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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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디나 가문의 기사들은 기질이 사납기로 유명해요.”
내게 동행을 요청하며 세리아가 던진 경고였다.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귓전을 때렸다. 말이 달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은 페르쿠스 영지의 경계 인근에서 주둔 중이었다. 맨발로 가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그래서 나와 세리아는 오랜만에 말을 타보기로 했다.
본래부터 발재간과 승마가 몇 안 되는 특기였던 나였다. 승마에는 자신이 있었고, 세리아 또한 기병의 본산이라 불리는 북부에서 자란 몸이었다.
어지간한 기병보다도 말을 더 잘 탈 자신이 있었다.
덕분에 말을 타고 있음에도 나와 세리아 사이의 대화는 원활하기만 했다.
“북부 사람들은 자존심이 무척 강해요. 스스로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죠. 귀족이든 평민이든 관계없이… 어쩌면, 그쪽에서 이안 선배를 시험하려 들지도 몰라요.”
“아가씨의 손님인데도?”
“네, 실은 아직 저도 가신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세리아의 입술에는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실체를 과장해서 내게 겁을 주려는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지금 세리아가 툭툭 내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서녀라고 해도 세리아는 유르디나 가문의 혈육이었다. 가문에 단 둘밖에 없는 금지옥엽 중 하나조차 인정을 받지 못했다니.
심지어 세리아의 실력이 뒤떨어지는 편도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나는 무거운 침음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시험은 상상 이상으로 까다로운 듯했다.
“제대로 된 협조를 받아내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네.”
“네, 아마도… 그래도 사병을 지휘하라는 언니의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척 기뻤어요.”
내 눈이 흘깃 세리아의 낯빛을 훑었다.
그렇게 말하는 세리아의 눈동자는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했다. 무척 뿌듯하고 기쁠 때 나오는 눈빛이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가신들에게 인정을 받을 기회라서?”
“그렇기도 하고, 그만큼이나 언니께서 저를 신뢰하신다는 뜻이니까요.”
세리아의 목소리에서는 넘치는 애정과 신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개의 귀족들은 가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형제자매와 권력을 나누지 않는다.
동일한 혈통을 이었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믿음직한 가족, 혹은 가주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배신자.
던졌을 때 둘 중 하나의 얼굴이 나온다면 굳이 동전을 던질 까닭은 없었다.
믿음직한 가신 따위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고, 가주의 자리는 잃으면 끝이었으니까.
그나마 하급 귀족 중에는 형제자매끼리 끈끈한 우애를 자랑하는 곳이 종종 있긴 했다. 바로 페르쿠스 가문처럼 화목한 가정을 이룬 곳이었다.
그러나 고위 귀족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태생부터 형제자매와 경쟁적인 관계를 맺으며 자라난다. 엘시 선배의 집안이 대표적인 예였다.
그런데 권력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군권을 넘겨준다니.
고위 귀족들이 형제자매에게 군권을 넘겨줄 때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상대가 결코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러 라이넬라 가문의 레이놀드 씨가 그랬다.
그는 라이넬라 백작의 동생이면서도 마도병단을 이끌고 있었다.
레이놀드 씨는 그 자체로 6서클에 이르는 대마법사이긴 했지만, 애초에 라이넬라 백작의 신뢰가 없었다면 마도병단을 이끄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다.
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일천에 이르는 사병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그 지휘권을 양도한다는 것은 보통의 신뢰관계로는 불가능했다.
한때 언니에게 열등감을 품었으나, 그 이상으로 애정이 큰 세리아였다.
그녀가 감격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반드시, 언니의 기대에 부응하겠어요. 가문의 기사들의 인정도 받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세리아의 목소리에서 강한 결의가 느껴졌다.
그 흘러넘치는 자매애에 나조차도 흐뭇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심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느껴지기도 했다.
저토록 언니를 사랑하는 세리아였다.
만일 그녀가 나와 델핀 선배의 관계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존경해 마지않는 언니가 엉덩이를 때려 달라 조르는 암컷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델핀 선배가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만 해도 큰일이었는데, 그보다 은밀한 장면까지 들키면 나는 무사할 자신이 없었다.
다만 궁금한 점은 하나 있었다.
과연 세리아는 나와 델핀 선배 중 누구를 칼로 찌를 것인가.
나와 델핀 선배를 유독 좋아하며 따르는 세리아였다.
둘 중 하나를 찌를 것 같긴 한데, 도대체 어느 쪽을 찌를지가 애매했다.
그 와중에 누구도 찌르지 않는다는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참 암울했다.
결국 나와 델핀 선배 중 하나는 피를 흘려야 하리라.
불길한 상상에 빠져 있던 나는, 혹시나 싶어 세리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세리아.”
“네?”
세리아는 내 속내도 모르고 고개만 귀엽게 갸웃할 뿐이었다.
토끼를 연상시키는 그 유순한 태도에 나는 일순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다.
무심코 본심이 흘러나온 것은 그 탓이었다.
