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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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몇 분에 불과했다.
사내가 용도불명의 물약을 마시고, 혼절한 뒤, 다시 깨어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그랬다.
실은 ‘몇 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짧은 간격이었다.
고작해야 1분에서 2분 남짓.
하지만 전장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얄팍한 차이만으로 충분했다.
지금껏 상황을 주도하던 미트람은 말없이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낯빛에는 어느덧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새하얀 이마에 몇 방울의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을 정도였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변화였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여전히 이안 페르쿠스였다.
우선 겉모습부터가 그랬고, 체내의 마력 또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일절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미트람이 경계해야 할 까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트람은 제 본능에 새겨진 공포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성을 넘어선 직감의 영역에서 마구 경보를 내리고 있었다.
저 사내는 다르다.
이안 페르쿠스는 본래부터 강하고 위험한 상대였으나, 지금의 이안 페르쿠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수십 년 전, 암흑사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떠올린 가능성에 미트람의 숨이 가빠졌다. 수없이 많은 육체를 갈아타며 영원한 수명과 젊음을 누려온 그녀였다.
삶에 대한 집착은 누구보다 강했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미트람의 입에서 발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어, 어차피 이제 당신 혼자 남았어! 떼로 몰려와도 아무것도 못했는데, 도대체 혼자 무얼 할 수 있다고……!”
“많지.”
사내는 메마른 목소리로 그렇게 답했다.
담백하고 직설적인, 강자의 언어.
그래서 미트람은 더욱 소름이 돋았다.
저 한 마디야말로 사내의 꾸밈없는 진심일 테니까.
사내가 검을 든 채 한 걸음을 내딛었다.
“잘 봐, 지금부터 하나하나 보여줄 테니까.”
미트람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실험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장 죽여 버려!”
이전까지 보이던 여유나 조롱 따위는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미트람은 경어마저 그만둔 채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그 눈동자에 깃든 두려움을 보고, 사내는 헛웃음을 삼켰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사내가 읊조렸고, 중무장을 한 실험체 둘은 단숨에 짓쳐들었다.
금속의 포탄처럼 쏘아진 육중한 두 육체가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새겼다.
그러나 사내는 움찔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단지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며, 검극을 좌하단으로 떨어트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촤악, 하고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미트람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는 일행도 다르지 않았으나, 특히나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세리아였다.
일곱 줄기의 발톱 자국이 새겨진다.
그 은빛의 실선을 타고 핏물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사내에게 달려들던 실험체들이 흘린 생명의 흔적이었다.
두 거구가 갑옷채로 동강나는 광경은, 다소 비현실적이라 느껴지기까지 했다.
갑옷뿐만이 아니었다.
휘두르려던 칼날조차 은빛의 절단면을 따라 툭툭 떨어져 내렸다. 지탱한 곳을 잃은 금속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구슬픈 단말마를 남겼다.
그 절정에 이른 살인 기예의 이름은 세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금사검(???)!”
그것도 일곱 줄기의 금사검이라면, 전성기 시절의 유르디나 후작과 동급의 숙련도였다.
세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사내는 그러든 말든 신경조차 쓰는 기색이 없었다.
후두둑 핏물과 함께 토막 난 신체 부위가 쏟아져 내리자,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미트람이 더듬거리며 울먹였다.
“내, 내 걸작이… 어, 어떻게…….”
“말했잖아.”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쏟아진 핏물과 내장 사이를 찰박찰박 걸어갔다.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아직 한참 더 남았어.”
한동안 몸을 부르르 떨던 미트람의 눈에 기어코 핏발이 섰다.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는 두 팔을 펼쳤다.
검은 연기가 지반으로부터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악신의 힘이었다.
그럼에도 사내의 낯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읽어낼 수 없었다.
낭패감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불안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감이나 살의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단지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점차 짧아지는 거리감에 미트람은 더욱 초조한 기색이었다.
그녀가 지휘하듯 손을 휘두르자, 일행을 제압하고 있던 실험체를 제외한 모든 적들이 사내에게 들이닥쳤다.
유독 품질이 좋은 갑옷을 입은 실험체가 하나, 단검을 든 실험체가 둘, 그리고 후방에는 활을 든 실험체와 무게추가 달린 와이어를 쥔 실험체까지도 있었다.
하나하나가 일행을 난처하게 만들었던 강적들이었다.
미트람이 수십 년에 걸쳐 고르고 골라 만든 걸작들이 범상할 리가 없었다.
