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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49화 (249/649)

〈 249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42)

* * *

숲에서 실종자들을 마주치기 전,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일전에 황녀가 선물해 주었던 공간 확장 주머니였다.

용량을 조금 늘린 물건조차 수백 골드를 호가하는 물건이었다. 황녀가 선물해 준 주머니는 그중에서도 고급품으로, 못해도 수천 골드는 나갈 터였다.

어쩌면 1만 골드를 넘을지도 몰랐다.

이 주머니 하나가 엠마의 목숨 값과 맞먹는다니, 금전감각이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황녀가 준 주머니는 새하얀 가죽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금실로 황실의 문양까지 수놓아져 있었다.

이를 고려한다면 실질적인 가치는 그보다도 더 높을 수도 있었다.

이미 내 손에 들린 이상 실용적인 도구 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황녀가 준 주머니는 비싼 값을 톡톡히 해냈다.

무려 수십 병에 달하는 물약과 비상식량, 식수를 넣고 나서도 아직 빈 공간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수많은 수납품 중에 내가 주목하고 있는 물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엠마가 내게 선물해준 물약들이었다.

각양각색의 물약들은 제각각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엠마의 신형 물약들은 두 가지 효능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특히나 유용했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내가 엠마에게 부탁했던 물건이 하나 더.

그렇게 한참이나 약병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내 옆으로 다가온 여인으로부터 봄을 닮은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나로서는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아야 했다.

아니, 의도는커녕 여인의 이름조차 불명이었다.

예전에 듣기로는, 성녀로 간택받던 날 고아 시절의 이름을 버렸다고 했다. 그 까닭 또한 알려진 바가 없었다.

비천한 출신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혹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그 마음을 간파할 수 없는 상대였다. 오래 전의 일을 가늠해 봐야 헛수고에 불과했다.

다만 나는 혹여 중요한 용무가 있나 싶어 질문을 던졌다.

“……왜요?”

“음, 그냥요? 산책하는 기분을 좀 내보려고요.”

허, 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머금었다.

이 숲에는 어떤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판이었다.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은 우리와 따로 떨어져 탐색을 진행하고 있었다.

즉 적과 조우한다면 일단은 우리 힘만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적을 발견하는 즉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춰두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토록 엄중한 상황에 ‘산책’이라니.

그러나 성녀는 내 허탈한 반응에 새초롬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까치발을 하더니, 내 귓가에 열기 띤 속삭임을 흘렸다.

“……처녀의 몸을 희롱하더니, 산책하는 기분도 못 내게 해요?”

“아니, 그건……!”

당신 탓도 있잖아.

그러한 말이 목젖까지 치솟았지만, 남성과 여성의 정조는 무게가 동일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탓해봐야 나만 쓰레기가 될 뿐이었다.

무어라 이유를 대더라도 절대 이길 수 없는 구도였다.

결국 나는 한숨을 푹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대로 하시죠.”

그제야 성녀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팔짱을 껴왔다.

푹신하고 탄력 있는 감촉이 팔에서 느껴졌다. 언제나 그렇듯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성녀는 우쭐해져서 내게 또 다시 속삭였다.

“말 잘 들으면, 다음에도 또 만지게 해줄게요.”

성녀가 아니라 탕녀가 아닐까.

지난번 일선을 넘은 이후로 성녀는 유독 내게 거리감이 없었다. 이제는 누구나 나와 성녀의 사이를 의심할 정도였다.

심지어 독실한 천신교의 신자인 어머니조차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그렇게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싶어 끙끙대던 차에,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입이 험하기로 유명한 소녀였다.

“……야, 젖탱이. 그만 좀 떨어지지?”

틱틱대는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가득했다.

자그마한 소리였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그 내용 정도는 분간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깜짝 놀라 엘시 선배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라이넬라 가문이라도 성녀를 공공연하게 모욕할 수는 없었다.

