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46화 (246/649)

〈 246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39)

* * *

제국의 행정관 아서는 늘 그렇듯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합니다.”

“아니, 암흑사제가 발견됐는데 중앙군이 오지 않는다고요?”

페르쿠스 저택의 회의실은 이제 아서의 집무실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내가 지금 아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소 또한 회의실이었다.

아서가 회의실에 머무른 이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한 켠에 침낭 하나가 자리 잡았다는 점이었다.

북부에서 서식하는 ‘은색 오리’의 털로 만든 고급품이었다. 노숙을 밥 먹듯이 하는 모험가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제국 최고의 두뇌들이라는 행정관이 사치를 부린 결과가 고작 침낭이라니.

그만큼이나 외부에서 숙식을 자주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서는 페르쿠스 저택에서도 회의실에만 처박혀 있기로 유명했다. 일단 명목상 기밀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당연히 편안한 객실에서 묵는 일 또한 없었다.

그는 언제나 회의실 구석에 놓인 침낭에서 노곤히 잠에 들었다. 그마저도 요즘에는 수면 시간이 더 짧아졌는지, 그의 눈 밑은 날이 갈수룩 거무죽죽해지고 있었다.

여러모로 아서가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서에게 추가적인 수고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혹시 제 증언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일전에 말씀하셨다시피, 지금 대륙에서 저만큼 암흑교단과 척을 진 인물은 드물…….”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아서의 단언이었다.

그 확고한 어조만 보더라도 아서가 나를 신용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적어도 암흑교단과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그럴 터였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내 의문이 담긴 시선이 아서를 향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뭉치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서류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그 서류를 받아들었다.

보고서의 형식을 취한 서류의 첫줄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제목이 박혀 있었다.

‘암흑사제 목격 보고서’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안 경께서 떠나신 이후 그 ‘미트람’이라는 암흑사제를 목격했다는 소식이 각지에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추합된 사례만 수십 건이에요.”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멀리 떨어진 수십 곳에서 동일한 인물이 목격되다니, 괴담집이 아니라 제국의 정식 보고서로 접할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목격담의 주인공은 미트람이었다.

마음대로 개조한 육체 사이를 갈아탈 수 있는 상식 밖의 인물, 그라면 수십 곳에 얼굴을 들이밀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입에서 절로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망할.”

어쩐지 너무 간단히 정체를 드러낸다 싶었다.

목격 증언이 이토록 분산되면 자연스레 파견할 수 있는 전력도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과 성국, 혹은 열왕국까지 합세하더라도 혼란은 필연적이었다.

당장 어디에 얼마나 많은 전력을 투사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페르쿠스 영지 같은 시골에 전력 지원을 요청하기는 힘들었다. 설령 만일을 대비해 중앙군을 파견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하리라.

그래서는 안 됐다.

편지에 나온 재앙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대응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대로 보였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더 많은 전력이 필요했다.

문제는 내게 물증이 없다는 점이었다.

수십 곳에서 동시에 목격된 미트람 중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진짜’ 미트람이 페르쿠스 영지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야 했다.

그러나 당장 내게 그럴 만한 수단이 있을 턱이 없었다.

내 사정을 헤아리고 있던 아서의 입에서도 한숨이 새어나왔다.

“저도 최선을 다해보겠지만, 추가적인 지원 요청은 반려될 가능성이 큽니다.”

나는 일순 ‘용혈 문자’에 생각이 미쳤다.

지금 용혈 문자를 꺼내들고 아서에게 추가적인 전력 지원을 요청한다면, 대번에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황제의 특별 지시로 행정관까지 파견된 사안이었다. 내가 용혈 문자를 빌미로 전력 지원을 요청한다면, 그 소식은 황제의 귀까지 전해질 터였다.

그리고 내 용혈 문자는 당대의 황제에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서 온 내가, 미래의 황제에게 받아낸 문자였다. 아직 황제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을 확률은 낮았다.

그렇다면 내게 군권을 넘길 확률 또한 지극히 낮다고 봐야 했다. 오히려 신뢰를 얻어야 할 시점에서 결정적인 실책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입술을 몇 번 짓씹던 나는, 결국 원론적인 해답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증거를 수집해야겠군요.”

