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44화 (244/649)

〈 24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7)

* * *

외인(外人)이 느닷없이 가문의 기사를 쓰러트렸다.

비록 기사 측이 먼저 도발하기는 했으나, 심판도 명예도 없는 승부였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다짜고짜 손도끼를 던진 것이 전부였다.

통상적인 귀족 가문이라면 나를 욕하고 경멸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따지자면 반칙으로 얻은 승리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유르디나는 달랐다.

승리에 대한 집착과 생존에 대한 집념, 이 두 가지야말로 허허벌판 위에 역사를 건축한 유르디나 가문이 여태껏 추구해 온 가치였다.

명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여타의 귀족 가문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내가 ‘또라이’라는 소문이 의외의 효과를 거둔 이유였다.

“또라이 공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일천의 사병을 통솔하던 노기사, 알렉스 경의 말이었다.

시정잡배의 언어를 내뱉는 기사의 표정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일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을 정도였다.

얼핏 보기에도 알렉스 경은 철두철미한 인물로 보였다.

전투를 앞두지도 않았는데 무거운 중갑옷을 빠짐없이 착용한 것만 봐도 그랬다.

기사들의 갑옷은 그 중량뿐만 아니라 압박감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만큼 전투에서는 든든한 보험이 되어주겠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짐덩어리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알렉스 경은 언제나 무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그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 볼 만했다.

깐깐하고 타협이 없다. 유르디나 가문의 군대를 이끌 정도였으니 그가 세운 전공 또한 혁혁할 터였다.

그러한 인물이 난데없이 ‘또라이’라는 말을 쓰니, 나 또한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내 입에서는 절로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네?”

“요즘 사병들 사이에서 유명하시더군요. ‘또라이 공자’라… 저 또한 젊은 시절에는 ‘미친개’라 불리기도 했죠.”

그러면서 알렉스 경은 추억에 잠긴 듯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친개’라, 실은 나는 이미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렉스 경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헛웃음을 머금었다.

쓸데없는 정보였다.

그래봐야 ‘또라이’에 ‘미친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하나 더 추가될 뿐이었다.

다만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듣자하니 알렉스 경은 아무래도 ‘또라이’라는 호칭을 높이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지금껏 ‘또라이’니 ‘미친개’니 하며 얼마나 많은 음해에 시달려 왔던가.

이제 아카데미의 저학년들은 눈만 마주쳐도 슬금슬금 나를 피해가던 차였다.

그래서 나는 청춘을 부러워하는 노년에게 반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거 칭찬입니까……?”

“아, 그렇군요, 공자님께서는 북부 사람이 아니셨죠.”

알렉스 경은 그제야 눈치 챘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그토록 북부 사람 같아 보인단 말인가.

제국에서 ‘북부인’이란 다혈질에 뒤가 없는 성미로 유명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동부인인 나와는 정반대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항변하고 싶었으나,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혈연(血?)과 학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연(??)이었다.

굳이 북부 사람과의 차이점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도리어 북부 사람들은 동향 출신끼리 뭉치는 경향이 강했기에, 나를 북부 사람처럼 생각한다면 좋아해야 할 터였다.

그럼에도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알렉스 경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내게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투쟁과 승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북부만의 문화입니다. 딱 봐도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은 별명들이 주로 부러움을 사죠. ‘또라이’, ‘미친개’, ‘손도끼 살인마’…….”

“……아직 사람은 안 죽였습니다.”

내 소심한 항변에 알렉스 경은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누가 뭐랬냐는 듯한 태도였다.

“공자님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여튼, 공자님께서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에게 호감을 얻은 것만은 사실이죠.”

이럴 수가.

나는 감탄을 해야 할지 탄식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북부인들의 사고관은 상상 이상으로 엇나가 있는 듯했다.

이상한 짓을 할 때마다 호감도가 오르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리아가 가문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는 그날, 세리아는 유르디나 가문의 모두에게 인정받으리라.

알렉스 경은 내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며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놀라신 모양이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유르디나 가문은… 음, 재미있는 곳이네요.”

차마 가신의 면전에서 가문에 대한 악평을 남길 수 없던 내 최선이었다.

돌이켜 보면 델핀 선배도 그랬다.

난데없이 방 안에서 손도끼를 휘두르는 나를 오히려 고평가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유르디나 가문의 가풍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내겐 호재였다.

당장 알렉스 경만 하더라도 첫 만남에 비해 한결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들도 다르지는 않을 터였다.

