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254화 (254/649)

〈 254화 〉 4. 라이넬라의 운명은 라이넬라가 정한다(47)

* * *

피로 젖은 공터가 정적에 잠겼다.

탁, 하고 사내가 검에 묻은 핏물을 한 차례 털어낼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미트람의 ‘걸작’들은 그 호칭에 걸맞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전위 중 이안 다음 가는 실력자인 세리아조차 아차, 하는 사이 당했을 정도였다.

절단된 신체 부위조차 재생시키던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하던 적들은 영문도 모를 사이 사내의 손에 전멸해 버렸다.

난전과 고전을 거듭하던 과거가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일행은 끝끝내 버티지 못하고 제압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반면 사내의 앞에서 실험체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을 뿐이었다.

미트람이 자랑하던 불사신과 같은 재생 능력조차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토막 난 신체는 되살아나지 못했고, 미트람 또한 머리가 날아간 이후 부활의 조짐이 없었다.

사내가 무언가 수를 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사내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행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키면서도,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다르다.

저 사내는, ‘이안 페르쿠스’와 무언가가 달랐다.

예전이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다.

그때는 아직 이안과 연이 깊지 않았고, 또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넘어가고 말았던 탓이었다.

사실 그 외의 가능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몸은 그대로인데, 인격이 달라진다니.

미트람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설혹 듣더라도 마물의 신비한 능력이나, 강력한 저주 계열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나 종종 나오던 이야기였다.

그 진위마저 불분명한 풍문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주워들은 정보들을 종합하더라도, 저 사내의 존재를 해명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조작하는 주술은 대개 막대한 부작용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성은커녕 본래 인격의 파편이라도 남아있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멀쩡히 사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빙의한 육체에 너무나 자연스레 적응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이안과 함께한 셀린조차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이유였다.

기껏해야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셀린마저 그럴진대, 그 외의일행이 사내에게 의심을 품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일행도 이제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들이 알던 이안 페르쿠스가 아니었다.

만약 이안이라면 여태껏 겪어왔던 수많은 위기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또 지금까지 저만한 실력을 숨기고 있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용혈 문자에 이어, 또 다른 이안의 존재까지.

연달아 밝혀지는 비밀에 일행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나마 제일 먼저 마음을 다잡은 쪽은 성녀였다.

살얼음판 같은 성국의 정치판을 딛고 선 여인이었다. 뜻밖의 변수에도 침착을 되찾고 계산적으로 사고하는 건 그녀의 전문분야였다.

물론 그 성녀조차 아직 충격에서 온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애써 떨리는 음색을 가라앉힐 정도는 됐다.

성녀는 사내에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 누구에요?”

“이안 페르쿠스.”

담백하기 그지없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낯빛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무척이나 당연한 사실을 읊는다는 듯 태평한 어조였다.

다만 사내는 그 금빛 눈동자를 성녀에게로 향했을 뿐이었다.

성녀는 그 눈을 마주하자마자 몸을 움찔 떠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왔던 그녀였다.

그중에는 전쟁터에서 몇 년을 구른 베테랑 병사들도 있었다.

가족이나 연인을 잃고 마수에게 복수를 하러 다니는 마수 사냥꾼도 있었고, 연이은 배신으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성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저 사내만큼 닳고 닳은 심장을 지닌 이는 없으리라고.

어떠한 감정이라기보다 그 편린들만이 부유하는 눈동자였다. 그마저도 후회와 원독, 그리고 증오와 절망과 같이 부정적인 감정들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성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정작 사내에게 말을 거는 쪽은 따로 있었다.

“무, 뭐라는 거야… 이 괴물딱지가!”

여인 하나가 펄쩍 뛰며 분노를 토해냈다.

고깔모자를 쓴 사랑스러운 외형의 소녀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잘 어우러졌다. 자그마한 키에 걸맞지 않게 뚝심 있는 눈빛이 인상 깊은 미소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엘시 라이넬라, 평소부터 이안의 충견을 자처해 온 여인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용혈 문자의 등장과 사내의 믿을 수 없는 무위에 넋을 넣고 있던 엘시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되짚어 보니,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저 사내가 ‘주인님’이 아니라면, 진짜‘주인님’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게 한창 마음을 졸이고 있던 차였다. 그때 사내의 무성의한 대답이 들려온 것이다.

