깨달아 버렸죠.”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엘시 선배는 통각마저 마비된 음색으로 말했다.

“이게 내 운명이구나, 하고. 그저필요에 따라 길러지고 쓰이는 삶이라고… 그럴 바에는 가장 우수한 투견이 돼 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그야, 그러면 지금껏 괴롭히던 새끼들도 마음껏 엿 먹일 수 있고…….”

턱, 하고 돌부리에 걸린 듯 엘시 선배의 말이 멎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망설였다.

엘시 선배의 낯에 다시금 홍조가 떠올랐다. 힐끔힐끔 내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이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엘시 선배가 끝까지 숨기려 했던 본심일 터였다.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당했다.

가족들은 그녀를 투견장의 투견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아프고 힘들었을 테고, 씩씩한 척 스스로를 꾸미며 살아왔다.

하지만 어찌 그날의 아픔이 사라지겠는가.

사랑을 받고 싶다는, 인간의 본성은 절제될 수 없다. 오직 숨겨질 뿐.

이제야 엘시 선배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누구나 제 마음을 내보이는 일은 부끄럽고 겸연쩍다. 그럼에도 엘시 선배는 내게 숨김없는 진심을 말해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 다소의 강압이 따르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엘시 선배는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이 무렵에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무, 뭐! 이제는 지나간 이야기죠, 에헤헤… 얼마 전에 알았거든요. 아무리 잘나봐야 쓸모 있는 혼처를 고르는 용도일 뿐이고…….”

“……엘시 선배.”

나지막한 호명과 함께 내 손이 턱, 하고 엘시 선배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엘시 선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나는 엘시 선배를 위로하기 위한 최선의 한 마디를 짜냈다.

“사랑해 줄게요.”

그리고 정적.

바람을 타고 날아온 희미한 풀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엘시 선배는 그대로 얼어붙어,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투견장에서 살아가는 투견의 삶이 엘시 선배의 운명이라고?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엘시 선배가 애완견 노릇을 자처하는지 말이다.

투견과 달리, 애완견은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 해답인가.

그래서 나는 그 해법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애정을 담아 머리를 쓰다듬었음에도, 엘시 선배는 그저 멍청히 굳어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펑, 하는 환청이 들릴 만큼 엘시 선배의 얼굴이 급격히 달아올랐다.

엘시 선배는 결국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엘시 선배? 엘시 선배!”

그래도 기절한 엘시 선배가 행복해 보여 다행이었다.

아마도.

나와 엘시 선배 사이에 새로운 약속이 생긴 날이었다.

**

나는 붉어진 얼굴로 무어라 웅얼거리는 엘시 선배를 사용인들에게 맡겼다.

엘시 선배를 끝까지 돌보는 편이 도리에는 맞겠으나,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내가 찾아다니던 사람은 조금 먼 공터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수련하더니, 그 버릇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백색과 흑색의 장점만을 섞어놓은 듯한 고귀한 회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든 채 정면을 노려보는 그 자세에서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정도에 가까운 검법, 검술 교본에나 나올 법한 모범 중의 모범이었다.

이미 검을 몇 번 휘둘렀는지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마저도 여인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는 연출처럼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겠지.

세리아 유르디나.

내가 아끼는 후배이자, 유르디나 가문의 서녀였다.

나는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 세리아……?"

수련에 방해가 될까 두려웠지만 세리아의 반응은 예상 외로 순순했다.

그녀는 곧장 검을 내리더니, 나를 바라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을 뿐이었다.

"……이안 선배?"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오늘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을 보러 간다고 했지? 혹시 나도 동행할 수 있을까?"

세리아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느닷없는 동행 요청이 의아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리아로부터 곧장 반문이 돌아왔다.

"그야 상관없지만… 왜요?"

"주둔지 근처에서 이상한 소문이 돈다고 들었거든. 조금 신경 쓰여서 말이야."

세리아는 그때까지도 두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 그녀를 관찰한 덕에 알 수 있었다.

저 눈빛은 추가설명을 요구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짐짓 가라앉은 목소리로 세리아에게 말해야 했다.

"그,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다나? 사병이 근방 마을 사람이랑 똑 닮은 사람을 숲에서 본 모양인데, 하하… 무슨 유령도 아니고……."

내 말은 들은 세리아의 낯빛이 그대로 창백해졌다.

처음 알았지만, 세리아는 유령을 무서워하는 듯했다.

결국 세리아는 오들오들 떨며 역으로 내게 동행을 요청해야 했다.

이제 소문의 진상을 파악할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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