둘이라면 몰라도, 그 수가 다섯에 이르면 사내 또한 곤혹을 겪어야 하리라.
과연 미트람의 기대대로, 실험체가 다섯이나 달려들자 사내의 대응도 달라졌다.
그의 신형이 땅을 박차고 쏘아졌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임하겠다는 뜻이었다.
쇄도한 사내는 곧장 갑옷을 입은 실험체의 목전까지 도달했다.
눈 깜짝할 새 육박한 사내의 모습에 실험체는 황급히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실험체는 이전부터 검을 들고 있던 보람조차 거두지 못했다.
카각, 하고 역수로 올려 그은 칼날을 타고 실험체의 검이 흘러내렸다.
경로가 조금만 틀어졌을 뿐인데도 실험체는 조금도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사내는 그대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실험체의 칼날을 털어낸 사내의 검이, 은빛의 수평선을 그렸다.
이음새가 튼실한 갑옷이었으나 사내의 오러마저 버틸 재간은 없었다. 투구를 쓴 머리 하나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더불어 들이닥친 것은 단검을 쥔 실험체들이었다.
사내의 양 측면을 점하고 쏘아진 빛살은 너무나 빨랐다. 사내의 대응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쫓아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착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되었다.
팍, 팍, 하고 연달아 두 번의 벼락이 내리꽂혔다.
‘벼락’이라는 표현 외에는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미트람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며, 그의 눈동자에 불신이 어렸다.
“무, 무슨……!”
수십 년을 살아온 그녀도 난생 처음 보는, 너무나 빠른 검격이었다.
횡으로 그어진 검극이 곧장 양 측면을 두드리며 두 실험체의 가슴팍에 관통상을 남겼다. 그 충격량을 이겨내지 못한 두 실험체의 상반신이 쓰러지듯 젖혀졌다.
당연히 사내를 노리던 두 빛살의 경로도 자연히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초음속의 검격이 불러온 후폭풍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쾅, 하는 폭음이 터져 나오며 작은 폭풍이 주위를 휩쓸었다.
막 쓰러진 두 실험체의 몸이 그 충격파에 휩쓸렸다. 마구잡이로 회전하던 두 구의 시체가 내동댕이쳐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날아들던 화살이 비틀리고, 빈틈을 노리던 와이어도 엉망진창으로 출렁였다.
단 일격에 사내를 향하던 모든 위협이 제거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진짜 벼락이라도 내리꽂힌 듯한 모습이었다.
그 폭력적인 난류 속에서 날붙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사내가 들고 있던 검이었다.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검은, 곧장 활을 들고 있던 실험체의 이마를 관통했다. 그리고 그 두개골을 절단하며 또 한 번의 궤적을 틀었다.
정중동의 묘리.
이는 익히 알고 있던 기술이었기 때문에, 미트람은 사력을 다해 마지막 실험체를 조종했다.
실험체가 곧장 주저앉듯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그 위로 은색의 빛살이 스쳐지나갔다.
아슬아슬한 시차였다.
전투를 지켜보던 미트람의 눈에 처음으로 희열이 어렸다.
이안 페르쿠스가 투척한 무기의 궤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번뿐이었다.
최소한 그녀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렇다면 이제 사내에게 무기는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땅바닥에서 무기를 주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으니, 당장 반격에 나서야 했다.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미트람은 곧장 지시를 내리려다 멈칫했다.
그녀의 눈에 기묘한 광경이 띄었기 때문이었다.
검이 제자리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를 이해한 미트람의 낯빛이 일순 창백해졌다.
팍, 하고 검이 주저앉은 실험체의 목을 베었다.
망나니가 사형수를 처형하듯 깔끔한 참수였다.
빙글빙글 회전하던 검은 핏물과 함께 지반으로 처박히더니, 이내 다시금 사내의 손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이었다.
사내가 두 명의 실험체를 처리하고, 다시 검을 회수할 때까지 보인 변화는 그랬다.
넋이 나간 미트람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사내의 피로한 목소리였다.
사내는 늘 그렇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애송이랑 동급으로 생각하면 곤란하지.”
그 말을 끝으로 풀썩, 하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실험체의 몸이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일행을 제압하고 있는 실험체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로 사내를 상대하려면, 도리어 상대의 전력을 늘려주는 꼴이었다. 당장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는데 후방 지원까지 업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미트람은 선연한 공포에 젖어 본능적으로 외칠 뻔했다.