“네, 그것이 최선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에는 라이넬라의 마도병단을 비롯한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있으니까요.”

유르디나 가문의 사병까지 동원한다면 이야기가 편하겠으나, 이는 불가능했다.

영지의 경계를 넘어 남의 군대가 들어온다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라이넬라 가문처럼 따로 공식적인 요청과 허가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유사시에는 일천에 이르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또 영지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트람의 도주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 미트람이 도망칠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레이놀드 씨와 제 친구들을 만나봐야겠습니다. 미트람이 목격된 숲을 조사하다 보면 뭔가 나오기는 하겠죠.”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안 경.”

아서는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내게 조언했다.

“이안 경의 말씀대로 암흑사제의 본체가 그곳에 있다면, 필시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 있을 테니까요.”

“……최선을 다해 봐야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최대한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했지만, 영지에 위기가 닥친 마당에 일부러 모험을 피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그저 최고의 전력을 데려가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레이놀드 씨를 한 번 만나봐야 할 듯 싶었다.

겸사겸사 레토와 상의를 해보는 편도 좋을 듯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하니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줄 터였다.

특히 마음에 걸리는 ‘페르쿠스 가문의 비밀’에 대해서라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내 몸은 응접실에 도착해 있었다.

손님이 워낙 많다 보니 페르쿠스 저택의 방들은 누군가 점유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나마 예외가 있다면 응접실 정도였다.

넓어서 한두 명 정도로는 티도 안 나니까.

나는 응접실에 앉아 조용히 서류를 둘러보았다.

지도에 찍힌 점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대도시 인근도 있어서, 미트람이 붙잡힐 때까지는 한동안 제국에 난리가 날 듯했다.

고작해야 암흑사제 하나가 벌인 일치고는 규모가 너무 컸다.

암흑교단에는 미트람 같은 암흑사제가 몇 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유독 높은 지위를 누리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신마전쟁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암흑교단에도 주교와 성녀가 존재했다.

아직까지는 그 전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적이었다. 나는 암중의 야수를 상대하는 사냥꾼만큼이나 피로해졌다.

난데없는 시선 하나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살짝 열린 응접실의 문 틈새로, 긴 머리카락이 그림자처럼 내리깔렸다.

페르쿠스 저택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은 많고 많았다.

하지만 저토록 엉덩이를 훌쩍 넘을 만큼의 길이를 자랑하는 머리카락은 드물었다.

그러한 머리카락의 소유자는 저택에서 오직 하나.

리아 페르쿠스, 나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눈을 똘망똘망 뜬 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왜 그래?”

“……내가 아는 오빠가 맞나 해서.”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네가 아는 오빠가 아니면, 내가 누군데?”

“오빠의 탈을 쓴 사기꾼!”

그러면서 리아는 늘 그렇듯 내게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우, 우리 오빠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 진지한 눈으로 서류도 보지 않고! 신분도 외모도 뛰어난 여자들을 줄줄이 달고 오지도 않는단 말이야!”

나는 리아의 투정에 혀를 쯧쯧 차며 인생의 진리를 읊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리아, 원래 모든 인간은 성장하는 법이야.”

“성장기는 한참 전에 지났잖아!”

씩씩대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리아는 못내 분한 기색이었다.

하도 오빠를 좋아하다 보니, 이제 가족의 품을 떠나 독립적인 성인이 된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한동안 리아와 단 둘이 있을 기회가 없다 보니 더더욱 그랬을지도.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리아에게 말했다.

“그러는 너도 예전에 비해 많이 자란 것 같은데?”

“……흥, 당연하지.”

그러면서 리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가린 채 요염한 눈웃음을 지었다.

슬쩍 내 옆으로 다가온 리아는 내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쑥, 하고 제 엉덩이를 내밀어 내 팔을 건드렸다.

탄력 있는 여인의 신체가 팔을 누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적어도 오빠를 홀릴 정도는 될걸?”

그 은근한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고깃덩어리 치워라.”

“고, 고깃덩어리?!”

또 다시 리아의 신경을 자극하고 만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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