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50화 (250/649)

〈 250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43)

* * *

풍경을 부감한다.

일순 시야가 내려앉는다. 핏물로 젖은 아수라장이 아래로, 망막에 떠오르는 색조는 오직 흑색과 금색뿐이었다.

후드로 가려져 있어 자세한 생김새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낯에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가 짐작이 갔다. 흑발과 금안은 특정 가문의 상징이었으며, 우연히 유전적 특성이 겹칠 확률은 높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혹은 리아와 비슷할지도 몰랐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볼 때 상대는 여성이었다.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는 소리를 듣자하니 연령도 젊은 편이었다.

그렇게 내가 넋을 놓고 있자, 세리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안 선배!”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내 옆에 어느덧 실험체 하나가 다가와 있었다.

무작정 휘두르는 팔에는 강한 완력이 담겨 있었다. 그래봐야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타격이 누적된다면 나 또한 곤란해질 터였다.

벼락같이 쏘아낸 검격이 실험체의 두개골을 터트렸다.

핏물이 주르륵 솟아오르며 한 생명의 죽음을 알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얼떨떨한 심경으로 땅바닥을 더듬거렸다.

떨어진 손도끼가 손에 잡혔다. 그제야 조금 사고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미트람은 즐겁다는 듯 홍소를 터트렸다.

“아하하핫! 깜짝 놀라셨군요, 이안 페르쿠스.”

“……너 누구야.”

흐응, 하고 미트람은 묘한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림자로 가려진 얼굴에 금빛으로 타는 눈동자만이 등불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 밑에 드러난 입술이 고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악신의 신실한 종이자 당신의 친구인 미트람이죠.”

무슨 뜻으로 던진 질문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미트람은 시치미를 떼며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나는 그 이죽거리는 웃음을 참아내지 못했다.

손도끼가 은빛의 궤적을 그리며 쏘아졌다.

무시무시한 속력이었다. 대기를 찢는 파공성이 뒤늦게 고막으로 들이닥쳤다.

그럼에도 미트람은 여유만만한 태도로 팔을 휘둘렀을 따름이었다.

캉, 하고 금속과 육체가 맞부딪혔다고는 믿기지 않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핑그르르 돌던 손도끼가 날을 아래로 세웠다. 그리고 단두대처럼 또 다시 떨어져 내리는 도끼날에, 미트람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중동의 묘리라…….”

여인은 슬쩍 상체를 뒤로 젖히며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손도끼의 운동방향과 접점을 만들 수 있도록.

마치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가녀린 손이 불러온 결과는 놀라웠다.

탁, 하고 도끼날이 여인의 손에 붙잡혔다.

손이 절단되는 일은 없었다. 도리어 옅은 핏방울이 맺히자, 미트람은 탄성을 내지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오호, 핏방울? 그새 실력이 늘었군요, 이안 페르쿠스. 물론 정중동의 묘리는 훌륭한 기술이지만, 아직 숙달이 덜 된 모양입니다. 고작 한 번의 변화가 끝이라니.”

그러면서 여인은 히죽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도끼를 되돌려 주었다.

내 앞에 툭 떨어지는 손도끼를 허리춤에 갈무리하고, 나는 매서운 눈빛을 미트람에게로 향했다. 그럼에도 여인은 아직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제 정체가 궁금하십니까? 이 칠흑 같은 머리카락, 심야에도 빛나는 금빛의 눈동자… 아아, 아름답군요. 페르쿠스 가문은 정말 좋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알려줄 생각은 있고?”

내 반문에 미트람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었다.

“푸흐흡! 무, 물론이죠…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지휘자처럼 미트람이 팔을 펼치자, 난동을 부리던 실험체들이 움찔 몸을 굳혔다.

그리고 다시금 대열을 이루며 나와 세리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일행들을 노려보았다.

어느덧 절반밖에 남지 않았으나 기세는 더욱 흉흉했다.

미트람이 무슨 짓을 한 모양이었다.

“제 작품들이랑 조금 놀아주시죠… 기껏 만들었는데, 쓰지 않으면 아깝잖습니까.”

무고한 민간인을 가지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내뱉는 말이었다.

뻔뻔하고, 역겨웠다.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너는 페르쿠스가 아니야… 단순한 범죄자지, 이따위 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하길 바라?”

“글쎄요, 두고 볼 일이죠?”

여전히 태평하기 그지없는 음색이었다.

나는 곧장 검극을 앞으로 향한 채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새 세리아는 또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내가 혼란을 겪자 일행들도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모양이었다.

세리아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아니, 암흑사제야. 희생자들부터 치우고 한꺼번에 달려든다.”

세리아는 더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뒤에 있는 일행들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였다. 셀린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결국 마음을 다잡고 검을 쥐었다.

성녀가 신호하듯 가호를 내렸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새하얀 광채가 몸에 어리자, 나는 곧장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도열한 실험체들이 다시금 괴성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나는 달려들던 힘을 그대로 발차기에 담아 선두의 실험체를 날려버렸다.

팍, 하고 틀어박힌 발길질에 실험체 하나가 나동그라졌다. 뒤이어 두 명의 실험체가 달려들자 검이 빛을 뿜었다.