당장 저 사내를 막으라고.
저 느긋한 걸음걸이를 멈춰서, 더는 그녀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고.
미트람이 발작하듯 외쳤다.
“더 다가오면 동료들의 목숨은 없……!”
펑, 펑, 펑.
풍선처럼 일행을 제압하고 있던 실험체들의 골통이 터져 나갔다.
사내가 탁, 하고 땅에 떨어진 단검을 손에 쥐고 투척한 결과였다.
너무나 간단히 무력화된 전력에 얼떨떨하기는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억누르고 있던 손길에 힘이 빠져나가고, 옆으로 하나둘씩 머리 잃은 몸뚱아리가 쓰러질 때까지도 일행들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숨조차 멈춘 채 사내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내는 그러는 일행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단지 잠시 멈추었던 걸음걸이를 재개했을 따름이었다.
미트람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오, 오지 마!”
불쑥, 지반을 뚫고 솟아나온 실험체 하나의 머리가 붉게 만들었다.
폭발의 전조, 사내는 놀란 기색도 없이 검면을 정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쾅, 하고 폭음이 울려 퍼진 그 찰나.
사내는 검면으로 폭심지를 후려쳤다.
그러자 충격파가 부채꼴로 퍼져 나가며 핏물과 파괴의 흔적을 남겼다.
그 방향은 사내가 선 정반대편, 미트람이 서 있는 쪽이었다.
미트람의 몸이 허공에 솟구치더니 땅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이가 딱딱 부딪히며 불안과 초조가 극에 달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상대였다.
폭발의 범위를 임의로 조정하고 방향까지 설정하다니?
미트람은 대응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사고를 거치더라도 그 결론만큼은 오직 하나였다.
그녀의 죽음.
사내의 선언이 곧 현실이 되었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미트람은 필사적으로 두뇌를 굴렸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삶에 대한 집착이 그녀의 머리에 마구잡이로 윤활유를 퍼부었다.
그렇게 미트람은 제 생명줄을 찾아냈다.
덜덜 떨리던 여인의 몸에 경련이 잦아들고, 이내 큭큭거리며 웃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희미한 광증이 깃든 미트람의 눈동자가 사내를 향했다.
엎어진 채 머리를 싸들고 있던 차라 조금 추한 몰골이긴 했으나, 상관없었다. 지금 미트람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이었다.
그녀는 멋진 발상을 떠올렸다.
“이안 페르쿠스… 당신, 강하군요.”
이제 여인의 지척까지 도달한 사내의 걸음이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듯, 금빛으로 타는 눈동자가 미트람을 향했다.
미트람은 제 음색에 킥킥거리는 소리를 섞었다.
“멋져요, 훌륭합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실험체의 재생 기능도 작동하지 않는군요… 그러나 당신이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내의 닫힌 입술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를 무슨 뜻으로 해석했는지, 미트람은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어찌나 흥에 겨웠는지 들썩들썩 몸을 일으키고 있을 정도였다.
“10년이 넘도록 준비한 대계획의 실현이 눈앞에 있습니다… 물론, 이 페르쿠스 영지에 말이죠! 오오, 주의 권속께서 이 자리에 강림하리라! 수백이 죽고 수천이 다칠 겁니다… 이미 의식은 시작되었기에, 제가 없으면 그대로 진행될 테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구나 그럴 터였다.
저토록 광기에 젖어 아무렇게나 외치는 말에 거짓이 섞여 있다니, 아무리 음흉한 암흑사제라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공터의 분위기는 단번에 내려앉았다.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음모였다.
미트람은 그러한 기색을 읽고 더욱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를 살려주셔야 할 겁니다, 이안 페르쿠스… 당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영지민들이 죽고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여인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두 팔을 양옆으로 펼쳤다.
그리고 외쳤다.
“자, 어서 검을 내리시죠! 그리고 의식을 취소하라, 고… 혹?!”
그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은빛이, 허공을 횡단했다.
정확히 미트람의 목을 가로지르는 궤적이었다.
미트람이 머리가 하늘 위로 떠올렸다. 그것이 바로 미트람이 생에 마지막으로 지은 표정이었다.
경악과 불신으로 굳어진 낯이었다.
푸슉, 하고 피를 울컥울컥 뿜으며 휘청이는 미트람의 육신을 보고, 사내는 일말의 감정조차 묻어나지 않는 음색으로 말할 뿐이었다.
“……그러든가.”
질긴 삶을 이어온 암흑사제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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