성녀는 천신교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신성모독’이라는 빌미로 엮기 시작하면 성녀가 하지 못할 짓은 드물었다.

그런데 이토록 공개적인 장소에서 성녀를 욕하다니.

엘시 선배의 까칠한 성미를 고려하더라도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를 알아들은 사람이 나와 성녀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성녀는 참지 못하고 울컥하고 말았다.

“애완견은 애완견답게 있으면 안 될까요? 지금, 이안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멍멍.”

엘시 선배는 조롱하듯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더니,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도망치세요. 그 여자 완전 별로거든요… 젖탱이는 큰데 속은 좁아터졌어요. 게다가 음흉해, 몸으로밖에 꼬실 줄 모르는 음탕한 년.”

“……오늘따라 개 짖는 소리가 거슬리네요, 이안? 애완견 교육이 더 필요하겠어요.”

으득, 하고 이를 갈며 내뱉는 성녀의 어조도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사건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당연히 등을 맞대야 하는 동료가 지향해야 할 관계는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은 전투를 앞두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한숨과 함께 한 마디를 꺼내려던 찰나.

“……이안 오빠.”

셀린의 한 마디가 내 이목을 끌어당겼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셀린을 바라보았고, 이내 셀린의 시선을 따라갔다.

빳빳이 긴장한 목소리가 위험을 알리고 있었으니까.

성녀와 엘시 선배도 말을 멈추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유령처럼 수십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미동조차 없다. 생명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아 마치 사람 모양의 묘비가 서 있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마을 사람?”

성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뱉은 감상은 그랬다.

허름한 차림에, 평범한 생김새,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본 셀린의 낯빛이 창백해진 이유가 있었다.

그녀도 어린 시절 나와 함께 페르쿠스 영지를 쏘다닌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리스, 마리?”

셀린의 중얼거림에 수십 명의 인간들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눈동자는 멍청하거나 순박했다. 호명이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한 듯, 사내와 여인 하나의 얼굴에 감정이 깃들었다.

두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 도련님? 셀린 아가씨? 도대체 이게 무슨…….”

“히익, 이 사람들 뭐야!”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기억 속의 도리스와 마리였다.

하도 말썽을 부려 요나 아주머니의 속을 썩이던 도리스, 사과를 좋아해서 영지 한 켠에 과수원을 만들면 안 되냐고 하던 마리.

그러나 그 둘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했다.

애초에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은 물론이고, 결정적으로 마리는 이미 죽었다.

세리아의 손에.

지금 내 앞에 있는 마리는 두 번째였다. 나는 서서히 손을 치켜들었다.

지시를 내리는 것이 맞았다.

죽여야 했다. 그것만이 그들을 위한 구원이었다.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면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흘끔흘끔 내게 시선을 보내오며 애원했다.

“도, 도련님! 저 사람들 누구에요?! 왜 제가 이런 곳에…….”

“부, 분명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일행은 내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함정이었다. 저들은 미트람의 실험체였고, 우리를 습격할 것이다.

악취미였다.

만일 저 둘이 실험체가 아니라면?

혹여나 미트람이 멀쩡한 원본을 남겨두고 있었고, 내 앞에 들이밀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전원 전투 준비!”

날붙이가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다.

성녀와 엘시 선배는 자연스레 중앙으로, 촘촘한 방진을 짜며 전위에 나와 세리아가 섰다. 셀린은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해 후방을 지켰다.

칼날이 그들을 향하자 도리스와 마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꺄, 꺄아아악!”

“도, 도련님… 왜 그러세요! 저 도리스에요!”

마지막으로 검을 뽑은 것은 나였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다가.

결국 입술을 짓씹는 수밖에 없었다.

“……마리, 도리스.”

나는 괴로운 숨을 토해내며, 검극을 그들에게로 향했다.

“내 잘못이다.”

영지민을 지켜내지 못한 귀족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마리와 도리스의 낯빛이 그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만큼 탈색되었다.