폭발하는 머리들이 샴페인처럼 핏물을 터트렸다.

단번에 셋을 처리한 내게 실험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래봐야 잔챙이들이었지만, 미트람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검은 안개가 지반으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서서히 실험체들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조롱하듯 미트람이 잊고 있던 사실을 환기시켰다.

“사제는 이쪽에도 있답니다~”

암흑사제도 사제는 사제였다.

악신이 내린 힘을 쓰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성가신 점은, 머리를 잃은 시체들조차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검은 안개가 어떠한 힘을 부여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쓰러트린 실험체까지 적의 전력에 가산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다대다의 승부라면 승리의 키를 쥔 쪽은 검사들이 아니었다.

나는 곧장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엘시 선배!”

내 고함에 엘시 선배는 늘 그렇듯 준비하고 있던 영창을 마무리했다.

“……별과, 달과, 해로 이어지는 천뢰의 이치! 떠도는 빛과 불꽃이여, 오라! 뭇 바람이 그대들을 부르나니!”

대기의 마력이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요가 작은 새처럼 숲에 내려앉았다. 폭풍전야의 평온에 균열이 일어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실험체들이 본능적으로 하늘 위를 바라본 그 찰나.

이미 먹구름을 몰고 온 질풍이 파직거리며 재난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소녀의 입에서 낭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질풍신뢰(?風?雪)!”

일종의 사형 언도였다.

우르릉, 하고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진 그 직후.

벼락이 허공을 으깨며 쏟아져 내렸다.

연달아 울리는 폭음에 귀가 먹먹했다. 주홍빛으로 달아오르던 시야는 이내 백색으로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엘시 선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주문은 그만큼이나 파괴적이었다.

쏟아져 내리는 뇌우에 실험체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불타올랐다. 피하려고 해도 이미 지반을 뒤덮은 새파란 전하가 이를 놔두지 않았다.

그 흔적만으로도 생체를 감전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통상적이라면 저 참상이 끝날 때까지 엎드린 채 기다리고 있는 편이 옳았다.

아무리 엘시 선배의 마력 제어가 정교하더라도 한계는 있었다. 저 뇌성벽력의 한복판으로 들어서면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가 익스퍼트에 이르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나는 땅을 박차고 벼락이 내리치는 전장의 한가운데를 내달렸다.

이미 주위의 실험체들은 정리가 끝난 뒤였다. 몇몇 실험체들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내게 다가오다 감전되어 쓰러질 뿐이었다.

물론 나도 무사하진 못했다.

폭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지반이 움푹 파이며 전하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새파란 입자에 닿을 때마다 내 근육이 옅게 경련했다.

짜릿한 통증이 뇌를 달구었다.

그나마 뇌전에 직격당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일 저 수준의 마법이 내리꽂힌다면 나라도 무사하지는 못할 터였다.

이를 악물고 뇌우의 틈새를 빠져나가는 그 길의 끝에서, 악연 하나가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마법이 시전되는 도중에 달려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일부러 위험을 감수한 보람이 있었다.

마침 저 여유만만하던 낯짝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던 차였으니까.

물론 미트람도 마냥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불쑥 땅에서부터 팔들이 솟아올랐다.

비틀거리며 실험체 몇 명이 미트람의 주위를 에워쌌다. 만약을 대비한 전력이었는지, 무장의 상태나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그러나 나 또한 마냥 손을 놓고만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칼집에 수납해 두었던 검을 곧장 내던졌다.

파직거리며 주위의 전하를 먹어치우고 있던 검은, 훌륭한 피뢰침의 역할을 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사이를 칼날이 유영했다.

미트람의 얼떨떨한 시선이 칼날과 마주친 것이 신호였다.이내 시야가 새하얗게 달아올랐다.

쾅, 하는 폭음이 울려 퍼지며 질풍이 주위를 휩쓴다.

나는 억지로 그 충격파를 헤쳐 나갔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여인이 이제 눈앞이었다.

미트람이 당황하며 나를 바라본 그 찰나.

내 주먹이, 미트람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내달리던 힘을 그대로 담은 한 방이었다. 미트람의 몸이 곧장 허공을 날았다.

“……꺄흑?!”

의외로 여린 비명이었다.

악마가 내지르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땅바닥에 널브러진 미트람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아직 벼락이 내리치고 있었기에 손도끼를 꺼내는 것은 위험했다.

대신 주먹질로 끝장을 볼 심산이었다.

사르륵, 하고 자연스레 미트람의 후드가 벗겨진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러난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흠칫 몸을 굳히는 수밖에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어울리는 소녀였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는 어린 시절의 병마를 증언하는 듯했다. 그 가녀리고 요염한 미소마저 누군가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내 심장이 덜컥이며 정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 오빠.”

리아를 닮은 여인은, 그렇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푹, 하고 내 복부를 짧은 칼날이 파고들 때까지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헐떡이며 내 손이 찔린 부위를 더듬거렸다.

핏물이 진득하게 손에 묻어나왔다.

적어도 경상은 아니었다.

“사랑하는여동생의 칼침 맛은 어때?”

소녀는 조롱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광인의 웃음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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