“지난번에 성녀님이랑 엘시 선배와 여러 사건이 있었는데… 너 괜찮아? 원래 내 옆에 누가 달라붙는 거 싫어했잖아.”
여태껏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진지하게 뱉어진 질문에, 세리아는 곧장 대경실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무, 무슌… 으으, 무슨 말씀을!”
물론 혀도 한 번 깨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나는 얼핏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새빨갛게 달구어진 세리아의 얼굴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환각이 보였다.
“저, 저따위가 어찌 이안 선배의 곁을 탐내겠어요! 오, 오해에요! 오해!”
“……음, 그렇구나.”
조금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나는 우선 납득한 척을 하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세리아가 허둥지둥하다 말 위에서 떨어질까 무서웠던 탓이었다.
한참이나 내게 열변을 토해내던 세리아는, 결국 헥헥거리며 가쁜 호흡을 진정시켰다.
갑작스러운 흥분에 숨이 찼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세리아는 겨우겨우 숨소리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한풀 기세가 꺾인 그녀의 입에서 그제야 본심이 흘러나왔다.
“……이, 이제 괜찮아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세리아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한 떨기 꽃이 꽃잎을 떨어트리는 광경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적어도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발정난 암캐들은, 나중에 처리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 빛을 잃은 아쿠아마린빛 눈동자를 멍하니 감상하던 나는, 이내 침묵 속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재차 다짐했다.
절대 세리아에게 델핀 선배와의 밀회만큼은 들키지 않으리라.
말을 타고 달리는 내 이마를 타고, 한 줄기의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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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아의 말마따나, 북방 사람들은 호방한 성미로 유명했다.
물론 사납고 거친 면모도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시원시원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그 기질만큼은 남부 열왕국에 가까웠다.
무(?)를 숭상하는 그들은 언제나 강한 자의 방문을 환영했다.
나 또한 그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주둔지에는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지나갈 때마다 병사들이 구경꾼들처럼 흘깃흘깃 나를 훔쳐보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기사들조차 손을 흔들며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그나마 임시로 사병들을 지휘하고 있던 노기사는 기품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공자님. 부족하나마 유르디나 가문을 보좌하고 있는 알렉스라고 합니다.”
묵직한 중갑옷을 입은 노인은 무척 강인하고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편법 따위는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 보였다.
세리아에게 한 차례 예우를 표한 뒤였기에, 나는 부담 없이 알렉스 경의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
그리고 꾸욱, 하고 손에에 가해지는 압력.
건틀렛을 장착하고 있었기에 일순 나는 손뼈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그 직전에 마력을 돌려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말이다.
무시무시한 악력을 가하고 있음에도 알렉스 경의 표정은 엄숙하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도끼를 뽑고 싶었지만 나는 우선 참았다.
대신 역으로 손에 힘을 주어 알렉스 경을 견제했다.
건틀렛이 꾸욱, 하고 눌리며 금속판들이 엇갈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흐음…….”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며, 알렉스 경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그는 제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 나누었던 힘겨루기가 마치 일상적인 인사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
“……머물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세리아에게로 향했다. 세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특이한 사람들이죠?”
“아주 많이.”
나는 툴툴거리면서 알렉스 경의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건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세리아와 함께 주둔지를 둘러보고 있는데, 웬 중무장한 젊은 기사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외쳤다.
“소문의 영웅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자님! 부디 그 솜씨를 한 수 견학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를 놀리는 것인지, 순수한 의도로 그러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세리아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만 보면 세리아가 침착을 유지하는 듯 보이겠지만, 나는 알았다.
이제 조금만 더 두고보면 세리아가 폭발하고 마리라는 사실을.
존경하는 선배가 구경거리가 된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세리아의 입술에 일순 스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눈동자에 음영이 사라진 그녀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는 곧장 행동에 나서야 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 기사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당한 당사자는 물론이고,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의 눈까지도 부릅떠진 순간이었다.
새하얀 빛살이, 거리를 관통한다.
대응조차 불가능한 속력이었다. 쏘아진 손도끼는 곧장 그 운동량을 충격량으로 전환했다.
만일 갑옷이 없었다면, 기사는 떠오르는 대신 손도끼에 얻어맞고 즉사했을 터다.
맞부딪힌 손도끼가 핑그르르 돌며 튕겨 오르자 내 손이 올라갔다.
이내 탁, 하고 궤적을 튼 도끼가 내 손에 안착했다.
젊은 기사가 땅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그와 동시였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이 구르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쿨럭.”
젊은 기사는 그렇게 기침을 하며 제가 받은 충격을 증언했을 따름이었다.
구경꾼들의 이목이 일제히 내게 집중되었다.
그 부릅떠진 눈들을 보며, 나는 그들에게 항의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만일 세리아가 나섰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라고.
분명 피보라가 일었을 터였다.
그러는 내 심정도 모른 채, 세리아는 그저 반짝거리는 눈빛을 내게 보낼 뿐이었다.
“머,멋있어요!이안 선배.”
결국 주둔지에는 곧 웬 또라이 하나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말았다.
그 또라이가 세리아가 아닌 나였다는 점만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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