엘시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죽을 뻔한 목숨을 살려 주었다느니 하는 감사의 마음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엘시는 그보다 사랑하는 주인님의 안위가 더욱 신경 쓰였다.

이내 엘시의 앙증맞은 입에서 분노에 젖은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다, 당장 우리 주인님 돌려내지 못해?! 이안 페르쿠스으?! 좆까지 마! 우리 주인님은 너 따위보다 훨씬 멋진 분이셔! 그리고 더 자상하시고, 잔인하시고, 무자비한……!”

“입 다물어.”

싸늘한 음색이었다.

단 한 마디, 사내가 던진 말에 엘시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몇 년 동안 누군가에게 험한 말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엘시였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구박을 받기도 했고, 아카데미에서 모욕을 당한 적도 있었다.

다만 후일 엘시가 그 빚을 손수 이자까지 갚아주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 엘시를 함부로 도발하는 인물은 드물어졌다.

기껏해야 엘시가 먼저 시비를 걸면 델핀이 응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느닷없이 입을 다물라는 말을 들은 것은 실로 오랜만일 수밖에 없었다.

뇌리가 새하얘지는 시간이 지나자, 불길이 엘시의 목젖을 달구었다.

소녀의 눈빛이 단숨에 매서워졌다. 이대로 두면 엘시가 자랑하는 입담이 선을 보일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사내가 지친 목소리를 덧붙인 것은.

“그러지 않아도 돌려줄 생각이었으니까… 너희가 아는 '이안'을 빨리 돌려받고 싶으면, 어서 떠날 채비부터 해.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니까.”

의외로 협조적인 태도였다.

엘시는 움찔, 몸을 떨며 하려던 말에 제동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입 안에 어른거리는 온갖 나쁜 말을 쏟아내야 직성이 풀릴 터였다.

하지만제 주인님을 돌려준다니 할 말이 궁하기도 했고, 괜히 사내를 도발해봐야 이안만 위험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일었다.

지금으로서는 미심쩍더라도 사내의 말을 따르는 편이 최선이었다.

혹여 사내의 마음이 달라지기라도 할까 엘시는 허겁지겁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는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일순 멈칫한 사람은 사내였다.

그는 드물게도 불신을 담은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좁혀진 미간이 그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님’?”

“무, 뭐! 왜!”

엘시는 채비를 하다 말고 제 자그마한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으르렁거리는 꼴이 한 판 붙기라도 하겠냐는 태도였다.

단신으로 익스퍼트 이상의 전력을 갖춘 실험체 10명을 썰어낸 인간을 상대로 말이다.

제 주인님을 잠시라도 빼앗아 간 사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사내는 충격을 받은 부분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엘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하.”

그 이후로 사내는 엘시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따금씩 복잡한 눈빛으로 엘시를 몇 번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돌아갈 준비를 마친 후, 공터의 참상은 라이넬라 가문의 마도병단이 수습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공터에 진입한 레이놀드는 낯빛을 딱딱하게 굳혔다.

쓰러진 실험체의 양과 질만 보아도 알 수 있었던 탓이었다.

그들이 상대한 미트람의 실험체들은 미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이쪽이 진짜였군… 어떻게 해치웠나?”

사내는 말없이 제 칼집을 툭툭 건드렸다.

무언의 신호였으나 그 의미는 명확했다.

단지 그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레이놀드에게 당장 증언의 진위를 가릴 여유는 없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알겠네,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지. 이곳은 일단 우리가 수습하겠네.”

여정은 그렇게 페르쿠스 저택으로 이어졌다.

반나절 남짓의 시간 동안, 사내와 일행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가장 사회성이 좋은 셀린조차 주눅이 들어 눈치를 살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만큼이나 사내가 보인 활약은 놀라웠고, 그 이상으로 섬뜩한 면이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행을 한 줌의 핏물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던 만큼, 일행의 불안은 필연적이었다.

그 미묘한 긴장감을 견디지 못한 쪽은 의외로 사내 쪽이었다.

“……어떻게 죽였는지 궁금하지 않나?”

늘 그렇듯 감정이 담겨있지 않아 의도조차 불분명한 물음이었다.

시간을 넘어선 대화의 시작치고는 꽤 볼품없는 화두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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