두 사람이 무어라 애원이라도 하려던 그때.

“도, 도련님! 그게 무슨 소, 리, 리, 리… 리이이이이익?! 윽, 끄으우우우웁?!”

척추를 팍, 하고 꺾으며 남녀의 몸이 기괴한 움직임을 보였다.

팔이 역관절로 꺾여 핏물이 질질 새어나왔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아리가 점점 달아오르며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아, 아파아아아앗! 아파, 아파, 아파! 살려줘! 살려주세요, 도련니이이이임!”

“크헥, 그에엑… 도, 도련니이이임… 제, 제바아아아알!”

우드득, 하고 목뼈가 멋대로 꺾이며 두 사람의 머리가 덜렁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가죽과 살점에 의존해서 겨우 달라붙은 머리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피눈물이었다.

마리와 도리스의 눈동자에서 핏물이 주르륵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 저주할 거야…….”

“용서 못해, 용서 못해…….”

그리고 관절이 맞춰지는 소리와 함께 수십 명의 인체가 각 잡힌 운동을 시작했다.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실험체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들의 입에서 이지를 상실한 괴물 특유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내쉬며 괴로운 심정을 삼켰다.

“……좆같은 새끼, 연출하고는.”

짐승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뽑아 투척했다.

팍, 팍, 하고 실험체 둘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육편과 골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핑그르르 돌며 손도끼가 튕겨 오른 사이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빛이여, 범람하라!”

엘시 선배의 그 한 마디에 단번에 대기의 마력이 들끓었다.

새하얀 전하가, 대지를 뒤덮으며 팍팍 튀기는 소음을 일으켰다.

시야가 명멸한다.

백열하는 세계 속에서 내 검이 날카로운 직선을 그렸다.

저항감조차 없이 가슴의 한가운데를 꿰뚫린 실험체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나는 곧장 칼날을 비틀어 검로를 횡으로 이어붙였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측면을 휩쓸었다.

핏물이 촥 뿌려지며 새하얗던 시야에 색채를 더했다. 빛이 꺼져갈수록 그 선명한 붉은 빛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저중에 하나는 마리나 도리스가 흘린 피일 터였다.

반쯤 가슴팍이 잘려나간 실험체는 반탄력을 이기지 못해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일전에 상대했던 실험체는 자폭 기능이 있었기에, 나는 잊지 않고 그 머리를 날려버렸다.

부수는 것도, 죽이는 것도 이토록 간단하다.

그런데 어째서 지키는 것만큼은 그토록 힘이 드는가.

나는 이를 악물며 품속에 지참해 두었던 양피지를 꺼냈다.

연락 마법이 기록된 스크롤이었다. 이를 찢기만 하면 곧장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이곳으로 달려올 터였다.

그리고 내가 주변의 적을 정리하고 스크롤을 찢기 직전.

팍, 하고 내던져진 무언가가 스크롤을 강제로 구겨버렸다.

핏물이 길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혈흔을 쫓아, 내게 내던져진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팔이었다.

실험체 하나가 제 팔을 강제로 잡아 뜯어, 내게 투척한 것이다.

그 실험체는, 도리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투의 흥분과 더불어 내 뇌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리스는 이죽이는 미소를 지으며, 성대를 긁어내듯 기괴한 목소리를 흘렸다.

“……다시 만나는군요, 이안 페르쿠스.”

유렌이 옳았다.

암흑사제는 이곳에 있었다.

도리스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툭 쓰러지며, 그 뒤에 시립해 있던 검은 후드를 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로 가려져 그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다만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비틀린 미소를 지은 그 입술.

나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뛰쳐나가려다가, 멈칫하는 수밖에 없었다.

후드 안에서 타오르는 눈동자의 색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금빛이다.

“약속대로, 당신의 운명이 찾아왔습니다.”

키득거리며 던져진 여인의 목소리에도,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

그것이 미트람이 이 세상에서 지닌 색조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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