이쯤이면 조사도 수월할 듯 싶었다.

내친김에 나는 알렉스 경에게도 소문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 경. 혹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최근 이곳에서 마을 사람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 병사가 있다고…….”

“아아, 밀턴 말이군요.”

나는 곧장 튀어나오는 이름에 말소리를 멈칫했다.

지휘관쯤 되는 인물이 일개 병사의 이름까지 줄줄 외우고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내 반응에 알렉스 경은 또 다시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또한 북부의 문화입니다.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우는 전우는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이나 다름없죠. 수백 명이 되더라도 이름 정도는 외워두고 있습니다.”

“수만 명이 되면요?”

“그건 당연히 못하죠. 그래도 몇 년 부대끼다 보면 천 명까지는 외울 수 있습니다.”

북부 사람들은 묘한 곳에서 고집이 있는 듯했다.

나쁠 건 없었다. 그 덕에 이야기가 단숨에 진전되었으니까.

알렉스 경은 곧장 내가 원하던 정보를 들려주었다.

“며칠 전의 일이었습니다. 밀턴은 그날 밤 술을 먹고 볼일을 보러 주둔지 근처의 숲으로 향했죠. 그리고 그곳에서 마을 사람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다는 겁니다.”

“그 마을 사람 본인이 아니라요?”

“적어도 밀턴의 말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밤에 홀로 숲에 있는 꼴이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대답도 없이 숲 안으로 사라졌다더군요. 그래서 밀턴이 일부러 다음날 마을을 찾아갔는데 당사자는 기억이 없다고 했답니다.”

흠, 하고 나는 턱을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증언 자체의 신빙성은 높지 않았다.

대충 듣기에도 걸리는 점이 두 가지나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만취한 상태에서 겪은 일이라는 점이 그랬고, 또 마을 사람 본인이 기억을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구체적인 증언이라면 또 완전히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 숲으로 가봐야겠군요.”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이후로 밀턴이 숲에 유령이 나온다고 떠벌려서, 사병들은 은근히 숲에 가기를 꺼려합니다만.”

“든든한 동료가 있는데, 왜 혼자 가겠습니까?”

‘든든한 동료’가 누구일지 짐작해낸 알렉스 경은 후, 하고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때마침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이안 선배! 식사 준비가 끝났으니 부디…….”

나와 알렉스 경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부른 여인을 향했다.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리따운 소녀는, 말없이 자신을 향하는 두 사내의 눈동자에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리아.”

“네, 네?”

“이따 단 둘이 밤 산책이나 할까?”

그러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리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힘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그날 밤.

“유, 유령을 찾으러 간다고는 말 안 했잖아요!”

세리아가 오들오들 떨면서 내 팔에 매달렸다.

심야의 숲에서는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나와 세리아는 나뭇잎 사이로 투과되는 시린 빛무리에 의존해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길은 숲의 심부까지 이어졌다.

울먹거리는 세리아는 솔직히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팔에 닿는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았으니 아무래도 좋다 싶었다.

나는 짐짓 단호한 어조로 세리아에게 말했다.

“세리아, 지금은 탐색 중이야. 자꾸 소리를 내면 곤란해.”

“하, 하지마안…….”

선배의 위엄을 세우고 싶었으나 오들오들 떠는 세리아가 너무 귀여웠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를 달래 보기로 했다.

“병사가 만취해서 헛것을 본 걸지도 몰라. 오늘은 단지 확인차 왔을 뿐이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바스락, 하고 인기척이 귓가를 간질인 것은 그때였다.

익스퍼트에 이른 검사들은 초인적인 감각을 자랑한다.

나도 세리아도 이처럼 노골적인 소리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곧장 우리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리아의 낯빛은 이미 창백하게 질린 지 오래였다. 나는 세리아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쫓을 테니까, 너는 후방에서 상황을 살피면서 천천히 따라와… 함정일지도 몰라.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곧장 지원 요청하러 가고.”

세리아는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세리아가 덜덜 떨어 전투가 불가능하니 이러는 편이 최선이었다.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가, 서서히 감각을 일깨웠다.

짐승은 아니었다.

저 너머에서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 느껴지고 있었다. 상대 또한 우리의 기척을 느꼈는지 잠시 정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직후.

탁, 하고 땅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곧장 그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몇 분 뒤, 나는 비로소 과거의 인연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미트람."

"오랜만입니다, 이안 페르쿠스."

그는 내 영지민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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